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90화 (90/227)
  • < 제 29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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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푸르른 빛의 덩어리였다. 끔찍하기 짝이 없는 괴수의 형상을 한 아가레스의 품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조차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었다.

    영롱한 그것을 녹염이 감쌌다. 아몬의 창끝이 용호의 수족이 되어 아가레스의 정수를 받아들였다.

    쾌락에 앞서 전율이 일었다. 너무나 큰 충격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색은 파랑이었다. 속성은 번개였다.

    어느새 일어선 탐욕이 녹염과 더불어 아가레스의 정수를 끌어안았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듯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힘을 억눌렀다. 삼키는데 그치지 않고 수십, 수백 조각으로 갈라 낱낱이 분석했다.

    정수는 곧 그 마족의 역사라 해도 좋았다. 아가레스가 지금까지 흡수한 정수들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본래라면 버려질 것들이었다. 이용할 수 없는, 그저 흔적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탐욕은 그것을 용납지 않았다. 용호의 마력이 강해짐에 따라 함께 성장한 것은 진화의 권능만이 아니었다.

    흔적에 남아 있는 영혼의 색과 속성. 지금까지와는 다른 힘들.

    포라스와 여왕개미의 냉기처럼 용호가 따로 마력을 부리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해당 속성을 축적하고 분석해 용호의 내성을 높이는 것은 가능했다.

    거두어들인 것은 색과 속성만이 아니었다.

    아가레스는 타고난 포식자였다. 그는 먹는 것으로 새로운 형질을 습득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자였다. 이것은 마왕의 권능이 아닌, 그의 종족이 가진 본연의 특성이었다.

    그 특성.

    이번에는 진화의 권능이 목소리를 높였다. 탐욕은 진화의 권능을 위해 그 능력을 용호의 마력 한 곳에 보관해두었다.

    이 특성 역시 용호가 취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용호가 비슷한 특성을 지닌 자에게 부여해 능력을 강화하는 것은 가능할 터였다.

    유리아.

    공주개미의 얼굴이 잔영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났다. 연이어 짜릿한 쾌감이 밀려와 용호의 생각을 끊어 놓았다.

    아가레스의 정수는 지금까지 용호가 흡수한 그 어떤 정수보다도 거대했다. 난잡하게 뒤섞여 있어 순도는 부족했지만 압도적인 양이 그 모든 것을 충당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영혼은 물론이고 육신이 터질 것만 같았다. 힘을 발산해야 했다. 흡수할 수 없는 힘의 일부를 아깝지만 내보내야만 했다. 용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마왕들이 정도 이상의 정수를 취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취해야만 하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탐욕이 이를 거부했다.

    용호의 육신이 아가레스의 마력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감당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새로운 그릇.

    한층 거대한 마력을 담아둘 수 있는 더 크고 강대한 그릇!

    진화의 권능이 발현되었다. 아가레스의 마력을 양분 삼아 용호의 육신을 진화시켰다.

    초록빛 섬광이 용호의 전신을 뒤덮었다. 용호의 육신을 문자 그대로 재구성하였다.

    환골탈태라 해도 좋았다. 마력의 순환로가 개척되었고, 지금까지 막혀있던 통로들이 개통되었다.

    육신이 강화되었다. 뼈는 보다 많은 마력을 머금어 단단해졌고, 육체의 성능은 한 단계 더 진보하였다.

    용호의 갈망 또한 놓치지 않았다. 키가 조금 더 자랐다. 육체의 조형미 역시 보다 우수해졌다.

    그리고 마지막.

    이 모든 용호의 변화에 호응하는 자가 있었다.

    홍련의 마창 아몬은 지금까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억지로 퇴화시킨 힘을 다시 진보시킬 때를. 본연의 힘을 되찾을 그 순간을.

    물론 지금도 부족했다. 아직도 가야만 할 길이 멀었다.

    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어도 될 것 같았다. 조금 더 자신의 힘을 개방해도 될 것 같았다.

    초록빛 섬광에 뒤덮인 용호의 팔 끝에서부터 붉고 붉은 불꽃이 일었다. 홍련의 겁화는 이내 한 줄기 창의 형상을 취했다. 자신의 주인에게 본연의 모습을 일부나마 드러냈다.

    불꽃과 불꽃.

    녹염과 홍염이 맞물렸다. 한 데 섞여 타올랐고, 이내 막대한 빛을 발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용호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진보한 육신으로 토하는 최초의 숨결이었다.

    감각이 확장되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주변 모두가 생생히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변화에 걸린 시간은 불과 십여 초.

    하지만 그 시간동안 전장의 시간이 정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가레스의 수족들인 곤충형 괴물들은 아가레스의 죽음을 인지했다. 그것들 가운데 일부는 무기력해졌고, 다시 일부는 오히려 더 심하게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아가레스와 직접 이어져 있지 않은 사역마들 또한 거대한 불길을 보았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껍질만 남은 아가레스의 모습이 그들의 눈동자에 비쳐졌다.

    아가레스가 죽었다. 그는 패했고, 마몬 가의 가주가- 저 불꽃의 마왕이 그의 정수를 흡수했다.

    용호는 눈을 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가레스의 시신 대신 다른 것에 시선을 두었다. 어느새 착지해 약간은 겁먹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살라미를 마주했다.

    “지쳤구나.”

    오늘 가장 무리한 마몬 가의 사역마라면 단연 살라미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용호의 목소리에 안도한 듯 살라미가 눈빛으로나마 어설픈 웃음을 보였다.

    용호는 그런 살라미의 콧잔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조금만 더 무리하자.”

    살라미가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였지만 용호는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아가레스는 죽었지만 그의 군대가 남아 있었다. 부서지고 와해되기 일보직전의 군대였지만 아직도 수백이 넘는 숫자였다.

    살라미의 날개는 이제 한계였다. 용호도 그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살라미에게 뜻을 전했다. 새로운 순환로를 통해 마력을 끌어올렸고,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초록빛 귀화가 피어오른 두 눈에 빛의 상자가 보였다.

    [살라멘더 - 강습형 진화]

    용호의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초록빛 섬광이 살라미의 육신을 뒤덮었다.

    살라미가 포효했다. 그 날개는 보다 크고 튼튼하게 변했고, 육신 또한 보다 전투적으로 변모하였다.

    앞발과 어깨가 커졌다. 발톱은 보다 날카롭게 변했고, 마치 드래곤의 그것과 같이 새로운 비늘들이 돋아나 육신을 보호했다. 늘씬하게 늘어난 허리와 꼬리에서 돋아난 돌기들 역시 빼놓을 수 없었다.

    이전까지의 살라미가 승용차였다면 지금의 모습은 흡사 장갑차와 같았다.

    승급을 마친 살라미의 숨결에서 뜨거운 열기가 묻어났다. 용호는 씩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카타리나와 오필리아가 서 있었다.

    카타리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다란 귀와 꼬리를 파닥거렸다. 손가락 사이에 틈이 넓어 잔뜩 흥분한 파란 눈동자와 붉게 달아오른 뺨이 일부나마 보였다.

    오필리아는 카타리나와 달리 약간은 짓궂게 웃었다. 용호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인상적이네요.”

    두 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인 용호는 이내 이해했고, 어색하게 웃으며 두 손을 내렸다. 육신을 새로이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길이 모든 것을 태워버린 탓에 용호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어쩐지 서늘하더니.’

    용호는 그대로 마력을 일으켰다. 진한 빛을 띤 녹염으로 하반신을 휘감은 뒤 살라미의 등에 올라탔다.

    “이제 마무리를 지어볼까?”

    용호가 말했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는 제각기 예를 표하며 응답했다.

    살라미가 날개를 펼쳤다. 땅을 박차며 날갯짓을 하니 어마어마한 풍압이 지상을 뒤덮었다.

    ‘나의 어린 주인이여.’

    아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용호는 부름에 응답하듯 오른팔을 크게 휘둘렀다. 용호의 육신과 마찬가지로 다시 태어난 불꽃의 창을 움켜쥐었다.

    아가레스의 죽음을 목격한 사역마들이 도망치고 있었다.

    곤충형 괴물들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 미쳐 날뛰었다.

    “스컬컬!”

    저 멀리서 용맹하게 전투 망치를 휘두르는 스컬이 보였다. 용호는 더는 지체하지 않았다. 허공 높은 곳에서 선회하는 살라미에게 명령했다. 불꽃의 날개로 하늘을 수놓았다.

    전장을 가르는 불꽃의 창.

    스스로가 말했던 그대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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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가레스와의 전투가 완전히 마무리 된 것은 개전으로부터 3시간이 흐른 뒤였다.

    곤충형 괴물들은 포기나 항복을 몰랐다. 마지막 하나까지 모두 죽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가레스가 동부의 가주들을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손에 넣은 사역마들은 거의 대부분이 도망쳤다. 곤충형 괴물들의 발악이 시간을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자유 도시의 대승이었다. 두 배가 넘는 적을 무찌른데다가 적의 수장까지 쓰러트렸다. 하지만 자유도시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일단 자유도시의 세 수장 가운데 하나인 다곤이 죽었다. 미치광이 오로스 역시 부상이 심해 재생력이 강한 트롤임에도 불구하고 전투 종료 직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자유도시의 병력들 가운데서 가장 피해가 큰 것은 오필리아가 스컬에게 붙여준 선술집의 정예 기병들이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용호을 위한 방패가 되어준 이들은 가장 많은 적들과 싸워야 했고, 그만큼 큰 피해를 입었다.

    세 수장 가운데 유일하게 의식이 멀쩡한 오필리아가 남은 병력들을 수습했다. 생산직 길드와 무법자 무리는 자신들의 수장이 아닌 선술집의 여주인의 명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지만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용호의 존재 때문에 당장 불만을 토하지는 않았다.

    기실 항의할 여력도 없는 그들이었다. 불만이 나오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오필리아는 그들의 불만을 좌시할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찍어 누를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머잖아 마몬 가의 수중에 들어갈 자유도시였다. 미치광이 오로스도 의식을 잃기 전의 언행을 보면 이미 오필리아가 마몬 가의 사역마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자유도시는 맡길게.”

    급히 마련해온 정장을 갖춰 입은 용호가 마무리로 마장을 장착하며 말했다. 오필리아가 꼬리를 살짝 늘어트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바로 출발하셔도 되겠어요? 스컬이랑 부하들이야 언데드니 괜찮다고는 해도…….”

    “시간이 부족하니까.”

    용호와 오필리아는 지금 성문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시신들도 다 치우지 못한 그곳에는 용호뿐만 아니라 카타리나와 스컬을 포함한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시간이 부족했다.

    아가레스가 죽었다는 것은 곧 아가레스의 지배하에 있던 던전의 영혼들 역시 죽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가레스의 남은 부하가 몇이든 아가레스의 죽음을 인지했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동부의 다른 가주들도 아가레스의 던전에 생긴 이변을 눈치챘을 지도 몰랐다.

    용호는 아가레스의 정수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아가레스는 진정 포식자였다. 그가 일천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이 지배하에 놓은 던전들을 문자 그대로 텅텅 비워두었기 때문이다.

    아가레스가 휘하에 둔 던전들을 모두 취하는 것은 무리일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자유도시와 가장 인접한 곳에 위치한 던전 두 개만은 취해야만 했다.

    이미 시간을 지체했다. 지금 당장 움직여야만 했다.

    “전 괜찮습니다.”

    오필리아의 걱정 어린 시선을 받은 카타리나가 오필리아 뿐만 아니라 용호에게도 말했다. 용호와 마찬가지로 지난 시간 내내 전투를 거듭한 터라 지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낙오할 수는 없었다. 카타리나 자신은 용호의 호위 기사였다.

    이번에도 역시나 가장 무리한 살라미가 아주 작게 끙끙 앓는 소리를 냈지만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와 더불어 살라미의 등 위에 올랐다. 스컬은 나이트메어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껄껄 웃었고, 스컬 부대는 언데드들답게 지친 기색 하나 없이 출발할 태세를 갖췄다.

    “다녀올게.”

    용호가 말했고 오필리아는 결국 포기했다. 배웅이나마 정성껏 하기 위해 예를 갖추었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기쁜 마음으로 가주 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살라미가 날갯짓을 했다. 동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스컬컬!”

    나이트메어가 질세라 달렸다. 스컬 부대 역시 자신들의 대장을 뒤따랐다.

    혼자 남은 오필리아는 금빛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동쪽을 향해 진군하는 마몬 가의 사역마들을 바라보았다.

    마몬 가의 부흥을 외치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29장 - 일기당천 끝, 제 30장 - 귀가로 이어집니다.

    < 제 29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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