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97화 (97/227)

< 제 32장 #2 >

구시온이 부탁을 해왔다. 더욱이 그 부탁이란 게 카이완과 대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미심쩍다 못해 의심스러운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카이완과 짧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게 방해하던 구시온이 아니던가.

용호의 의심어린 시선을 마주한 구시온은 무안을 감추듯 헛기침을 터트렸다. 용호는 팔짱을 끼고 가만히 그런 구시온을 쳐다보았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번에도 구시온이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아몬에게 대강 들었다. 시간이 정지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흐르지도 않는다지?”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투기장의 사역마들이 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투기장은 마몬이 만든 결계 안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세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시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에 있으면 세월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1년이 1분 같기도 하고, 역으로 1분이 1년 같기도 하지. 나는 이곳에서 적어도 천 년 이상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내 감각은 지난 세월을 천 년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때로는 일 년 같고, 때로는 고작 며칠처럼 느껴지기도 하지. 이 공간은 그러한 곳이다.”

용호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다. 투기장에 들어와 있을 때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 지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저번 방문 때는 한나절 이상을 머물렀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밖에 나와 보니 겨우 두 시간 남짓이 지났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투기장의 특성과 카이완 사이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것일까.

구시온은 입술을 달싹였다. 마지막 망설임을 잘라내고 말했다.

“카이완의 정신은 지금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다.”

구시온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 눈은 마몬의 이야기를 할 때만큼이나 진지했다.

“네 녀석이 처음 왔을 때 말했지? 카이완이 실종된 지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고.”

용호도 그때를 기억했다. 카이완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를 이 공간이지만… 그렇다고 시간의 절대치마저 속일 수는 없는 거다. 투기장 안의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지.”

구시온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카이완의 수십 년 만이 아니었다. 구시온의 목소리에는 마몬 사후 이어진 천 년의 세월이 실려 있었다.

“카이완은 처음부터 상태가 좋지 못했다. 자신이 투기장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지. 그녀는 투기장 밖에 두고 온 것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겨우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마몬 가가 있었다.

충실한 수하들이 있었고,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어리고 병약한 동생이 있었다.

카이완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카이완 이전 세대, 결국 패해 투기장에 복속된 가주들 역시 투기장 밖에 많은 것들을 남겨두어야만 했다.

하지만 용호는 카이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유독 그녀가 더 강한 집착을 품은 이유 역시 알 것만 같았다.

이전 세대의 가주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마몬 가는 건재했고, 제대로 된 후계자들이 존재했다. 카이완과는 다르게 말이다.

카이완은 투기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에 절망한 것이 아닐 터였다.

카이완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마몬 가를, 그런 마몬 가에 홀로 남을 동생을 걱정한 것이 분명했다.

“카이완은 믿는 것으로 자신을 유지했다. 그 믿음은 가히 신앙이라 해도 좋을 거다.”

용호도 알 수 있었다. 카이완을 처음 마주했던 날 그녀가 했던 질문들을 기억했다.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토했다.

“동생이… 투기장에 찾아 올 거라는?”

“하다못해 그 후손이라도.”

용호는 눈을 감았다. 구시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투기장에 방문한 자는 반드시 한 번 이상 도전을 해야 한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면 무리 가운데 하나만 도전을 해도 상관없지. 카이완은 그 점에 기대를 걸었다. 1층 정도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강한 부하가 있다고 했었으니까. 이름이 엔델리온이었던가?”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오필리아의 아버지 엔델리온은 케이언에게 실망했고, 카이완이 없는 마몬 가를 떠났다.

더욱이 케이언은 갑작스런 크레이지 앤트들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다. 투기장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통로마저 잃어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절대치로는 수십 년. 하지만 카이완에게는 그 시간이 마치 수백 년 같았던 모양이다.”

케이언의 기록 속에 묘사된 카이완은 강철과도 같은 여인이었다.

하지만 용호가 투기장에서 마주한 카이완은 깨지기 직전의 유리 잔 같았다.

“그리고 네가 나타났다.”

용호는 눈을 떴다. 구시온이 그런 용호를 직시했다.

“나는 직감했다. 네 녀석이 카이완이 원하는 대답은 아닐 거라고.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그래서 애써 생각하지 않는 대답을 내놓을 가능성조차 있다고.”

“그래서 방해했던 건가?”

구시온이 쓰게 웃었다.

“나는 투기장의 관리자다. 카이완은 투기장의 투사이고, 나리의 후손들 가운데서도 제법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결국 그때의 우격다짐은 구시온 나름의 배려인 셈이었다. 용호는 한숨을 토했다. 생긴 것만큼이나 투박하고 서툰 자였다.

구시온이 계속 말했다.

“카이완은 이제 예전처럼 그저 믿는 것으로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정답을 가진 네가 나타났으니까. 케이언의 소식을 알고 있는, 어쩌면 케이언을 데려올 지도 모를 네가 말이다.”

카이완은 정신이 병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계에 봉착했다.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구시온이 어째서 방해했는지를 진심으로 이해했다.

과연 지금의 카이완에게 동생의 죽음을, 마몬 가의 몰락을 알리는 것이 타당한 일인 것일까?

구시온은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부딪혀 깨질지언정 이제는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카타리나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침묵했다.

“카이완의 동생 케이언은 병사했다.”

용호는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마치 예행연습을 하듯 구시온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털어놓았다.

비극의 파노라마였다. 전대 가주가 자살했다는 부분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한 구시온이 탄식했다.

“최악이군.”

용호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사실을 마주한 카이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구시온이 말했다. 아무렇게나 꺼낸 말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가라앉아있었지만 차분했다.

“카이완의 동생 케이언은 마몬 가의 가주가 되어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았다. 자신의 대에서 다음 대로 마몬 가를 이어갔다.”

평범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나마 이루었다는 것이 중요했다.

구시온은 쓰게 웃었다. 입술을 몇 번인가 달싹이더니 결국 두 손을 늘어트리며 말했다.

“카이완을 구해다오. 그 아이도 이제는 집착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으니.”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구시온은 물러섰고, 짐승 가면의 사내가 다시 용호를 인도했다. 용호는 카타리나에게 따라오지 말 것을 명했다.

구시온의 말대로 시간의 흐름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 겨우 몇 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참으로 길게만 느껴졌다.

짐승 가면의 사내는 투기장의 대기실로 용호를 인도했다. 대기실 의자에는 카이완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잿빛 머리칼 사이에 자리한 두 눈은 표독스러움 대신 불안과 공포, 아주 약간의 희망을 담고 있었다.

카이완이 고개를 들어 용호를 보았다. 입술을 벌렸지만 목소리를 토하지 못했다. 갈망이 너무 커 목소리를 쥐어짜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용호는 카이완을 처음 보았을 때를 떠올렸다. 마력에 남은 그녀의 기억. 작고 초라한 여자아이. 절대로 무너지지 않겠다고 악을 쓰며 울던 소녀.

다시 한 번 침을 삼켰다. 카이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마주했다. 스스로도 놀랄만치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완, 케이언은 죽었어.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에.”

비명과 울부짖음은 없었다.

용호는 카이완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재가 되어 부서질 것 같은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지쳤다는 단어 하나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대기실을 나와 투기장에 돌아온 용호를 마주한 구시온은 씩 웃어보였다. 친한 척이라도 하듯 용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넌 할 만큼 해주었다. 그 다음은 그 아이의 문제이지. 투기장의 관리인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용호는 마몬의 기억 속에서 본 구시온을 떠올렸다. 이런 건들거리는 모습이야말로 구시온이 진심을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카이완은 용호 자신의 품 안에서 울다 지쳐 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의 일은 구시온의 말마따나 카이완의 문제였다.

용호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의자에 털썩 앉았다. 자연스럽게 곁에 앉은 구시온에게 물었다.

“투기장을 정복하면 투기장의 사역마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고 했나?”

“수하로 거둘 수 있다고 했지. 뭐, 네 바람만을 놓고 본다면 결국엔 같은 거겠지만. 그리고…….”

“그리고?”

“아니, 됐다. 이건 좀 감춰두도록 하지. 아무튼 그럼 이제 4층에 도전할 건가?”

용호는 실소했다. 그렇게 싫던 구시온이 어쩐지 모르게 악우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몇 번 내저은 뒤 품을 뒤지며 말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아몬, 네게도 마찬가지야. 이 금속의 정체를 알고 싶어.”

용호의 손에는 왕관 조각이 들려 있었다. 구시온은 그것을 보았고, 아까와는 조금 다른 미소를 지었다. 용호의 손에서 금속을 넘겨받는 대신 용호가 생각도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그게 전부인가?”

“아니, 지금 내 휘하의 대장장이가 예속 사역마들에게 줄 장신구들을 만들고 있다.”

본래는 금속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할 생각이었다. 아몬이야 곁에서 지켜봤지만 구시온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구시온의 반응이 그런 마음을 사그라들게 했다.

“제대로 했군. 역시 나리의 후계자다워. 그렇지 않나? 아몬?”

구시온에게 대답하듯 허공에 홍련의 불길이 피어올랐다. 목소리가 연이어졌다.

[브리가다. 신의 금속. 마신왕의 육의 파편. 혼의 파편에 호응하는 그것]

구시온은 아몬처럼 설명하는 대신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얀 정장 속에 숨겨져 있던 검은 팔찌를 드러냈다.

이전에 봤다면 몰랐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왕관을 이루는 금속과 똑같은 물질이었다.

“나리께 받은 물건이다. 네 녀석이 찾아낸 활용법을 마계에서 최초로 창안하신 분이 바로 나리시다. 아몬을 제외한 우리 모두… 마몬의 12 사역마에게 브리가다로 만든 장신구를 나눠주셨지.”

아련함과 진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용호는 그런 구시온의 감정에 반응할 수 없었다. 마신왕이니 육의 파편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구시온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른 의문이 있어서였다.

구시온은 마몬이 최초로 ‘브리가다’의 활용법을 창안했다고 말했다.

마몬 이전 시대의 마왕들은 브리가다의 특성을 간파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브리가다가 마몬의 시대에 처음 발견이라도 된 것일까?

두 가지 모두 아니었다.

용호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마몬의 12 사역마.

마몬 사후에도 탐욕의 미궁에 예속된 그들.

구시온은 용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았다. 다시 한 번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용호에게 선선히 해답을 선사했다.

“그래, 마몬의 12 사역마. 우리가 바로 마계 최초의 예속 사역마이다. 지금의 예속 사역마 시스템은 나리께서 만드신 오리지널을 다른 마왕들이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

홍련의 불길이 타올랐다. 아몬의 목소리가 용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이제야말로 탐욕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게 된 이여.]

[대대로 마계를 지배한 왕들은 죄악의 힘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알 때가 되었다.]

용호의 손바닥에 자리한 브리가다로부터 빛이 일었다. 아몬과 구시온의 유도에 따라 탐욕을 머금은 녹염이 불타올랐다.

칠대죄악의 진정한 힘이, 그 편린을 드러냈다.

&

“4층의 주인만 불쌍해졌군.”

< 제 32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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