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3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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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마치 사자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얼룩말 같은 눈이었다.
‘아니, 단순한 기억의 왜곡인가.’
스카자하는 무척이나 성격 좋아 보이는 미녀였다. 180 초반대인 용호와 거의 엇비슷할 정도로 키가 컸지만 비율이 워낙 좋다보니 그렇게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욱이 스카자하의 짝이라는 구시온은 키가 2미터가 넘는 거한이었다. 나란히 서면 아마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만 보일 터였다.
스카자하는 편지를 두 번, 세 번 꼼꼼하게 읽었다. 한 손을 뺨에 얹은 채 방실방실 웃는 걸로 보니 편지 내용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연애편지 같지는 않은데.’
다른 누구도 아닌 구시온이었다. 그 투박한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연애 편지를 쓰는 모습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 지도…….’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는 구시온이었으니 말이다.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쓸데없는 망상을 쳐낸 뒤 바닥에 바로 누워 있는 예속 사역마들을 살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카타리나의 꼬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스카자하를 돌아보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맞아?”
“괜찮아, 괜찮아. 정신적으로 좀 충격이 커서 그렇지 몸에는 이상 없어. 딱히 후유증도 없을 거고. 나 그렇게 모진 사람 아니다?”
손사래를 치며 수다스럽게 답한 스카자하는 마침내 편지를 접었다. 그렇게 읽고 또 읽었으면서도 미련이 남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편지지가 의자 손잡이 위에 올라가는 데는 대략 몇 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는 짓만 봐서는 도저히 아몬이나 구시온과 같은 마몬의 12 사역마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처음 시험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강력한 마력을 느끼긴 했지만 워낙 짧은 순간이었기에 제대로 기억에 남지도 않았다.
지금 용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양 옆을 크게 찢어 두 다리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푸른 차이나 드레스와 모양 좋은 목과 어깨를 감싼 새하얀 모피, 예쁘게 틀어 올린 하늘색 머리칼뿐이었다.
“흠흠. 그런 거군. 우리 ‘도련님’이었단 말이군.”
스카자하가 살짝 헛기침을 토했다. 저 호칭을 보니 과연 구시온의 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워. 다시 소개할게. 나는 불사의 마녀 스카자하. 탐욕의 왕 마몬을 보필하는 열두 사역마 가운데 하나이며, 생명의 정원을 관리하는 정원사야.”
해맑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아몬이나 구시온과는 너무나 다른 첫 만남이었기에 용호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생각해보면 이게 정상인 거 아닐까.’
다짜고짜 힘을 발해 압박을 가한 아몬과 구시온이 비정상이었다.
용호는 흔쾌히 스카자하의 손을 마주 잡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마주한 채 스스로를 소개했다.
“마몬 가의 가주인 천용호다.”
스카자하의 손은 차가웠다. 하지만 기분 좋은 시원함이었다.
악수를 나눴음에도 스카자하가 손을 놓지 않았기에 결국 용호가 먼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용호는 어색함을 감추듯 다른 화제를 꺼냈다.
“생명의 정원이라면… 이곳을 가리키는 건가?”
“정확히는 1층 전체를 의미해. 뭐, 같이 온 사역마들은 다 잠들었고 도련님은 가주니까 까놓고 말하자면 탐욕의 미궁의 1층 말이야.”
스카자하가 살짝 윙크했다. 어쩐지 아몬이나 구시온보다는 순순히 답해줄 분위기였기에 용호는 그간 궁금했던 것들 가운데 하나를 입에 담았다.
“탐욕의 미궁은 모두 몇 층으로 되어 있는 거지?”
“응? 그런 기초적인 기록도 실전되었나? 저기, 미안한데 우리 도련님이 몇 대 째 가주야? 혹시 아는 가주 이름 있어? 세월이 얼마나 흐른 거지?”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용호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몇 대지?’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가계도를 볼 때도 그냥 이런이런 가주들이 있었구나-만 할 뿐 자신이 몇 대인지 세어본 적이 없었다.
전대 가주들 이름도 대충대충 넘겨보았기에 명확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용호는 결국 미간을 좁히며 조심스레 답했다.
“카이완은 모르지?”
“몰라.”
카이완도 모르는데 케이언을 알 리는 없었다. 깔끔하게 포기한 용호는 다른 방식으로 답했다.
“탐욕의 왕 마몬이 사라진 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스카자하의 눈동자가 순간이지만 흔들렸다. 시간의 흐름이 애매하다고는 하나 항시 투기장에서 깨어있던 구시온과는 경우가 달랐다. 스카자하는 잠들어 있었다.
“이거, 내 예상보다 더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네.”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표정에 어색함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보여준 미소도 조금은 과장된 것일지 몰랐다.
스카자하는 눈을 한 번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조금 전과 거의 같은 밝은 미소를 머금었다.
“탐욕의 미궁은 총 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그리고 슬슬 눈치 챘겠지만, 우리 마몬의 사역마들이 각기 한 층씩을 담당하고 있지. 마지막 13층은 마몬 님의 것이었고.”
스카자하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잠시 말을 끊은 그녀는 눈짓으로 용호의 팔을 가리켰다.
“거기 아몬은 담당하는 층이 없어. 저 녀석은 좀 특별하니까 말이야.”
용호는 새삼 팔찌를 돌아보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것을 물었다.
“구시온은 몇 층 담당이지?”
“7층. 우리 자기의 투기장은 그곳에 있어. 다른 층들도 특이하지만, 특히 더 특이한 곳이지. 사실상 다른 공간이라 해도 좋아.”
타당한 이야기였다. 투기장으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지날 때마다 늘 느끼던 것이기도 했다.
용호는 잠시 주변을 둘러 보았다. 스카자하의 거처인 작은 신전에는 커다란 창이 많이 뚫려 있었다.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뜻했다.
“아까 정원이라고 했지?”
“그래, 생명의 정원. 탐욕의 미궁은 탐욕의 왕 마몬의 거처일지니, 그 1층은 당연히 정원이어야 하지 않겠어?”
단순히 상징적인 이름이 아니었다. 용호가 반사적으로 물었다.
“설마 함정이 없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탐욕의 왕의 정원이야. 그분의 궁으로 이어지는 정원이라고. 살벌한 이야기는 잠시 미뤄두어도 좋을 공간 아니겠어?”
1층에는 처음부터 함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문자 그대로 정원, 집을 찾아온 이들에게 개방된 공간이었다.
던전 입구를 가장 철저하게 방어하는 것이야말로 던전 수비의 기본이었다. 그런데 마몬의 거처인 탐욕의 미궁은 그러한 기본을 철저할 정도로 무시했다.
‘왕의 정원인가.’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의 거처.
다른 왕들과는 그 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드러내는 행위.
오만했고 방자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자하는 용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팔짱을 끼며 히죽 웃었다.
“좋아, 난 도련님이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제 좀 공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일단 1차 시험 통과한 거 축하해.”
“1차 시험? 그럼 2차도 있단 말인가?”
“그럼, 당연하지. 고작 임사체험 견뎌낸 정도로 이 스카자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웃으며 꺼낸 말이었다. 하지만 말을 마친 그 순간 거대한 마력이 궁 안을 가득 채웠다. 세상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은 지독한 한기를 품은 마력이었다.
그리고 용호는 깨달았다. 궁 안을 가득 채운 것이 아니었다. 마력은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스카자하가 방출한 마력은 오직 용호 한 사람만을 에워쌌다. 용호에게 세상 전체가 무너지는 것 같은 압박감을 선사했다.
이전이라면 질식해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조금의 틈새도 없을 것 같은 마력의 압박 속에서 용호는 흐름을 찾아냈다. 스카자하의 마력에 저항하는 대신 탐욕의 녹염을 일으켜 그 흐름에 순응했다. 스카자하의 마력에 녹염을 섞었다.
자연스럽게 용호를 억압하던 마력이 흩어졌다.
용호의 전신이 땀으로 물들었다. 고작 십여 초에 불과한 작업이었지만 단번에 심력을 절반 이상 소모한 기분이었다.
스카자하는 여전히 용호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지웠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세를 낮추며 예를 표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마몬 가의 가주시여. 위대한 분의 자손이시여.”
구시온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흐름이었다. 용호는 탐욕의 녹염을 거두고 비교적 평온하게 답했다.
“용서한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스카자하는 어째서 구시온이 용호에게 ‘작은 나리’라는 호칭을 사용했는지 이해했다. 다시 허리를 펴고 일어선 그녀가 발랄하게 말했다.
“1차 시험을 통과했으니 생명의 정원은 이제 도련님의 것이야. 이곳에서 무엇을 하든, 어떤 일을 벌이든 모두 도련님의 자유지. 그와 더불어 이 섬, 치유의 성소 역시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어.”
참으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용서 안한다고 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지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용호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포착했는지, 스카자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탐욕의 왕께서 하사하신 나의 궁이야. 이 궁에서라면 나는 내 넘치는 생명력을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어. 죽지만 않았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지 어떤 상처든 회복이 가능해. 심지어는 신체 중 어떤 부위가 절단되었다고 해도 말이야. 참고로 정신적인 피로도 풀 수 있어. 여기 쓰러진 도련님의 사역마들도 깨끗하게 치유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과연 구시온의 말대로였다.
제대로 된 치료사가 없다시피 한 지금의 마몬 가에게는 참으로 큰 도움이 될 장소였다.
“중앙에서 사거리가 있었다. 다른 길로 가도 이런 공간이 나오는 건가? 생명의 정원 같은?”
“본래라면 그래야 할 텐데… 도련님 말대로 수백 년이 지났다면 글쎄, 이곳이야 내 마력 덕분에 어찌어찌 유지가 되었겠지만 다른 곳은 완전히 황폐화되지 않았을까?”
“마력을 공급하면 되겠군.”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마치 투기장에 들어온 것처럼 루시아를 느낄 수 없었다. 아마 현재 루시아가 통제할 수 있는 구역은 1층 홀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복도에 붙어 있던 나머지 방들은?”
“뭐 거의 다 창고 같은 거 아닐까? 난 기본적으로 이 정원 밖으로는 나갈 수 없어서 말이야. 전대 가주들이 어떤 걸 개축해놓았는지까지는 알지 못해.”
어깨를 으쓱인 스카자하는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구시온의 편지를 살짝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런고로 2차 시험이자 마지막 시험을 발표할게.”
스카자하의 손에 들린 편지가 바닥을 가리켰다.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동작이었다.
“우리 자기를 여기에 데려와. 그러면 도련님이 내 새로운 주인님이 될 수 있어. 할 수 있지?”
구시온은 투기장에 묶인 존재였다. 그런 구시온을 투기장에서 빼내 이곳까지 데려올 방법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새로운 투기장의 주인이 된다. 그리하여 투기장의 사역마 모두를 투기장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약간 시간이 걸리겠지만, 할 수 있어.”
용호의 대답에 스카자하가 까르르 웃었다. 정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약간이 되길 바랄게. 정말로.”
웃음기 아래 시름이 숨어 있었다. 수백 년이 지났음을 자각했을 때 스카자하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감정이 다시 한 번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마몬은 정말로 욕심 때문에 12 사역마들을 탐욕의 미궁에 가둬둔 것일까? 그리고 정말 그랬다면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왜 지금도 마몬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보이는 것일까.
아몬도 구시온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스카자하 역시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용호는 스카자하를 마주하는 대신 돌아섰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호수가 있었고, 다시 그 너머에는 옥토가 펼쳐져 있었다. 마계에서는 쉬이 볼 수 없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생명의 정원에서 뭘 할지 정했어?”
스카자하가 등 뒤에서 물었다. 용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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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여기가 일단 ‘생명’의 정원인 건 알지?”
“알다마다.”
생명의 정원의 주인이 되고 이틀이 지났다.
스카자하와의 만남을 끝내자마자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했던 용호는 뿌듯한 얼굴로 ‘농장’을 바라보았다. 새로 사들인 스켈레톤 솔져 열 댓 마리가 느릿느릿 밭을 갈고 있었다.
지금까지 마몬 가는 모든 식재료를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서 구매했다. 사실 이건 마몬 가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남부 공백지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가주들이 던전 상회에게 식량을 의존하고 있었다.
마계의 땅은 척박했다. 곡식을 키운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의 정원은 달랐다. 땅은 비옥했고 햇살은 충분했으며 물은 바로 옆에 있었다.
완전한 자급자족을 이루는 것은 무리였지만 던전 상회에 대한 식량 의존도를 상당히 낮추는 것은 가능했다. 더욱이 그뿐인가. 농사일도 어찌되었든 진화 숙련치를 쌓을 수 있는 작업 가운데 하나였다.
생명의 정원에서 죽음의 상징과도 같은 언데드들이 농사를 짓는 모습에 스카자하는 울상을 지었다. 한 손으로 코를 막으며 칭얼거렸다.
“냄새 나.”
“어차피 하루종일 잠만 자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용호가 없을 때면 스카자하는 다시 의자에 앉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본래 잠이 많아서가 아니라, 생명의 정원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용호는 스카자하의 항의를 무시하듯 키득 웃으며 말했다.
“어찌되었든 빨리 자라게 해줄 거지?”
스카자하는 볼을 부풀렸지만 그렇다고 하지 않겠다는 말을 입에 담진 않았다.
용호는 흐뭇한 얼굴로 다시 농장을 바라보았다. 농장 한 가운데 서서 스켈레톤들을 지휘하는 엘리고스의 얼굴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던 터라 절로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정말이지, 천 년 동안 이런 가주는 처음이야.”
어쩐지 구시온에게도 들었던 것 같은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용호는 스카자하의 궁을 나섰다.
치료사도 얻었고, 예상치 못했던 농장도 얻었지만 마냥 웃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서쪽에서 엠브리오가 오고 있었다. 그를 막을 준비를 갖춰야 했다.
다음 목표는 서부를 막을 방패가 될 란돌트 가의 던전 확보.
용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탐욕의 미궁을 나섰다.
제 33장 - 물병 좌의 스카자하 끝, 제 34장 - 란돌트 가로이어집니다.
< 제 33장 #3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