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0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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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고객님, 오늘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하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자 예상대로 시트리의 환한 미소가 용호를 반겨주었다.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지만 정말 아찔할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카타리나나 오필리아도 미녀였지만 느낌이 달랐다. 두 사람이 그래도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드는 반면, 시트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요정이나 여신과 같은 어떤 신비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거장이 완벽한 미를 추구하며 만들어낸 명화나 조각상.
하지만 거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과 표정이 더해졌다.
용호는 잠시 그런 시트리를 빤히 바라보았고, 시트리는 평소와는 다소 다른 용호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오랜만이네요.”
용호는 마찬가지로 웃으며 답했다. 시트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지만 잠깐 뿐이었다.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손가락을 놀렸다. 용호를 위한 의자가 바닥에서 솟구쳐 올랐다.
용호와 시트리 사이에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에는 충분한 거리였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손이 닿을 거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시트리의 전신을 볼 수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온통 새하얀 세상을 함께 눈동자에 담았다.
구시온 때문이었다.
구시온과 나눈 대화가 평소와는 다른 시각을 만들어냈다.
용호는 조금은 의식적으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시트리에 대해 말하던 구시온의 표정과 목소리가 새삼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녀가… 아니, 그년이 조금만 더 제대로 해주었다면… 그랬다면 나리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
용호는 구시온의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분노와 슬픔, 애달픔과 증오가 범벅이 되어 지독한 감정을 낳았다.
탐욕의 왕 마몬은 왜 죽은 것일까.
그는 어째서 갑자기 사라졌던 것일까.
‘아직은 일러. 아예 알게 될 날이 오지 않는 것이 제일이겠고.’
구시온은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시트리에 대해서는 몇 마디 말을 더하긴 했지만, 마몬의 죽음에 대해서는 함구하였다.
구시온은 시트리가 마몬의 여인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은 존재.
마몬의 진정한 사랑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두 사람 가운데 하나.
다른 하나는 물론 밤을 베는 엘룬이었다.
‘아마 네게 해코지를 하지는 않을 거다. 낯간지러운 소리지만… 넌 나리의 후계자니까. 천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나타난 진정한 후계자말이다.’
구시온의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
회상에서 깨어난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시트리의 얼굴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고객님? 혹시 어디 아프신가요?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시트리는 자연스럽게 손을 들어 용호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용호는 숨을 골랐다. 애써 표정을 정돈한 뒤 말했다.
“약간 피곤해서요. 그보다 이번에 구매하고자 하는 물품들의 목록입니다.”
시트리는 약간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순순히 용호가 허공에 형성한 빛의 문서를 받아들었다. 다시 용호와의 거리를 무릎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거리에서 차 한 잔을 나눌 거리로 바꾼 뒤 빛의 문서를 검토하였다.
“흥미롭군요.”
구매 목록에는 각종 사역마들과 자재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시트리가 흥미를 느낀 것은 ‘공간의 문’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이었다.
“공간의 문을 설치하시려는 건가요?”
“예, 카이완이 만들다 만 공간의 문이 있더군요. 그걸 완성시킬 생각입니다.”
“흐음.”
시트리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용호는 그런 시트리를 보며 생각했다.
카이완은 어째서 공간의 문을 만들려고 했을까.
공간의 문을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마력과 상당한 값어치의 자재들이 필요했다. 용호 자신이야 인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으니 공간의 문을 원했지만 과연 카이완에게는 어떤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그런데 고객님.”
시트리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공간의 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고 계신가요?”
“네?”
저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시트리는 바로 답하는 대신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용호가 알고 있는 공간의 문은 이계로의 연결로였다.
용호의 고향인 인계로 돌아가기 위한 통로.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불완전하게나마 열었던 공간의 문 마법을 자유로이 활성화 할 수 있는 장치.
“그런 얼굴 하지 마세요. 아마 이 공간의 문을 완공하시면 인계로 통하는 문을 여실 수 있으실 테니까요. 다만 그 과정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조금 더 험난하겠지만요.”
시트리는 손을 놀렸다. 그러자 빛의 문서에 들어있던 항목 중 하나가 확대되어 허공에 펼쳐졌다.
“이 재료는 현재 남부 지부에는 재고가 없어요. 제 개인 창고에 여분이 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거긴 상회 창고가 아니라 제 개인 창고라서요.”
용호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설마하니 시트리가 말한 험난함이 재료 수급을 이야기한 것일까? 아니었다. 시트리가 말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한 말.
용호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제게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시트리가 환하게 웃었다. 다시 용호와의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이야기를 해주세요. 자유도시에서 겪은 일들을. 듣자하니 아가레스를 물리치셨다죠?”
시트리는 용호 자신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 눈빛에는 언제나 진한 호의가 묻어났다.
구시온의 말처럼 용호 자신이 마몬의 후계자이기 때문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나리를 사랑했던 것만은 분명해.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엘룬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구시온의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린 용호는 눈을 한 차례 감았다 떴다. 최대한 담백하게 자유도시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시트리는 좋은 청자였다. 그녀는 반응이 필요할 때면 늘 좋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화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무척이나 뛰어났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용호는 숨을 길게 토했다. 단지 이야기를 했을 뿐임에도 무척이나 지친 기분이 들었다.
시트리는 그런 용호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감상을 토하는 대신 의자에 몸을 깊이 묻었고,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소녀처럼 웃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 것 같군요. 제가 저번에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나요? 큰물을 경험해보셔야겠다고 했던 것?”
잊을 리가 없었다.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장 말씀이군요.”
“네, 경매장. 힘 센 사람들이 여럿 모이는 장소죠. 마침 이틀 뒤에 경매가 있으니 타이밍도 아주 좋아요. 어때요? 참가하실 건가요?”
시트리의 아름다움은 늘 용호를 긴장시켰고, 그렇기에 용호는 섣불리 수락하지 않았다.
약간은 모양이 빠지는 일이었지만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들을 물었다.
“참가비 같은 것이 있나요? 미리 경매장에 맡겨놔야 할 금액이 정해져 있다거나.”
언젠가 보았던 소설에 나온 고급 경매장의 이야기였다. 시트리는 까르르 웃었다.
“있지만 모두 면제해 드릴게요. 이건 제가 먼저 약속드렸던 일이니까요.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수락하셨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시트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호의 무릎 앞에 자세를 낮추었다. 용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시여, 제게 손등에 입술을 맞출 영광을 주시겠어요?”
어째 남녀가 바뀐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용호는 이내 손등을 내밀었다. 시트리는 용호의 손끝을 부드럽게 쥔 뒤 손등에 입술을 맞추었다. 눈이 녹는 것 같은 부드러움 뒤에 아찔한 뜨거움이 이어졌다.
“입장권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답니다. 초행이시니 제가 에스코트 할게요.”
용호의 손등 위에 연한 붉은 빛을 발하는 문장이 새겨졌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던전 상회의 상징이었다.
“동행은 한 명까지 가능하답니다. 이틀 뒤 밤에 모시러 갈 터이니 그때 다시 뵙도록 하죠. 주문하신 물건들도 함께 배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시트리는 다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온통 새하얀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가상공간과의 연결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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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아와 약속했던 대로 용호는 휴식을 가졌다.
딱 하루- 사실상 한나절뿐이었지만 말이다.
다음날 아침이 밝자마자 용호는 그간 미뤄두었던 작업들에 착수했다.
하루 종일 리쿰을 필두로 한 오크들에게 시달린 때문인지, 아니면 특유의 저혈압 때문인지 비몽사몽 선채로 졸기 시작한 카타리나를 대동한 채 사역마들의 면담을 시작한 것이었다.
면담의 목적은 사역마들 개개인의 고충을 듣고 근무 상황을 개선한다는 실로 건설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주된 목적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역마들의 진화였다.
용호에게 소중한 것은 스컬을 비롯한 전투 사역마들만이 아니었다. 리쿰과 오크, 트리엔트처럼 던전을 지키는 사역마들 역시 소중했다. 고블린 레인저와 버그림이 없다면 마몬 가의 던전은 제대로 운용되지 못할 터였다.
용호가 실전을 통해 진화 숙련치를 획득할 동안 던전에 남은 사역마들 역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화 숙련치를 모았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에게 사역마 훈련장에서의 훈련은 이제 일상이라 해도 좋았다.
마몬 가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고참이라 할 수 있을 고블린 레인저들은 이번에도 저마다의 강점을 살리는 쪽으로 진화를 하였다.
존은 힘, 론은 체력, 욘은 민첩, 준은 지력.
진화의 권능에 외모를 일정 부분 바꾸는 힘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도 증명되었다. 고블린 레인저들은 일반적인 홉 고블린들과는 외모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얼굴뿐만 아니라 체형까지도 보다 사람에 가까웠다.
리쿰을 비롯한 오크들도 진화의 권능의 혜택을 보았다.
리쿰은 다른 오크들과 달리 체력 특화를 한 번 하고나자 승급 가능 루트가 생겼다. 리쿰 역시 이대로 잘 키운다면 최상위 오크 전사라 불리는 오크 엠퍼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나하나 면담을 병행하니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용호 역시 마력이 무한한 것은 아닌 터라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훨씬 더 간절한 눈빛을 마주한 터라 ‘오늘은 이만’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버그림이었다.
오크들이 진화하는 내내 열망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그가 마침내 용호 앞에 섰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루시아가 용호에게 속삭였다.
[첫 진화 이후 없는 일까지 만들어가며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현재 마몬 가의 던전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훈련장에서도 거의 살다시피 했고요.]
용호는 버그림이 왜 이렇게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진화 숙련치를 볼 수 있는 것은 용호뿐이었다.
버그림 입장에서는 진화 숙련치가 얼마나 찼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꽉 채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훈련과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조마조마했을까.
그래도 다행이었다. 버그림의 진화 숙련치는 모자람 없이 꽉 차 있었다.
용호가 버그림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눈을 감고 서라.”
이제까지 쭉 면담을 뒤에서 지켜봐온 버그림이었다. 눈을 꽉 감고 연신 마른 침을 삼켰다. 용호는 그런 버그림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고,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이번에도 마력 특화.
반응이 있었다. 용호는 버그림의 마력을 느꼈다. 아주 작지만 분명히 맥동하는 그것. 다시 태어난 버그림의 마력 저장소!
버그림 또한 느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을 쏟아냈다.
다시는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감각이었다. 그런데 느껴졌다. 마치 어둠 속의 빛처럼, 작고 작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눈부신 별빛처럼.
버그림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대로 몇 번이나 용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용호는 그런 버그림을 일으켜 세웠다. 북받치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역마를 위해 돌아가 쉴 것을 명해주었다.
[이제 마법 장비를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축하드려요, 주인님.]
루시아의 말 대로였다. 하지만 용호는 그 사실에는 그리 큰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버그림이 마력을 회복했다는 사실이, 그리하여 다시 한 번 삶의 희망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더 크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용호는 기분 좋게 옥좌 위에 앉았다. 엉엉 우는 버그림에 놀란듯 쭈뼛쭈뼛 다가오는 유리아와 바둑이와의 면담을 시작했다.
바둑이의 진화는 간단했지만 유리아의 진화는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아가레스에게서 흡수한 특성을 부여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용호는 휴식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마침내 마지막 사역마를 앞에 둔 용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어… 가주님?”
엘리고스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용호의 미소를 마주했다. 어째 다른 사역마들 때와 달리 진화 희망 루트 같은 것을 묻지 않는 용호가 심상치 않았다.
레드 데몬 비스트로 진화한 이후 엘리고스도 노력했다. 오필리아가 없을 때도 일하는 틈틈이 남두무영권을 연마했으니 말이다.
용호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말했다.
“엘리고스 진화 루트는 오필리아가 정해줬어. 체력 진화를 시키라던데? 아직 허리랑 하체가 약하다고. 아, 그리고 오필리아가 안부 전해달래.”
선택권 따위는 없었다. 엘리고스는 상냥하게 오라버니라 부르며 자신의 팔을 꺾어대던 오필리아를 떠올렸다. 순순히 눈을 감았고, 진화의 권능을 받아들였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아가레스의 정수를 흡수한 이후 처음으로 마력을 모두 소진한 용호는 결국 늦잠을 잤다. - 덕분에 함께 늦잠을 잔 카타리나는 모처럼의 행복에 즐거워했다. -
경매장에 대동할 인물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대 가주의 몇 안 되는 유산 가운데 하나인 마왕의 정장을 차려 입은 용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기사의 복장을 갖춘 카타리나가 표정까지도 그때로 돌아가려는지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던전 입구 방 앞에 던전 상회의 인물들이 도착했습니다.]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이미 입구 방에서 대기 중이던 용호는 숨을 깊이 삼켰다. 다시 한 번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갈까?”
“네, 가주님.”
용호가 손을 놀리자 루시아가 던전의 입구를 개방했다.
쏟아지는 달빛과 함께 한 사람을 맞이하였다.
아주 오랜 옛날, 탐욕의 왕의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제 30장 - 귀가 끝, 제 31장 - 던전 상회 경매장으로 이어집니다.
< 제 30장 #3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