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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96화 (96/227)

< 제 32장 - 공간의 문 >

제 32장 - 공간의 문

“아인켈의 저주 받은 왕관.”

소리 내어 말해본 용호는 경매장에서 받아온 설명서를 내려놓았다. 자연스럽게 시야에 들어온 왕관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설명서에 적힌 내용은 별 거 없었다.

왕관의 이름과 출처, 깃들어 있는 전설 아닌 전설의 개요.

왕관의 첫 번째 주인은 마계 동부 출신이라 전해지는 마왕 아인켈이었다.

그가 만든 이 왕관을 머리맡에 두고 잔 자는 악몽을 꾼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명과 달리 확정적인 저주가 아닌 전설인 이유는, 머리맡에 두고 자도 악몽을 꾸지 않는 자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던전 상회의 설명서에 따르면 사람에 따라 아예 악몽을 꾸지 않을 수도 있으며, 꾸는 사람도 늘 꾸는 것이 아니라 대충 열에 두어 번 꼴로 악몽을 꾼다는 모양이었다.

그야말로 어린애 장난감 같은 물건이었다. 열에 두어 번이라도 그 악몽이 치명적인 악몽이라면 위험할 수 있었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살면서 가장 수치스러웠던 일들을 회상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뭔가 묘하게 마몬의 투기장 저층의 벌칙이 생각나는 왕관이었다.

용호는 조심스럽게 왕관을 들어올렸다. 분명 마력이 느껴지긴 했지만 미약했다. 아무리 봐도 탐욕이 굳이 탐심을 드러낼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하지만 용호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 공학과이긴 했지만 이과생답게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용호가 양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왕관에서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용호는 연이어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켜 보았다. 왕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지만 빛의 문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포기하긴 아직 일렀다. 용호는 탐욕을 일으켰다.

언제나와 같이 용호에게만 보이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갈 곳을 찾아 헤매듯 사방팔방을 향해 뻗어나가던 탐욕은 이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경매장에서와 같았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왕관은 지금 용호의 손안에 있었다. 경매장에서처럼 먼 곳에 자리한 것이 아니었다.

탐욕이 왕관을 향했다. 연기가 왕관뿐만 아니라 용호의 두 손을 휘감았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용호는 본능적으로 마력을 일으켰다. 마치 불꽃처럼 피어난 초록빛 마력을 두 손에 집중시켰다.

탐욕과 마력이 하나가 되었다. 용호의 마력에 탐욕이 깃들었다.

이제까지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조합이었다. 그리고 그 조합의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마력이 증폭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성질이 강화되었다. 탐욕이 용호의 마력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렸다.

용호는 거친 숨을 토했다. 마력의 흐름이 너무 빨랐다. 더욱이 거칠기까지 했다. 마치 야생마의 폭주 같았다.

며칠 전의 용호였다면 제어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경매장에서의 경험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용호가 야생마에게 고삐를 채웠다. 폭주를 질주로 바꾸어놓았다.

그리고 본능이 다음을 지시했다. 용호는 자신의 두 손에 어린 무지막지한 마력을 왕관에 주입하였다.

왕관은 폭발하지 않았다. 감당하지 못할 마력에 녹아내리지도 않았다.

왕관이 호응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용호의 마력을 받아들였다.

저장. 증폭. 호응.

용호는 본질을 깨달았다. 지금의 반응은 왕관에 어떤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가 아니었다. 왕관을 구성하는 금속 그 자체의 힘이었다.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탐욕은 평소처럼 갈망한 것이 아니었다. 왕관을 구성하는 금속과 ‘공명’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것일까.

대체 이 금속은 무엇이기에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탐욕과 공명하는 것일까.

당장에 해결할 수 없는 의문은 치워두었다. 용호는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발상에 탄성을 토했다. 소리쳐 불렀다.

“카타리나!”

“가…주님?”

루시아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온 카타리나는 두 조각이 난 왕관의 모습에 눈을 깜박였다.

왕관을 자른 것은 용호였다. 초고온의 열을 발하던 아몬을 다시 팔찌로 되돌린 용호는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조각 가운데 하나를 카타리나에게 내밀었다.

“들고 있어.”

예속 사역마에게 있어 가주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카타리나는 얌전이 왕관 조각을 들고 용호를 마주하였다.

용호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카타리나와 적당한 거리를 벌린 뒤 다시 한 번 명령했다.

“마력을 일으켜 봐.”

카타리나는 입술을 한 번 움츠렸지만 이내 용호의 말대로 하였다. 검은 마력을 일으켰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마력을 느꼈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 사이의 연결을 실감하며 자신 역시 마력을 일으켰다.

평범한 마력이 아니었다. 탐욕과 하나 된 마력이 용호가 들고 있던 왕관 조각을 뒤덮었다. 그리고 이내 용호가 기대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카타리나가 들고 있던 왕관 조각이 반응했다. 용호가 일으킨 마력과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호의 손에 들린 왕관 조각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역시 기대한 대로였다.

카타리나의 마력이 증폭되었다. 검은 마력에 탐욕의 힘이 일부나마 깃들었다.

갑작스런 마력의 증폭에 카타리나가 당황했다. 하지만 카타리나가 놀란 것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증폭된 마력에서 용호가 느껴졌다.

카타리나는 집중했다. 미쳐 날뛰기 시작한 마력을 제어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녀 역시 경매장을 경험했기에 지금의 작업을 해낼 수 있었다.

그것은 흡사 잘 벼린 칼날과도 같았다. 카타리나의 검은 마력 또한 그 색과 속성이 더욱 강해졌다.

용호는 이해했다. 본래 하나의 왕관이었기에 두 조각 사이의 연결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연결된 것은 용호 자신과 카타리나였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였기에, 용호 자신이 카타리나와의 연결을 의식했기에 지금의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카타리나에게는 죄악의 힘이 없었다.

하지만 용호는 왕관 조각의 힘을 빌려 자신의 죄악을 증폭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증폭시킨 죄악의 힘을 카타리나에게 전송했고, 카타리나가 들고 있던 왕관 조각은 죄악의 힘에 반응해 용호가 원한 반응을 일으켰다. 저장과 증폭, 호응을 말이다!

여전히 금속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금속의 사용법은 간파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보다 효율적인 사용법을 찾는 것이었다.

“카타리나.”

“예, 가주님.”

카타리나는 이제야 설명을 해 주려나 하는 기대에 용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용호는 신이 잔뜩 난 얼굴로 생각도 못한 말을 꺼냈다.

“버그림에게 가자.”

카타리나는 이번에도 질문하지 못했다. 눈 깜박할 사이에 방을 빠져나간 용호의 뒤를 쫓기 바빴다.

&

마몬 가의 던전에서 희번덕거리는 눈을 한 것은 용호만이 아니었다.

마력을 일부나마 회복한 버그림은 장인의 광기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미친 듯이 마법 장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은 마력이 너무 약했다. 제대로 마력을 소화할 수 있는 재료도 턱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래도 버그림은 마력을 사용했다. 식당에 있는 식기들을 죄다 새로 만들기 시작했다. 더 없이 단단한 스푼과 포크들이 양산되었다. 식칼과 국자는 당장에 전투용 무기로 써도 될 정도였다.

열과 성을 다해 용호 전용인 쇠 젓가락을 만들던 버그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런 방문이었지만 조금도 꺼려하지 않고 용호를 맞이했다. 버그림에게 있어 용호는 단순한 주군이 아닌 생명의 은인-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용호는 버그림에게 왕관 조각들을 내밀며 물었다.

“혹시 이걸 녹여서 반지나 팔찌 같은 걸 만들 수 있나?”

용호의 두 눈이 기대로 반짝였다. 저런 눈을 마주한 이상 못해도 할 수 있다고 해야 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버그림은 장신구를 만드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인 버그림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일단 왕관 조각을 살펴보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용호가 얼른 버그림에게 왕관 조각을 넘겨주었다. 버그림은 왕관 조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려 보았다. 귀에 대고 소리를 듣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눈을 감고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드워프들 가운데 뛰어난 일부는 금속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금속 자체와 교감한다고 할까요?]

[버그림은 아마 왕관 조각을 이루는 금속의 강도와 연성 같은 것을 파악하는 중일 겁니다.]

루시아가 용호에게 설명했다. 용호는 버그림이 뛰어난 드워프란 사실에 일단 만족했고, 연이어 그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버그림은 용호에게 한 번 웃어 보인 뒤 작업장 한 구석에 놓여 있던 작은 칠판과 분필을 꺼내들었다. 서툰 마계어로 용호에게 질문했다.

《무엇을 만들까요?》

《종류와 수량을 정해주십시오.》

용호는 일단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카타리나는 난처함을 드러내듯 귀를 늘어트린 채 용호의 시선을 받았다.

카타리나의 귀, 목, 손목 등을 연달아 돌아본 용호는 이내 결정했다. 머릿속으로 나머지 예속 사역마들을 떠올린 뒤 버그림에게 말했다.

“남성용 반지와 여성용 반지 각각 하나. 남성용 팔찌와 여성용 발찌도 각각 하나.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걸이를 하나 만들어줘. 이건 남자가 찰 거야. 혹시라도 금속이 남으면 그건 일단 그냥 보관해두고.”

반지는 용호 자신과 카타리나를 위한 것이었고, 팔찌와 발찌는 엘리고스와 오필리아 것이었다. 마지막 목걸이는 스컬의 몫이었다.

용호의 주문을 들은 버그림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칠판에 새로운 질문을 적었다.

《혹시 예식용입니까?》

《연정의 증표라든가…….》

버그림이 슬쩍 용호와 카타리나를 번갈아 보았고, 용호는 급히 목소리를 토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예속 사역마들에게 하나씩 내릴 하사품이다. 반지는 내가 낄 거고, 나머지는 각각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오필리아와 스컬의 몫이다. 누군지는 다 알고 있지?”

거의 쏟아내다시피 말했다.

용호는 카타리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어쩐지 어젯밤 경매장을 다녀온 직후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버그림에게 작게 말했다.

“그래도 이왕 만드는 거… 예쁘게 만들어주면 좋고.”

《반지와 팔찌 각각 한 쌍으로 만들겠습니다.》

버그림이 엘리고스마냥 푸근하게 웃으며 답했고, 용호도 이번에는 반대하지 못했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파닥파닥?]

루시아가 아주 작게 말했고 용호는 손부채질로 괜히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등 뒤에서 들리는 파닥거리는 소리도 애써 무시하며 버그림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그 금속에 대해 아는 것은 없나?”

《처음 보는 물건입니다.》

《기본적인 성질은 은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버그림이 뛰어난 대장장이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는 마계가 아닌 이계에서 태어난 자였다.

마계의 금속들까지 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용호가 다시 물었다.

“왕관을 전부 쓰지 않을 거면 일부를 잘라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전체의 3/4 정도 양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애당초 별로 크지 않은 왕관이었지만 그래도 팔찌나 반지에 비해서는 훨씬 큰 물건이었다.

버그림은 왕관 조각 가운데 하나를 다시 두 동강 낸 뒤 용호에게 넘겨주었다.

“좋아, 그럼 바로 작업에 착수해줘. 다그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언제까지면 될까?”

《내일까지 끝내겠습니다.》

시원시원한 버그림의 대답이었다. 용호는 버그림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왕관 조각을 품에 챙겨 넣었다. 이제는 용호 자신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평온을 되찾은 카타리나와 더불어 작업장을 나섰다.

“투기장으로 간다.”

본래는 지하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탐색하는 것이 오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수정했다. 일단은 투기장이 더 급했다.

버그림도 알아보지 못한 금속이었지만 아몬이나 구시온이라면 혹시 몰랐다. 아니, 다른 무엇도 아닌 탐욕의 힘에 반응하는 금속인만큼 두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 말고도.’

슬슬 다시 투기장에 도전할 때이기도 했다. 아가레스의 정수를 취한 덕에 마력뿐만 아니라 육체능력까지 이번보다 훨씬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발견한 힘- 탐욕이 깃든 마력 역시 시험해보고 싶었다.

용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투기장으로 향했다.

&

짐승 가면의 사내가 길을 인도한 것까지는 언제나와 같았다.

하지만 막상 투기장에 도착하고 나니 평소와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구시온?”

지금껏 몇 번 안 되는 방문이기는 했지만 늘 일찌감치 나와 있던 구시온이었다. 그는 기다리지 않은 ‘척’이라도 하듯 늘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그가 돌아서는 것은 늘 용호가 먼저 인사든 뭐든 아는 체를 한 이후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등이 아닌 정면을 보였다. 용호가 복도를 지나자마자 바로 아는 체를 해왔다.

더욱이 이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게 할 말이… 아니, 부탁이 있다.”

생각지도 못한 단어의 나열에 용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카타리나도 놀란 듯 커다란 눈을 껌벅였다.

구시온은 뺨을 긁적였다. 괜히 딴청을 하다 약간은 지르듯이 말했다.

“카이완과 이야기를 해다오. 그게 내 부탁이다.”

용호의 표정이 더욱 미묘하게 변했다.

< 제 32장 - 공간의 문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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