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99화 (99/227)

< 제 32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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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광이 오로스의 협조 덕분에 자유도시를 장악하는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유도시가 사실상 마몬 가의 손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눈치 챈 무법자 무리 일부가 반발하긴 했지만 찻잔 속의 태풍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법자 무리는 자유도시의 삼 개 파벌 가운데서 가장 힘의 강약에 민감한 자들이었다. 대부분의 무법자들은 새로운 질서에 순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새로운 질서에 반발하고자 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더욱이 그런 소수 가운데서 폭력사태를 일으킬 정도로 무모하고 광기어린 자들은 진실을 눈치 채기도 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모두 오필리아의 솜씨였다.

오필리아와 오로스는 다곤의 수하들 가운데서 가장 이지적이고 협력적인 오크 메이지 유콘을 무법자 무리의 새로운 대장으로 삼았다. 이번에도 반발은 미약했다. 유콘 외에 후보가 될 만한 이가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선별 작업의 결과였다.

무법자 무리를 이끌만한 능력과 카리스마를 갖춘 녀석들은 아가레스와의 싸움에서 전사했거나, 어느 날 사라졌거나, 스스로의 발로 자유도시를 떠났다.

미치광이 오로스는 그 이명과 달리 현명한 자였다.

그는 서쪽에서 폭풍이 밀려오고 있음을 알았다. 타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마몬 가라는 커다란 배에 올라탄 이상 그가 해야 할 일은 분란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밀려오는 폭풍을 이겨낼 준비를 갖추는 것이었다.

오로스가 무척이나 협조적으로 나온 덕분에 오필리아는 처음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시간과 여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정보다 이른 마몬 가 방문으로 이어졌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가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 님을 뵙습니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예를 표한 오필리아는 연이어 엘리고스를 비롯한 예속 사역마들에게도 눈인사를 건넸다. 카타리나는 생긋 마주 웃었고, 스컬은 껄껄 거렸으며, 엘리고스는 이번에도 좋으면서도 싫은- 그야말로 복잡한 심정을 눈빛으로나마 드러냈다.

이제는 제법 커진 마몬 가의 던전이었기에 던전 입구 방에서 마왕의 방까지 걸어가는 것만 해도 꽤나 시간이 걸렸다.

실용적인 성격인 용호였기에 이동하는 와중에도 오필리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이 자유도시의 상황에 관한 것들이었다.

정보 상인인 오필리아는 정보를 다룰 줄 알았다. 포장하거나 왜곡시키는 법도 알았고, 가장 중요한 알맹이만을 추려 전달하는 법도 알았다.

때문에 마왕의 방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자유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다 끝나 있었다. 딱히 더 나눌 이야기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필리아가 준비한 이야기는 자유도시에 관한 것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던전이 필요합니다.”

오필리아는 마왕의 방 옆에 새로 마련한 회의실의 커다란 탁자 위에 남부 공백지의 지도를 펼쳤다. 미리 준비해온 색색의 나무 조각들을 지도 위에 올려 세력을 표시했다.

이전과는 꽤나 달라진 모습이었다.

공백지 남부 자유도시 근방이 휑해진 느낌마저 들었다.

포라스, 에일, 유빙 세 가문의 던전이 사라졌다. 융케라스의 던전인 아비게일 가의 던전은 사실상 그 세력이 절반 이하로 꺾였고, 자유도시는 온전히 마몬 가의 수하에 들어갔다.

오필리아는 공백지 남부의 옆에 자리한 서부를 가리켰다.

“서쪽에서의 싸움은 현재 격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단판 승부가 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늦어도 두 달에서 세 달 뒤면 결판이 날 것 같습니다.”

서쪽의 가주 거의 전부가 참여한 서부 가주 연합을 상대로 늑대의 마왕 엠브리오는 선전하고 있었다. 수십 대 일의 싸움이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린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새로운 던전이 필요하다고 한 것은 서부에서의 싸움이 결판난 뒤를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오필리아는 말을 끊고 숨을 한 번 골랐다. 서부와 남부의 접경지만을 담은 지도를 새로 펼쳤다.

“개활지 투성이인 남부 공백지지만 그래도 길목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전략적 요충지라고 해도 좋지요.”

지도 위에 몇 개인가 되는 곡선이 새로 그려졌다. 서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들 제멋대로 그려진 선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지도 위에 표기된 하나의 점을 지난다는 사실이었다.

“서부 가주 연합이 이기든, 엠브리오가 이기든 남부 공백지에 욕심을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때문에 그들을 막을 요새가 필요합니다.”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된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혹자는 요새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쳐서 다른 곳을 공격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발상이었다.

물론 아주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시와 상황이 갖춰진다면 무척이나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중무장한 요새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것은 칼을 든 상대에게 등을 보이는 것과도 같았다.

“던전은 마왕의 성인 동시에 강력한 요새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이 지점에 방어용 던전을 건설하면 서부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마몬 가는 더 이상 공백지 남부의 망해가는 가문이 아니었다. 공백지 남부를 대표하는 강력한 가문이었다.

용호는 오필리아가 펼쳐놓은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략적 요충지에는 이미 던전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다.

“란돌트 가의 던전을 공략해야겠군.”

“예, 란돌트 가의 가주에게 항복을 받아 수하로 삼거나 공격해 던전을 빼앗아야 합니다. 그가 만약 서부의 세력에게 항복하거나 순순히 길을 내어준다면 자유도시와 마몬 가 모두가 위험해질 겁니다.”

용호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란돌트 가의 가주는 항복할만한 인물인가?”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그간의 행보가 증명하듯이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는 자입니다. 어찌보면 소심하다고까지 할 수 있죠.”

란돌트 가의 가주는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난 여러 상황 속에서 그저 우직히 던전에만 머물렀다. 포라스 가가 융케라스에게 유린당할 때도 침묵했고, 자유도시가 아가레스의 위협에 노출되었을 때도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공략을 해야 한다면… 던전을 다시 요새화 하는 작업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군.”

“예, 바로 보셨습니다. 아직 란돌트 가의 가주가 어찌 행동할지 알 수 없습니다만, 란돌트 가의 던전을 손에 넣으면 마몬 가의 던전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의 공간을 겸하는 성이 아니라… 철저하게 전투만을 대비한 요새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개조 역시 그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요. 그리고-”

오필리아는 숨을 한 번 골랐다. 흥분을 억누르고 차분한 목소리를 토했다.

“란돌트 가의 던전을 손에 넣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요새화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정적으로 큰 피해 없이 공략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충분한 준비를 갖추셔야 합니다.”

타당한 이야기였다.

연달아 에일 가와 유빙 가의 던전을 공략한 용호였지만 두 던전 모두 가주는 물론이고 던전을 지키는 사역마조차도 없다시피 한 상황이었다.

란돌트 가와의 싸움은 용호가 시도하는 첫 던전 공략이라 해도 좋았다.

“이해했어. 역시 유능해.”

용호의 직설적인 칭찬에 오필리아는 겸양 대신 우아한 미소를 보였다. 순수한 소녀 같으면서도 고혹적인 요부 같기도 한 오필리아였다.

“란돌트 가 공략을 위한 준비는 오필리아에게 일임하겠다. 오필리아는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내게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가주 님. 가주 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오필리아가 다시 예를 표했다. 용호는 회의장에 귀퉁이에 앉아있던 리쿰을 돌아보았다.

“리쿰은 오필리아를 도와주도록. 이번 공격에는 오크 부대 역시 참전시킬 생각이니 훈련에도 특히 힘을 기울여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리쿰 역시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오크 부대를 동원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공략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이쪽의 힘이 압도적이면 압도적일수록 공략의 피해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오크들의 성장을 위해서였다.

진화 숙련치를 쌓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목숨을 건 실전이었다. 그 싸움이 격하면 격할수록 더 많은 진화 숙련치를 쌓을 수 있었다.

성장을 위한다며 오크들을 억지로 사지로 몰아넣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한 곳에서 대기만 시킬 수는 없었다.

회의가 파했다.

리쿰이 회의장을 나서자 용호는 조금 더 사적인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주는 걸 깜박했네. 엘리고스에게 주는 선물이야.”

카타리나가 용호의 방에서 급히 가져온 상자 안에는 한 쌍의 수갑이 들어 있었다. 투기장 4층을 돌파하고 얻은 전리품이었다.

엘리고스는 감격한 표정으로 수갑을 받았다. 마몬의 투기장에서 나온, 그것도 용호가 탐욕으로 골라낸 물건답게 평범한 수갑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단단했고, 손가락이나 손목을 움직이는 것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더 이상의 감사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두 눈에 그렁그렁한 눈물이 어리기 시작한 엘리고스였다.

그러고보니 엘리고스에게 이렇게 따로 물건을 챙겨준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좀 더 자주 챙겨줘야지.’

어째 어버이날에 부모님 가슴에 카네이션 달아드린 기분에 빠진 용호였다.

엘리고스가 수갑을 받는 모습을 기쁘게 바라보던 오필리아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용호를 돌아보며 헤실헤실 웃는데, 마치 ‘저는 뭐 없어요?’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방금과는 정반대인 기분이 들었다. 자식 여럿 가진 부모의 마음이 된 용호는 키득 웃으며 브리가다로 만든 발찌를 내밀었다.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오필리아에게 짧고 굵게 설명했다.

“확실히… 쉽지 않네요.”

탐욕이 깃든 마력을 다뤄본 오필리아가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마력 컨트롤에 꽤나 자신이 있는 오필리아도 쉬이 다룰 수 없는 마력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의욕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혁신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 터였다.

“오래, 그리고 많이 쓰면 쓸수록 효율이 좋아진다고 해. 그러니까 한동안은 힘들더라도 노력해줘.”

구시온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브리가다는 칠대죄악의 힘을 증폭시킬 뿐만 아니라 저장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브리가다를 오래 사용하면 가주의 지원 없이도 예속 사역마 혼자 칠대죄악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가주가 직접 지원할 때보다야 못한 힘이었지만 말이다.

오필리아에게 엘리고스와 스컬의 특훈을 부탁한 용호는 카타리나만을 대동한 채 투기장으로 향했다.

용호가 투기장으로 갈 때마다 카타리나를 대동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용호 자신이 패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카이완은 홀로 투기장을 오갔고, 그러다 어느 날 실종되었다.

당시의 마몬 가에서 카이완을 구해낼 정도로 강력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카이완이 어디서 어떻게 실종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면 케이언과 마몬 가의 운명이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엔델리온이 마몬 가를 떠날 가능성은 대폭 낮아졌을 터이니 말이다.

카타리나와 더불어 브리가다 사용법을 연습하며 이동하니 카이완의 휴게실까지의 거리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용호는 탐욕의 힘을 거둔 뒤 숨을 골랐다. 이제는 습관처럼 투기장의 문을 개방했다.

하지만 용호가 투기장에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용호가 문을 여는 와중에도 입술을 달싹이던 카타리나가 약간은 지르듯이 목소리를 토했다.

“가주님!”

“응?”

용호가 돌아섰다.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라 당황하던 카타리나는 이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용호를 마주한 채 숨을 크게 골랐다. 귀를 살짝 늘어트리며 말했다.

“부탁드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용호는 카타리나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마계에 온 이래 거의 항상 붙어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카타리나였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카타리나는 단 한 번도 무언가 자신의 요구를 드러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카타리나가 지금 ‘부탁’이란 말을 입에 담았다. 자연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용호였다.

카타리나는 다시 침을 삼켰다. 늘어트렸던 귀를 바로하고 용호를 똑바로 마주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바람을 드러냈다.

“투기장 1층에 도전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우려했던 요구였다. 용호는 일단 타이르듯 말했다.

“나와는 벌칙이 달라. 더욱이 위험할 수도 있어.”

카이완이 홀로 투기장을 다닌 것은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투기장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구시온이 경고했듯이 투기장의 벌칙은 일반적인 사역마들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카타리나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안일한 마음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주 님. 전 가주 님의 호위 기사입니다.”

강해지고 싶었다. 탐욕의 왕의 후계자답게 성큼성큼 나아가는 주인의 곁을 지키고 싶었다. 조금이라도 그 뒤를 따라잡고 싶었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 사이의 관계였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열 마디 말보다 더 강렬한 소망을, 카타리나의 ‘욕망’을 느꼈다.

이리 된 이상 거절 할 수 없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브리가다를 조금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다음이야.”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타리나가 귀를 파닥이며 기뻐했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그런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투기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돌아섰다. 하지만 그런 용호를 붙잡는 목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주인님.]

[공간의 문의 완성도가 50%에 도달했습니다.]

루시아가 보고했고, 용호는 순간 멈칫했다. 무슨 일이냐는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타리나의 머리를 다시 한 번 쓰다듬은 뒤 투기장으로 향했다.

'공간의 문.'

그간 잊고 있었던 장소.

진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제 32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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