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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94화 (94/227)
  • < 제 31장 - 던전 상회 경매장 >

    제 31장 - 던전 상회 경매장

    마계의 밤하늘은 낮과는 다른 의미로 압도적이었다.

    현란한 색의 조화는 없었다.

    검정에 가까운 무거운 파랑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둠은 차갑고 무거웠다. 하늘에서 땅으로 녹아내려 지평선을 구분 지을 수 없었다.

    별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하얀 달이 빛을 발했다.

    어둠 속에 자리하기에 그것은 더욱 밝았다.

    하지만 결코 어둠을 밀어내지 않았다. 달빛은 어둠과 조화를 이루었고, 어둠의 차가움 속에서 따스함을 전하였다.

    그리고 그런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용호는 잠깐이지만 ‘숨이 멎는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를 이해했다.

    아무 것도 꾸미지 않은 자연체 상태일 때도 바라보는 이의 정신을 어지럽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시트리였다. 그런 시트리가 작정하고 스스로의 아름다움을 가꾸고 나타났다. 더욱이 환상적인 달빛 아래 서 있었다.

    카타리나도 용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같은 여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시트리는 그런 두 사람을 마주하며 온화하게 웃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새하얀 드레스는 달의 여신을 연상시켰다.

    시간이 얼어붙었다.

    시트리의 아름다움에는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정지한 시간 속에서도 평온을 유지하는 자가 있었다. 시트리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아몬.’

    시트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몬은 그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의 본체는 용호의 오른팔에 팔찌 형태로 자리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마몬의 12 사역마들은 시트리에게 저마다 다른 감정을 품었다.

    밤을 베는 엘룬은 애증이었다.

    괴력의 구시온은 원망이었다.

    그리고 홍련의 마창 아몬의 감정은 동정이었다. 그것은 애틋함이라 해도 좋았고, 안타까움이라 해도 좋았다.

    시트리의 미소에 아주 약간이지만 균열이 생겼다.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둔 감정이 일부나마 드러났다.

    하지만 그 감정의 조각은 너무나 작았다. 시트리의 아름다움은 달빛이 되어 반딧불이와 같은 감정의 편린을 가렸다.

    “사랑하는 고객님, 약속 시간이랍니다.”

    목소리는 온화했다. 붉은 머리칼을 틀어 올렸기에 새하얀 목에서부터 시작된 곡선이 여실히 드러났다.

    용호는 심호흡을 했다. 잔뜩 얼어 있는 카타리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고, 깜짝 놀라 움찔하는 카타리나에게 웃어보였다.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며 시트리에게 향했다.

    시트리는 그런 용호와 카타리나를 정겨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자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고, 연이어 언제나처럼 손을 놀렸다. 허공에서 가면 두 개를 꺼내 용호와 카타리나에게 내밀었다.

    “이번 경매는 익명 경매랍니다. 지금 당장 쓰실 필요는 없지만, 회장에 들어가실 때는 꼭 쓰셔야 한답니다.”

    용호의 가면은 오페라의 유령에 나오는 가면처럼 아무런 모양도 무늬도 없는 그저 하얗기만 한 가면이었다. 코 아래 부분이 깨끗이 잘려나간 터라 입과 턱이 노출되는 형태였다.

    카타리나가 받은 가면 역시 코 아래 부분이 노출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마치 나비를 형상화시킨 것 같은 다소 화려한 가면이었다. 검고 큰 날개 안에 무지갯빛이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시트리가 용호에게 설명하는 와중에도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온통 하얀 옷차림인 던전 상회 택배 기사들이 엘리고스에게 수하물들을 전달했다.

    가면을 잠시 내려다보던 용호는 다시 시트리를 돌아보았다. 시트리의 가면이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용호는 경매가 어디에서 열리는지, 거기까지 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하다못해 어떤 방식으로 회장까지 이동할 지도 알지 못했다. 구시온을 통해 시트리가 ‘마몬의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아무리 그간 관계가 좋았다 할지라도 결코 동행에 응하지 않았을 터였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 같은 건가?’

    세상에 저런 할머니가 어디 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시트리이긴 했지만, 굳이 따진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용호는 저도 모르게 키득 웃었고, 시트리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고객님?”

    “아니오, 아무 것도.”

    용호는 다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기억했다. 시트리는 마몬 가의 후견인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전전대 가주와 전대 가주를 방치했고, 3대 전 가주인 카이완에게도 결정적인 도움 같은 것은 주지 않았다.

    용호 자신에게도 그러했다.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살짝살짝 간접적인 도움을 줄 뿐이었다. 물론 시트리에게 받았던 마력 회복 물약 같은 것들을 생각한다면 그 도움이 결코 작다 할 수 없었지만, 딱 거기까지인 도움이었다.

    포라스와 싸웠을 때도, 아가레스와 싸웠을 때도 시트리는 방관자였다.

    “좋아요, 아무튼 슬슬 출발하도록 하죠. 갈 길이 멀답니다.”

    똑 부러지게 말한 시트리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용호와 시선을 마주한 채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쳤다.

    가장 먼저 이변을 알아차린 카타리나가 하늘을 보며 입을 벌렸다. 용호 역시 가볍게 탄성을 토했다.

    달빛을 타고 밤하늘에서부터 마차가 내려왔다.

    지붕 없이 하얀 마차는 무척 아름다웠지만 용호도, 카타리나도 마차가 아닌 다른 것을 보았다.

    밤하늘을 달리는 수십 마리의 고양이들.

    시트리가 준비한 것은 고양이 마차였다.

    &

    북유럽 신화 속의 마법과 미의 여신인 프레이야는 오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양이 마차를 타고 밤하늘을 누볐다고 한다. 최후의 전쟁인 라그나뢰크를 위한 신의 전사들- 저 에인헤야르들을 양산하기 위한 분란의 씨앗을 세상 곳곳에 퍼트리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고양이 마차가 밤하늘을 질주했다.

    살라미를 타고서 밤하늘을 누빈 적은 없었기에 용호는 완전히 새로운 것들을 경험했다.

    달빛과 별빛.

    파란 어둠 속에 숨어있는 마력의 흐름.

    바람이 뺨을 때렸다. 고양이 마차는 살라미보다도 빨랐다. 별빛은 점에서 선이 되었고, 이내 어둠과 뒤섞여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물리적인 빠름이 아니었다.

    고양이 마차는 공간을 도약했다. 멀고 먼 거리를 마법의 힘을 빌려 단숨에 뛰어넘었다.

    별빛이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을 때 고양이 마차는 추락에 가까운 활강을 시작했다. 마치 롤러코스터에 탄 것 같은 스릴이 전신을 옥죄었다.

    다행히 짧았다. 지상에 당도하자 시트리는 한 발 먼저 고양이 마차에서 내렸다. 용호와 카타리나를 인도했다.

    세 사람이 내리자마자 하늘로 돌아간 고양이 마차를 돌아볼 새도 없이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변했다. 몇 걸음 내딛지 않은 것 같았는데 세 사람이 서 있던 장소는 하얀 사막에서 아늑한 느낌의 나무 복도로 변해 있었다.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해 있는 기분이었다.

    시트리는 다시 몇 걸음을 앞서 나갔다. 복도 끝에 자리한 문 앞에서 돌아섰고, 용호를 마주하며 자신 몫의 가면을 썼다. 용호와 카타리나의 것과는 달리 얼굴 전체를 가리는 암사자 모양의 가면이었다.

    “이 문 너머부터는 던전 상회의 다섯 이사 가운데 하나인 ‘최속의 날개’ 사마엘이 지배하는 던전 상회 경매장입니다. 가면을 착용해 주세요.”

    정신없는 가운데 용호가 가면을 착용했다. 익명성의 상징인 가면을 쓴 덕분인지 약간이나마 마음이 차분해졌다.

    “사랑하는 고객님, 제가 큰물을 경험하게 해드린다고 했었죠?”

    암사자 가면이 시트리의 표정을 가렸다. 그녀가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부디, 압도되지 마시기를.”

    장난기 없는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용호는 비로소 깨달았다.

    시트리가 말했던 큰물의 의미를.

    &

    그곳은 거인들의 연회장이었다.

    문이 열린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견딜 수 없는 무거움이 전신을 옥죄었다.

    반사적으로 기억을 떠올렸다.

    아몬을 처음 마주했을 때.

    아몬과 구시온이 서로 대립했을 때.

    달랐다. 그때의 압박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소용돌이였다. 수십 개의 거대한 마력들이 서로 충돌하고 뒤엉켜 복잡한 마력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하나가 아닌 여럿.

    질식할 것만 같은 빽빽함.

    아몬과 같은 절대성은 없었다.

    하지만 무심했다. 잔뜩 날이 선 칼날들이 아무렇게나 엉켜있는 것 같았다.

    용호는 마력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그리하여 휘몰아치는 마력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시트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지 말라 말했다.

    어째서. 왜.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시트리가 그저 자연스럽게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 너머에 자리한 수많은 이들 또한 그러했다.

    그들은 구태여 마력을 집중하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발산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발산된 마력들이 한데 엉켜 지금의 무거움을 만들었다.

    오필리아는 말했다.

    뿔 네 개는 남부 공백지 내에서라면 열 중 하나에 드는 강함이라고.

    하지만 마계 전체를 논한다면 열에 넷 혹은 셋에 드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남부 공백지에 존재하는 마인의 숫자와 마계 전체에 존재하는 마인의 숫자를 비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저 너머에 자리한 존재들은 어떠한 자들일까.

    그들의 뿔은 몇 개일까. 그들의 전력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용호는 억지로 마력을 일으키지 않았다. 무거움을 받아들였다. 견뎌내며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물론 아직은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시트리가 용호 자신을 경매장에 데려온 진짜 이유.

    이것이었다.

    하늘 밖의 하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앞으로 용호가 나아가야할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려주기 위해.

    이번 경매의 의의는 참석 그 자체에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겨우 주변을 돌아볼 여유를 되찾은 용호는 카타리나의 거친 호흡소리를 들었다. 뿔이 네 개인 용호에게조차 힘겨운 무거움이었다. 뿔이 세 개인 카타리나가 느끼는 무거움은 용호의 몇 배에 달할 터였다.

    카타리나는 그 압박감을 견뎌냈다. 구시온 덕분이었다. 투기장에서 구시온의 위압감을 맛보지 않았다면 진즉에 뻗어버렸을 터였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손을 붙잡았다. 힘겨운 가운데도 마력을 나눠주었다. 효과가 있었는지 카타리나의 숨결이 한결 평온해졌다.

    시트리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 너머의 존재들로부터 이쪽을 가리기 위해 펼쳤던 마법의 장막을 거두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자리로 안내해 드릴게요.”

    시트리는 아몬이 그러했던 것처럼 용호와 카타리나를 보호하지 않았다. 그대로 돌아서서 앞장섰고, 용호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카타리나와 함께 나아갔다.

    문 너머의 공간은 무척이나 화려했다.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연회장을 연상시켰다.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는 자들고 있었고, 한적한 곳에 서서 주변을 관찰하는 이들도 있었다.

    시트리는 천천히 걸었다. 때문에 용호는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가면이 참가자들의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역시 마계였다. 피부와 체형, 결코 범상치 않은 체구 등 상대를 특정 지을 만한 요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애당초 정보가 부족한 용호였다. 억지로 단서들을 쥐어짜는 대신 그저 참가자들의 모습과 그들이 자연스럽게 내뿜는 마력을 느꼈다.

    문을 나서고 몇 분이 지나서였을까.

    용호는 연회장을 가득 채운 마력들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가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마력을 철저하게 컨트롤했다.

    마력의 색과 속성을 감추는 것은 기본중의 기본이었다. 그저 숨 쉬듯 내뿜고 있다고 생각한 마력들조차도 적절한 기 싸움을 위해 세밀하게 조율된 상태였다.

    ‘아니, 그것도 아니야,’

    그런 조율조차도 거의 무의식 단계에서 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력을 컨트롤하는 수준이 지금까지 마주한 가주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그것도 참석자 전원이 말이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이상의 충격이 용호의 등줄기를 꿰뚫었다. 용호는 숨을 가다듬었다. 가쁜 숨을 내쉬는 대신 마력을 컨트롤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당장 다른 참석자들처럼 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그래도 시도하였다.

    마력의 색과 속성을 지웠다. 그러면서도 카타리나의 마력과 호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폭풍우 속을 맨몸으로 걷는 기분이 들었다. 카타리나와 마주잡은 손에서 절로 땀이 새어나왔다.

    시간이 무척이나 느리게 흘렀다.

    순간을 수십, 수백 개로 쪼개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걸음을 내딛었을 때, 용호는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충동이었다. 탐욕의 인도였지만 평소와는 달랐다.

    시선 끝에 덩치 큰 사내가 들어왔다. 무시무시한 귀신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 남자 또한 용호를 보았다. 고개를 돌린 순간 시선이 교차했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정지했다.

    남자와의 거리는 제법 멀었지만 그런 것은 무의미했다.

    어째서일까. 탐욕은 저 남자에게서 대체 무엇을 느낀 것일까.

    “고객님? 이쪽이에요.”

    시트리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시간을 깨트렸다. 그녀는 남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는 시트리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남자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가주님.”

    카타리나가 말했고,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의 손을 다시 한 번 꽉 쥐었다. 가면 아래 드러난 입술로나마 웃어 보인 뒤 시트리의 인도를 따라 본 경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남자의 시선이 여전히 느껴졌다.

    하지만 용호는 돌아보지 않았다.

    &

    “주인님.”

    앵무새 가면을 쓴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귀신 가면의 남자를 불렀다.

    귀신 가면의 남자는 여자의 말에 바로 응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는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난 검은 머리칼의 애송이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경매장의 공기를 힘겨워할 정도로 미숙한 녀석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신경이 쓰였다. 단순한 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주인님?”

    “아무 것도 아니다. 가도록 하지.”

    앵무새 가면의 여자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주인을 보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부드러운 손짓으로 주인을 인도했다.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왕 가운데 하나.

    식탐의 왕은 발걸음을 내딛었다.

    &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의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첫 매물은 이계의 용사 아스란입니다.”

    < 제 31장 - 던전 상회 경매장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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