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4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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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마몬 가를 출발한 오필리아가 란돌트 가의 두 번째 답장을 받아오는 데는 나흘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삼일 뒤.
용호는 투기장 특별석에 앉아 마른 침을 삼켰다. 벌써 몇 번이나 방문해 이제는 익숙해진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방문했을 때처럼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투기장에서는 카타리나와 1층의 플로어 마스터 간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1층의 플로어 마스터인 놀 치프 틴은 일반적인 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더욱이 놈은 무척이나 빠르고 영리했다. 검과 조라는 서로 상이한 두 가지 무기를 동시에 구사해 공간을 장악했다.
물론 카타리나는 놈보다 더 빨랐다. 이제는 수족처럼 부릴 수 있게 된 검은 마력의 칼날 또한 무시무시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객관적인 전력만을 논한다면 카타리나가 우위에 있었다. 구시온도 인정한 바였고, 용호 역시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움이란 것은 객관적인 전력만으로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십분 여.
마침내 놀 치프 틴이 바닥에 쓰러진 그 순간 용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구시온에게 양해를 구할 것도 없이 투기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타리나!”
카타리나는 승리했다. 놀 치프 틴은 검은 칼날에 온 몸이 난자되어 쓰러졌다.
하지만 카타리나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온 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개중 절반 이상은 놀 치프 틴의 것이 아니라 카타리나 본인의 것이었다.
용호가 투기장에 도달했을 때는 카타리나 역시 버티지 못하고 제 자리에 주저앉은 상태였다.
숨결이 거칠었다. 더욱이 상처 부위가 중독된 것처럼 새카맣게 부풀어 올랐다.
투기장에서의 싸움은 현실 그 자체라 해도 좋았지만 그렇다 하여 ‘진짜’인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부상을 입어도 싸움이 끝나면 회복되기 마련이었다. 투기장의 플로어 마스터들이 싸우다 죽어도 이내 부활하는 것 역시 - 사실 죽은 적 자체가 없기 때문에 부활이라 할 수도 없었지만 - 같은 이치에서였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경우가 달랐다.
가주가 아닌 사역마였고, 그랬기에 용호와는 다른 가혹한 규칙을 강요받았다.
카타리나의 부상은 모두 진짜였다. 가주가 아닌 사역마는 투기장의 보상을 취하기 위해 진짜 사투를 벌여야만 했다. 투기장에서의 죽음은 곧 진짜 죽음을 의미했다.
중독된 상태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인지 카타리나는 이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이미 독이 온 몸에 퍼진 것 같았다.
용호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카타리나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힌 뒤 가장 상처가 심한 복부 위에 손을 올렸다.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용호가 카타리나의 도전 날짜를 오늘로 잡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진화 숙련치가 꽉 찼을 때를 100으로 친다면 1층에 도전하기 직전 카타리나의 진화 숙련치는 99였다.
이기든 지든 진화 숙련치를 꽉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진화의 권능의 회복 효과라면 여간한 부상은 모두 완치시킬 수 있었다.
설사 진화의 권능으로 치료할 수 없을 정도의 심한 부상이라 해도 괜찮았다. 적어도 스카자하가 있는 생명의 정원까지 이동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다행히 카타리나의 부상은 진화의 권능만으로도 회복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카타리나의 표정이 점점 평온하게 변했다. 체력을 너무 소진한 탓인지 그대로 졸도해 버렸지만 얼굴에는 승리에 대한 기쁨과 진한 성취감이 어려 있었다.
용호도 비로소 한시름을 놓았다. 구시온이 그런 용호와 카타리나 뒤에 다가서며 껄껄 웃었다.
“1층 돌파를 축하한다.”
구시온이 손가락을 놀리자 놀 치프 틴의 가짜 시신 위에 형성되어 있던 ‘마몬의 마력’이 카타리나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왕이 아닌 마인의 정수 흡수 효율은 무척 안 좋은 편이었지만, 카타리나는 경우가 조금 달랐다.
그녀는 탐욕의 왕인 용호의 예속 사역마였고, 브리가다를 통해 미약하나마 탐욕의 마력을 부리는 자였다.
탐욕이 마력 흡수를 도왔다.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많은 마력을 카타리나가 취할 수 있게 해주었다.
더욱이 용호가 택한 것은 마력 특화 진화였다. 덕분에 카타리나의 마력이 단숨에 크게 증가했다. 이 정도면 용호가 예상한 것 이상의 성과였다.
“조만간 네 번째 뿔이 돋아나겠군.”
구시온이 카타리나를 슥 훑어보며 그리 말했다. 기특한 마음이 든 용호는 저도 모르게 카타리나의 보드라운 뺨을 한 번 꼬집은 뒤 구시온 쪽으로 돌아섰다. 허공에 떠오른 빛의 상자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상은 내가 골라도 돼지?”
“그래, 아주 다 털어가라. 다 털어가.”
용호는 지체 없이 구시온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탐욕의 인도를 따라 선택한 빛의 상자에서 붉은 허리띠가 나왔다.
“힘의 허리띠군. 장착하면 힘이 강해지는 심플한 아티팩트지. 거기 귀쟁이 아가씨의 부족한 근력을 보충하기에 좋을 거다.”
“카타리나가 쓰기에는 너무 큰데?”
“장인 하나 수하로 거뒀다며. 구멍 몇 개 더 뚫어 달라고 해.”
그냥 허리띠도 아니고 명색이 아티팩트인데 과연 그렇게 험하게 다뤄도 될지 의문이었지만 용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띠를 갈무리 한 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카타리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구시온이 다시 말했다.
“어때? 여세를 몰아서 너도 9층에 도전하는 건?”
제법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마몬의 마력을 봤기 때문인지 용호 역시 어느 정도 마음이 움직였다.
하지만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쓰게 웃으며 답했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한층 올라 갈 때마다 난이도가 상승하는 투기장이었다. 9층에 도전해 더 강해진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무조건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차라리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 나았다.
구시온은 이내 알아들었다. 용호를 인도하기 위해 짐승 가면의 사내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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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답장이 도착하고 오일 째가 되는 날 아침.
황야에 선 용호는 시선을 멀리하였다. 그런 용호의 등 뒤에는 카타리나와 스컬, 오필리아가 자리했고, 각기 저마다의 무장을 갖춘 스컬 부대 일곱 기가 다시 그 뒤를 받쳤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용호였지만 오래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저만치 먼 곳에서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란돌트 가의 가주 티그리우스 란돌트와 그 수하들이었다.
용호와 티그리우스는 각기 결투 장소와 시간을 정했다.
마몬 가와 란돌트 가 사이에 위치한 황야 가운데서도 외진 곳이 용호가 선택한 장소였다. 양가 모두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고, 사방이 확 트여 있었기에 매복이나 함정을 준비하기도 어려웠다. 그리고 이렇게나 개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보는 눈이 없다는 것 역시 장점이었다.
수하들은 양쪽 모두 열 명씩만 데려오기로 하였다. 너무 적지도, 그렇다고 많지도 않은 딱 적절한 숫자였다.
“란돌트 가의 가주, 티그리우스 란돌트다.”
공룡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도마뱀의 등 위에서 가볍게 내려선 노인이 스스로를 소개했다. 낮고 중후한 목소리였다.
이미 오필리아를 통해 란돌트 가의 가주- 티그리우스 란돌트의 초상화까지 확인 한 용호였다. 하지만 역시 느낌이 달랐다. 현실 속의 티그리우스는 초상화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억센 느낌을 주는 노인이었다.
키가 크고 말랐다. 깔끔하게 정리한 머리칼과 수염은 백색에 가까운 회색이었다. 날카로운 눈매 속에는 잿빛 눈동자가 자리했다.
용호가 답장의 글씨체에서 느낀 그대로였다.
티그리우스에게는 기품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영국 신사, 진짜 귀족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티그리우스의 등 뒤에는 마찬가지로 정갈한 복장을 한 사역마들이 서 있었다. 여러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오크까지도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용호 역시 살라미에서 내려섰다. 티그리우스를 마주한 채 스스로를 소개했다.
“마몬 가의 가주 천용호다.”
천용호라는 이름에 티그리우스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특별히 이름을 감춘 적이 없는 용호였지만, 딱히 어딘가에 가서 자신의 이름을 선전한 적도 없었다. 자유도시에 거주하는 마계인들 역시 대부분 용호를 ‘마몬 가의 가주’ 혹은 '불꽃의 마왕'으로만 기억할 뿐, 그 이름까지는 알지 못했다.
천용호.
별의 별 종족이 다 뒤섞여 있는 마계에서도 이질적인 이름이었다. 적어도 순수한 마몬 가의 혈통은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티그리우스는 용호의 이름에 연연하지 않았다. 검이나 창 대신 거머쥔 커다란 지팡이로 땅을 찍었다. 무기로 써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금속제 지팡이는 숫제 봉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길었고, 한 쪽 끝에는 달을 등진 날개 달린 여인의 조각이 붙어 있었다. 단순한 장식이라기보다는, 어떤 마법적 의미를 가진 기물 같았다.
“이미 서신으로 서로의 뜻을 확인했으니 길게 끌 필요는 없겠지. 미리 이야기했던 ‘계약의 서’다. 나는 이미 서명했으니 서명해라.”
말을 마친 티그리우스가 지팡이로 땅을 찍자 허공에 핏빛의 붉은 문자가 형성되었다.
그간 티그리우스가 보내온 서신들처럼 딱 필요한 내용만이 담겨 있는 계약서였다.
용호는 바로 서명하기에 앞서 잠시 오필리아를 돌아보았다. 오필리아는 눈짓으로 계약의 서가 확실하다는 뜻을 전했다.
계약의 서는 이름 그대로 계약을 위한 아티팩트였다.
계약서에 양자 모두가 서명함으로써 완성되는 이 마법의 도구는 강력한 억지력을 발할 수 있었다.
애당초 마법 자체가 서명한 양자의 마력으로 운용되는 것이었기에 양자 간의 마력 차이 같은 것은 무의미했다. 어느 한쪽의 마력이 강하다 하여 계약의 서의 내용을 무시할 수도, 그 억지력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계약의 서를 통해 한 계약은 실로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계약의 서를 마계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려웠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절대성과 정직함이 많은 이들의 거부감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용호는 서명하기 앞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 보았다.
워낙에 단순 명료한 사실만을 기입해둔 터라 교묘한 말장난 같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결투의 패자는 승자의 수하가 된다. 오직 그것 하나만을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계약서였다.
용호는 허공에 손가락을 놀려 서명을 했다. 붉은 빛의 문자는 허공에서 서로 뭉쳐 빛을 발했고, 이내 둘로 갈라져 각각 용호와 티그리우스에게 날아갔다. 양자의 손등 위에는 복잡한 붉은 문양이 새겨졌다. 계약의 증표였다.
티그리우스가 다시 말했다.
“가타부타 긴 말을 나눌 필요는 없겠지. 바로 결투에 임했으면 한다.”
소심하다는 세간의 평은 역시 잘못 되었다. 지금까지 용호가 마주한 가주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주답다는 인상을 주는 노인이었다.
짐승 같은 살기를 내뿜던 포라스와도 달랐다. 티그리우스는 살기가 아닌 정갈한 투기를 발했다.
‘진짜 귀족이네.’
작게 중얼거린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 남아있던 함정 혹은 모략에 대한 의혹을 깨끗이 지워버렸다.
정정당당한 결투였다. 투기장에서의 싸움과 같았다.
용호는 허공에서 피어난 홍련의 불꽃을 움켜쥐었다. 왼손에 장착한 마장에도 마력을 불어넣어 은색의 금속으로 왼팔을 뒤덮었다.
허투루 상대할 생각 따윈 없었다. 티그리우스는 지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자가 아니었다.
네 개의 뿔을 일시에 개방했다. 가감 없이 마력을 발산했다.
주변 일대가 진감했다. 하늘과 땅에 가득한 마력의 흐름에 새로운 힘이 가해진 결과였다.
소문 이상으로 강력한 용호의 마력이었다. 티그리우스의 얼굴에 절로 긴장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대쪽 같았다. 물러서지 않고 뿔을 개방했다. 티그리우스의 이마에서 뿔 세 개가 동시에 솟아났다.
티그리우스는 용호의 마력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은은하게 마력을 발산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시작하지.”
티그리우스가 말했고, 용호가 수락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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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34장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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