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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06화 (106/227)
  • < 제 34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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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의 움직임은 카타리나와 닮았다. 지금까지처럼 육체의 성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마력이 용호의 움직임을 도왔고, 이는 폭발적인 순간 속도를 낳았다.

    눈앞에서 티그리우스가 사라졌을 때 용호는 좌우로 시선을 분산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투기장에서 맞붙은 사역마 가운데도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는 녀석이 있었었다. 눈으로 쫓기조차 버거운 그런 속도였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엔 빠른 것이었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이동의 과정이 필요했다.

    잔상이라도 좋았다. 무엇이든지 진로를 알아낼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잡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앞으로 돌진하기 위해 지면을 박찼던 용호의 발이 다시 바닥에 닿았다. 마른 침을 한 번 삼킬 새도 없는 그 짧은 순간에 용호의 본능이 반응했다. 등 뒤에서 오필리아의 비명 같은 탄성이 터졌다.

    “블링크!”

    목소리가 끝났을 때. 용호는 이미 돌아서 있었다. 정면의 상대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다시 나타날 곳은 어디인가. 정면에서 다시 나타나겠는가? 아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역시 측방이나 배후이다. 그리고 여기에 무어라 설명 못할 한 가지가 더해졌다. 아몬에게 수십, 수백 번을 넘게 죽으며 쌓은 감각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이 답을 내놓은 것일지도 몰랐다.

    중요하지 않았다. 용호는 직감했고, 돌아섰다. 그렇기에 근거리 공간 도약 마법으로 눈앞에서 사라졌던 티그리우스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용호의 반전은 분명 예상보다 빨랐다.

    하지만 티그리우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애당초 티그리우스 자신보다 마력이 거의 두 배 이상이나 되는 용호였다.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도전자’인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선을 다해 할 뿐이었다.

    동시에 두 가지 마법이 준비되었다. 하나는 지팡이로부터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티그리우스의 왼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지팡이 끝에서부터 마력의 덩어리들이 기관총처럼 쏟아졌다.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공격 마법 가운데 하나인 에너지 미사일이었다.

    충분히 빨랐다. 정면에서 쏟아지는 십여 개의 마력 덩어리는 분명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앞으로 나아갔다. 옆으로 피하거나 뒤로 물러서서 티그리우스와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을 보았다. 아니, 이제는 느꼈다.

    화살과 같았다. 에너지 미사일들은 일정한 궤적을 그렸다. 용호는 그 궤적을 감지해 움직였다. 간발의 차로 에너지 미사일들을 회피하며 돌진하는 용호의 모습은 같은 편이 보기에도 아찔했다.

    “그리스!”

    티그리우스가 다급히 왼손에 준비한 마법을 실현시켰다.

    용호의 정면에 땅이 마찰계수를 잃고 극도로 미끄럽게 변했다. 갖가지 공격 마법은 예상했지만 이런 식의 방해는 용호도 예상하지 못했다. 속절없이 땅에 발을 딛었고, 그 여파로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티그리우스는 그 틈을 노려 다시 한 번 블링크를 펼쳤다. 용호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거리를 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티그리우스의 판단은 정확했다.

    용호는 그냥 넘어지지 않았다. 마법의 종류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마법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감지했다. 그랬기에 용호는 미끄러지는 그 순간 아몬을 휘둘렀다. 그 휘두름에 강맹함은 없었지만 애당초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창끝에서부터 일어난 녹염의 파도가 티그리우스가 머물렀던 장소를 휩쓸고 지났다.

    티그리우스는 이해했다. 마몬 가의 가주는 마력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어쩌면 아예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마력에 민감한 자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 같은 일을 촌각을 다투는 전투 시에 한다는 것이 비정상적이긴 했지만 이미 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다시 한 번 용호의 배후를 점하는 대신 뒤로 크게 물러난 티그리우스는 즉각 다음 마법을 발동시켰다. 메모라이즈 해온 마법의 숫자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용호와 티그리우스 사이를 색색의 빛이 가득 채웠다. 그 현란함은 마계의 하늘에 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뛰어난 청력은 듣지 않아도 될 자잘한 소음까지도 포착하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런 예민함은 때론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볼 수 있다면 보아라.

    느낄 수 있다면 마음껏 느껴라.

    공급 과잉이었다. 마력의 흐름에 집중하고 있던 용호에게는 온 세상이 마력의 빛으로 가득 차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티그리우스가 연달아 에너지 미사일을 쏘았다. 십여 발에 달하는 에너지 덩어리가 마치 폭격처럼 용호를 덮쳤다.

    이번에는 티그리우스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공격은 분명 명중했다. 하지만 대부분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녹염이 피어올랐다. 티그리우스의 정교한 공격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용호는 카이완의 반지에 깃든 힘인 왜곡의 방패로 에너지 미사일을 거의 대부분 막아냈다. 녹염을 일으켜 주변의 마력을 차단함으로써 스스로를 회복했다.

    티그리우스는 쓰게 웃었다. 과연 보통 놈이 아니었다. 포라스와 융케라스를 연달아 격파하고 저 아가레스까지 쓰러트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쉬이 질 생각 따윈 없었다. 아니, 티그리우스 자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승리를 생각했다.

    티그리우스가 지팡이를 든 자세를 바꾸었다. 다시 한 번 용호와 거리를 벌리는 대신 오히려 돌진했다. 마치 용호와 근접전을 벌일 태세였다.

    녹염이 일시에 사그라들었다. 스스로 일으켰던 불꽃을 뚫고 나온 용호는 정면에서 쇄도하는 티그리우스에게 아몬을 휘둘렀다. 티그리우스는 그 공격을 피하기는커녕 오히려 아몬을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굉음이 일었다. 상상 이상의 괴력이었다. 어찌나 강렬한지 양팔에 지릿한 여운이 남을 지경이었다.

    근력 강화 마법인 스트렝스와 속도 향상 마법인 헤이스트.

    그것만이 아니었다. 티그리우스는 도합 다섯 개에 달하는 보조 마법을 스스로의 몸에 걸었다. 그렇지 않아도 강력한 육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켰다.

    노인이란 겉모습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었다.

    포라스도 겉모습만 보면 노인이었었다.

    티그리우스가 다시 블링크를 펼쳤다. 이번에는 용호의 오른쪽 측방에서 나타나 지팡이를 휘둘렀다. 용호는 가까스로 그 공격을 비껴낼 수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지팡이가 아니었다. 포라스의 짐승같은 움직임과는 대비되는, 정갈하고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오랜 시간 동안 특정 무술을 익혀온 것이 분명했다.

    근접전이 펼쳐지는 와중에도 마법이 난무했다. 에너지 미사일 같은 공격 마법 뿐만 아니라 극소지역 그리스 같은 마법들이 용호를 혼란케 했다.

    하지만 용호는 잘 견뎌냈다. 결코 티그리우스에게 휘둘리지 않았다.

    티그리우스가 스스로의 육체 능력을 폭발적으로 향상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용호의 육체 능력이 크게 뒤지는 것은 아니었다. 환골탈태라 해도 좋을 변화를 겪은 용호의 육신이었다.

    티그리우스는 분명 오랜 세월 스스로의 기술을 연마했다. 하지만 과연 실전 경험은 어떠할까. 목숨을 건 사투의 횟수라면 티그리우스를 아득히 뛰어넘는 용호였다. 누가 뭐라 해도 이미 수백 번 이상 죽음을 경험한 몸이었다.

    용호는 티그리우스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물러설 거라 생각한 순간에 오히려 앞으로 나아갔다. 무모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천운에 맡긴 사람 같은 행동이었다.

    ‘아니야!’

    티그리우스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모두 계산된 행동이었다. 운이나 무모함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쾅!

    아몬이 쏟아졌다. 티그리우스의 지팡이를 찍어 눌러 땅에 고정시켰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강렬한 녹염을 방출했다. 마치 매가 비상하듯 화려하게 꽃핀 녹염이 티그리우스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근거리였다. 블링크를 발동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블링크의 사용횟수를 모두 소진했을 지도 몰랐다.

    찰나의 시간.

    용호와 티그리우스의 시선이 교차했다. 티그리우스는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녹염이 그런 티그리우스를 뒤덮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티그리우스가 용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티그리우스가 한 걸음을 내딛었다. 녹염은 티그리우스를 해치지 못하고 흩어졌다. 용호가 티그리우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녹염의 출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 아니었다.

    플레임 실드.

    오늘의 결투를 위해 티그리우스가 준비한 비장의 수 화염 속성의 공격을 막아내는 불꽃의 장벽.

    지팡이의 도움을 받는다는 전제하에 티그리우스는 본래 세 가지 마법을 동시에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두 가지 마법만을 발동한 것은 플레임 실드의 유지를 위해서였다.

    용호가 최초로 내 쏘았던 녹염.

    사실 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대로 뒤집어썼어도 플레임 실드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과장되게 피했다. 한 순간, 역전의 기회를 붙잡기 위해!

    플레임 실드가 붉게 타올랐다. 티그리우스는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대로 용호를 향해 돌진하며 오른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새하얀 마력의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녹염은 통하지 않는다. 창을 쓰기에는 너무 짧은 거리이다.

    플레임 실드는 녹염뿐만 아니라 용호의 다른 공격마저 막아내는 방벽이 되어줄 터였다.

    지금 이 순간.

    승리의 여신은 티그리우스 자신에게 돌아섰다. 완벽한 체크 메이트였다!

    하지만 티그리우스는 승리를 결정지은 그 순간 기묘한 것을 보았다.

    용호 역시 아몬을 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좁아진 티그리우스와의 거리를 더욱 좁히듯 앞으로 몸을 날렸다. 마치 타오르는 플레임 실드에 스스로의 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무모함인가.

    아니었다.

    용호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력을 느낄 수 있는 티그리우스였다. 지금 이 순간 느껴져서는 안 되는 기운에 경악했다.

    강렬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용호의 왼손 마장에서부터 뿜어진 그것이 플레임 실드를 깨부쉈다. 한기 앞에 플레임 실드는 마치 얇디얇은 유리창처럼 허무하게 깨어졌다.

    ‘두 가지 속성을?!’

    마법이 아니었다. 순수한 마력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경악을 토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여, 대체 어찌하여!

    생각을 잇지 못했다. 플레임 실드를 파괴한 용호의 왼주먹에 이어 오른주먹이 쇄도해왔다. 티그리우스는 마지막 블링크를 사용해 뒤로 크게 물러섰다. 워낙에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기에 용호의 배후를 점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티그리우스를 용호가 추적했다. 마치 뒤로 물러설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조금의 주저도 없는 돌진이었다.

    블링크는 분명 공간을 도약하는 마법이었다.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의 과정 같은 것이 눈에 보일 리 없었다.

    하지만 마력은 아니었다. 도착지의 마력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처럼 배후로 돌아갔다면 감지하기 힘들었을 터였지만 이번에는 용호의 시야 내에서 블링크를 펼친 티그리우스였다.

    용호의 손에 다시 아몬이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왼손의 마장에서는 여전히 한기가 휘몰아쳤다.

    둘중 어느 것인가.

    생각할 틈이 없었다. 티그리우스는 마왕의 권능을 발하였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두 가지 마법을 하나로 합쳤다.

    불꽃을 막아내는 플레임 실드.

    한기를 막아내는 아쿠아 실드.

    용호도 그것을 보았다. 눈앞에서 두 가지 색과 속성이 하나 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그렇기에 멈추지 않았다. 용호는 아몬을 머리 위로 크게 들어올렸고, 티그리우스가 펼친 방벽을 향해 내려쳤다. 그리고 그 순간 벼락이 쳤다. 비유가 아닌, 진짜 벼락이!

    뇌격이었다.

    세 번째 속성이 플레임 실드와 아쿠아 실드의 속성력을 무력화시켰다.

    티그리우스는 경악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고 있던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에게 화염과 냉기 속성이 있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뇌격이라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용호가 뇌격 마법을 배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스컬은 이해했다. 브리가다 목걸이가 스컬 자신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었다.

    연이어 카타리나도 알 수 있었다. 용호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검은 마력이, 어둠의 속성을 가진 마력이 브리가다를 통해 용호에게 전달되었다.

    순간적으로 마력이 소진된 탓에 아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느낀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용호와 이어진다는 깊은 충실감이 카타리나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고통보다는 환희가 더 컸다.

    용호는 브리가다를 통해 탐욕의 마력을 예속 사역마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예속 사역마들은 지금껏 자신들의 마력에 탐욕을 가미할 수 있었다.

    브리가다의 역할은 힘의 증폭과 호응, 그리고 저장!

    브리가다에 깃들어 있던 탐욕이 이번에는 역으로 예속 사역마들의 마력을 흡수했다. 용호에게 전달하였다.

    구시온이 언급했던 다음 단계.

    브리가다의 진정한 힘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예속 사역마들 역시 강해져야 한다고 말했던 이유!

    용호는 스스로 깨달았다. 실전 속에 그 힘을 발하였다. 높이 들어 올린 아몬에 카타리나의 검은 마력이 응집되었다.

    다시 한 번 내려쳤다. 카타리나의 장기를 드러내듯 거대하고 거대한 검으로 변모한 검은 마력이 티그리우스의 방어막을 완벽하게 파괴했다. 그 압도적인 기세에 짓눌린 티그리우스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몬은 그런 티그리우스를 해하지 않았다. 검은 마력은 허공만을 베었다.

    티그리우스는 숨을 헐떡였다. 떨리는 눈으로 용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해했다.

    이제는 계약을 지켜야 할 때였다.

    “패배를 인정하오. 마몬 가의 가주여- 아니, 나의 주군이시여.”

    깨끗한 승복이었다. 용호는 마찬가지로 거친 숨을 토했다. 익숙하지 못한 브리가다의 운용은 꽤나 힘겨웠다. 하지만 웃으며 아몬을 거두었다. 마장의 한기 또한 거둔 뒤 티그리우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를 손수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환영한다, 티그리우스. 마몬 가의 마법사여.”

    그 분명한 호칭에 티그리우스가 쓰게 웃었다.

    가타부타 말을 늘어놓는 대신 다시 한 번 신하의 예를 표했다.

    마몬 가와 란돌트 가가 하나 되는 순간이었다.

    제 34장 - 란돌트 가 끝, 제 35장 - 던전 메이킹으로 이어집니다.

    < 제 34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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