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89화 (89/227)
  • < 제 29장 #3 >

    &

    대기 중에 마력이 들끓어 올랐다.

    호화롭고 현란한 마계의 하늘은 격렬히 타오르는 두 개의 마력에 호응했다.

    전장의 모든 시선들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수백 개의 눈동자들이 저마다 용호와 아가레스의 모습을 비췄다.

    먼저 움직인 것은 아가레스였다.

    뜯겨져 나간 날개와 부서진 등판에 마력이 집중되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 같은 재생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변화라 불러야 할 터였다. 지면을 박차 도약하는 와중에 상처 부위가 사라졌다. 날개가 있던 자리에서 칼날이 달린 팔이 솟구쳐 올랐다. 초고온의 화염에 녹아내렸던 등판에는 새로이 몇 겹이나 되는 갑각이 돋아났다.

    불과 수초.

    아가레스는 육신을 보다 전투적으로 변화시켰다. 용호와의 거리를 좁히며 여섯 개의 눈동자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위압적인 포효를 토하며 명령했다!

    전장 전체가 호응했다. 아가레스의 수족이자 진정한 사역마라 할 수 있을 곤충형 괴물들이 일시에 울부짖었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랜드 웜들을 찢어발기던 괴물들 역시 고개를 들었다. 주인의 명에 따라 움직임을 개시했다.

    수백 마리가 울부짖으니 하늘이 울렸다. 수백 마리가 동시에 지면을 박차니 대지가 진감했다.

    곤충형 괴물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용호를 향해 돌진했다. 전장은 성벽 아래 지상이었고, 수적 우위를 가진 것은 아가레스였다.

    용호도 괴물들의 울부짖음을 들었다. 지진을 연상시키는 진동 또한 느꼈다. 하지만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똑바로 질주하는 폭력의 화신을 노려보았다.

    무지막지한 위압감이었다.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것 같은 끔찍한 살기였다.

    하지만 맞설 수 있었다. 용호는 아몬을 떠올렸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구시온의 시선을 기억했다.

    한 걸음을 내딛으며 명령했다!

    “스컬컬!”

    괴물들의 포효를 가르며 검은 질풍이 휘몰아쳤다. 스컬을 선두로 한 기병대가 용호와 괴물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겨우 수십 기에 불과했지만 철의 장벽과도 같았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 역시 움직였다. 용호의 등 뒤에 자리했던 둘은 비수가 되었다. 아가레스를 향해 돌진했다.

    아가레스가 도합 네 개가 된 칼날을 휘둘렀다. 검압만으로도 대기를 가르는 무시무시한 공격이었다. 카타리나는 그 공격을 똑똑히 보았다. 자연스럽게 궤도를 읽었다. 거의 튕겨나가듯 우측으로 움직여 칼날들을 회피했다.

    오필리아 역시 카타리나와 다르지 않았다. 좌측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회피한 그녀는 연달아 지면을 박차 아가레스의 측면을 파고들었다.

    아가레스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양 옆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단순 회피가 아니라 파고드는 상황이었다. 칼날이 넷에서 둘이 되었지만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오필리아는 숨을 멈췄다. 카타리나가 아가레스의 공격 궤도를 읽었던 것과는 달랐다. 그녀는 공격 그 자체를 느꼈다. 레드 데몬 특유의 육체능력을 두 다리에 집중시켰고, 칼날 사이로 몸을 던졌다. 빠져나갔음을 확신할 새도 없이 아가레스의 몸을 박차 올랐다. 집중하고 집중한 내려찍기를 아가레스의 머리에 선사했다.

    통한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갑각이 너무 두꺼웠다. 아가레스의 머리가 순간 급격히 아래로 향했지만 제대로 충격이 전해지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면에 착지한 순간 몸을 뒤로 크게 날렸다. 본능으로 아가레스를 경계하는 한편 눈동자를 굴려 아가레스의 등 위를 보았다.

    카타리나가 검은 마력을 집중시켰다. 새로이 돋아난 아가레스의 갑각에서 불완전한 부분을 찾아냈다. 부서지고 파괴된 부분을 비집고 새로 돋아난 갑각이었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균열 사이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카타리나는 마력을 다루는 데 미숙했다. 그랬기에 가장 단순한 공격을 했다. 마력을 폭발시켰다!

    아가레스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미약했다. 카타리나는 미련을 두지 않고 아가레스의 등을 박찼다. 카타리나의 두 눈은 아가레스 너머에 위치한 용호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것이 화를 불렀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가 눈을 돌린 그 때 아가레스가 힘을 발했다. 괴물의 육신을 가졌다 하나 그는 마왕이었다.

    뇌전의 구 여럿이 아가레스의 몸 곳곳에서부터 발산되었다. 일시에 폭발했고, 충격파와 뇌전이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를 덮쳤다.

    비명은 짧았다. 카타리나는 추락했고, 오필리아는 이를 악물어 버텼다. 아가레스가 여섯 개의 눈동자를 굴렸다. 네 개의 칼날을 각기 다른 방향으로 휘두를 채비를 갖췄다.

    그리고 불꽃이 일었다.

    정면에서부터 일어난 녹염을 포착한 아가레스는 마구잡이로 칼날을 휘둘렀다. 녹염의 주인을 상대하는 대신 미련 없이 지면을 박찼다. 용호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카타리나가 바닥에 등부터 떨어졌다. 오필리아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가레스가 노리는 것은 자유도시의 병력들이었다. 곤충형 괴물들로부터 용호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을 나선 이들은 아가레스의 군대가 아닌 아가레스 본인을 마주해야만 했다.

    머리 높이가 5미터에 달할 거인 병기 기간테스들이 첫 제물이었다. 거대하고 우둔한 공성병기들은 카타리나나 오필리아처럼 아가레스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거대한 칼날이 번뜩인 순간 상체나 하체가 갈려나갔다. 단숨에 기간테스 세 기를 격파한 아가레스는 발을 멈추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미치광이 오로스가 걱정했던 학살극을 일으켰다.

    피와 육편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쓴 아가레스로부터 발사된 뇌전의 구들이 사방에서 폭발해 피해를 확산시켰다.

    아가레스는 사방을 동시에 보았다. 수족인 곤충형 괴물들이 기병대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 우회한 병력들이 자유도시의 병력들과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소수 대 소수의 싸움이 아니었다.

    다수와 다수의 싸움이었다.

    아가레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황의 흐름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아가레스의 눈동자 하나가 위협을 포착했다. 성벽 위에서 제일 먼저 베었던 미치광이 오로스가 피와 육편 사이를 뚫고 달려오고 있었다.

    아가레스는 칼날을 내리찍었다. 오로스는 언월도를 휘둘러 칼날에 맞섰다. 하지만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약물로 강화한 트롤의 괴력이라 할지라도 아가레스의 힘에는 맞설 수 없었다. 거짓말처럼 언월도가 깨졌다. 오로스의 오른쪽 어깨가 통째로 잘려나갔다.

    “그리스!”

    두 번째 칼날를 휘둘러 오로스의 허리를 베려는 순간 마법이 발동했다. 다곤이 필사적으로 외친 주문이 아가레스의 발밑을 미끄럽게 만들었고, 순간 휘청한 아가레스의 칼날이 오로스가 아닌 허공을 베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아가레스는 나머지 발들로 미끄럽지 않은 지면을 박찼다. 어깨가 잘려나가 고통스러워하는 오로스를 밀쳐내고 다곤을 향해 질주했다.

    그 돌진이 너무 빨랐기에 다곤은 마법을 포기했다. 자신과 아가레스 사이에 위치한 병력들이 갈려나가는 것을 보며 메이스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오로스는 어리석지 않았다. 아가레스의 공격을 회피하는 것은 카타리나와 오필리아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아예 싸우지 않는다면 모를까, 정면에서 아가레스와 마주한 순간 오로스와 다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공격을 막아내는 것뿐이었다.

    다곤은 집중했다. 피의 장벽을 뚫고 머리 위에서부터 쇄도하는 거대한 칼날을 메이스로 막아냈다.

    충돌한 순간 무릎이 꺾였다. 오우거 특유의 괴력을 발해 칼날을 튕겨내려 한 그때 또 다른 칼날이 배와 허리를 갈랐다.

    섬뜩한 감각은 잠시였다. 다곤의 뱃가죽이 갈라지며 피와 내장이 쏟아졌다. 옆구리에서부터 파고든 칼날은 아예 뼈를 잘라놓았다. 괴력은 발휘되지 못했고, 찍어 누르던 칼날은 다시 기세를 발해 비틀거리는 다곤을 수직으로 베었다.

    비명과 울부짖음이 동시에 울렸다. 누군가 공포를 토했고, 그것들이 전염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도한 곤충형 괴물들이 자유도시 병력들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죽음이 양산되었다.

    미치광이 오로스는 생각했다. 애당초 성을 나오지 말았어야 했을까? 아가레스와 그 부하들에게 마몬 가의 가주가 파묻혀 죽는 것을 지켜봤어야 했을까?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어차피 여기서 놈을 막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오로스가 잘려나간 어깨를 재생했다. 체력을 너무 소진한 탓에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헐떡였지만 끝끝내 고개를 들어 아가레스를 보았다.

    아가레스가 다곤을 먹고 있었다. 거대한 턱을 피로 물들이며 눈동자들을 굴렸다. 오로스는 그 눈으로부터 즐거움을 읽을 수 있었다.

    소리 질렀다. 그런 오로스의 곁을 카타리나와 오필리아가 지났다. 둘은 다시 한 번 아가레스에게 정면으로 돌진했고, 아가레스는 씹어 삼키던 다곤의 상체를 뱉어내며 몸을 돌렸다. 여섯 개의 눈동자 가운데 넷을 카타리나와 오필리아에게 할애했다. 나머지 둘로 하늘을 살폈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는 조금 더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아가레스의 칼날 개수와 속도는 이전과 동일했지만 지면의 상태가 달랐다. 여기저기 널린 피 웅덩이와 육편들이 두 사람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아가레스는 일찌감치 뇌전의 구를 꺼냈다. 두 사람에게 막무가내로 칼날을 휘두르는 대신 한 발 먼저 뇌전의 구를 폭발시켰다.

    대기에 전격이 퍼졌다. 지면은 미끄러우면서도 질척거렸다.

    하지만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 없었다.

    칼날 사이로 몸을 던졌다.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회피하며 아가레스와의 거리를 좁혔다. 각기 준비한 일격을 아가레스에게 퍼부었다.

    카타리나가 검은 마력을 폭발시켰다. 오필리아가 아가레스의 다리 하나를 걷어차 부러트렸다.

    아가레스는 고통을 참았다. 여섯 개의 눈동자 가운데 둘만으로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를 보았다. 네 개의 눈은 이 자리에 당도하지 않은, 하지만 곧 당도할 자를 포착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늘에서 불기둥이 쏟아졌다.

    일찌감치 하늘을 주시하고 있던 아가레스는 양 팔을 크게 휘둘렀다.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를 위협함과 동시에 몸을 뒤로 날려 쏟아지는 불기둥을 피했다.

    붉고 거대한 불기둥이 지면에 충돌했다. 아가레스의 두 눈에는 허공에서 추락하듯 비행하는 살라미가 보였다.

    아가레스는 눈을 깜박였다. 불기둥의 색이 지금까지와 다르다는 사실을, 살라미의 등 위에 올라탄 자가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여섯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한 곳을 향했다.

    “우오오오오오!”

    불기둥을 꿰뚫고 녹염이 일었다.

    탐욕의 불길을 뒤집어쓴 용호가 살라미의 불기둥을 돌파했다. 단숨에 아가레스의 지척으로 파고들었다.

    아가레스가 재차 칼날을 휘둘렀지만 늦었다. 용호와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아가레스는 입을 크게 벌려 산성액을 토했다.

    용호에게도 횡액이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돌진하는 와중이었기에 산성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한 걸음을 내딛으며 왼팔을 들어올렸다.

    “카이완!”

    소리쳤다. 왼손으로부터 발현한 왜곡의 권능이 용호를 지켜주었다. 산성액은 공간의 벽에 막혀 나아가지 못했고, 도리어 튕겨나간 일부가 아가레스의 육신을 녹였다.

    “키아아아아!”

    아가레스가 고통과 격노를 동시에 표했다. 용호는 그것을 무시했다. 도약했고, 연달아 아가레스의 다리를 박찼다. 역수로 짧게 쥔 아몬을 당기며 아가레스의 눈을 노려보았다.

    꿰뚫었다.

    아몬의 창끝이 유리구슬 같은 아가레스의 눈을 부쉈다. 동시에 아가레스의 몸체에서 급히 새로 돋아난 촉수가 용호의 복부를 관통했다.

    아가레스가 비명을 질렀다. 용호가 이를 악물며 힘을 폭발시켰다.

    녹염이 눈을 불태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안구와 이어져 있는 아가레스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처음 눈을 꿰뚫렸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격통이 아가레스를 엄습했다.

    미쳐 날뛰는 것이라 해도 좋았다. 네 개의 칼날을 아무렇게나 휘두르며 비명을 질러댔다. 눈과 입에서부터 녹염이 새어나왔다.

    용호는 그런 아가레스에게 굳이 매달려 있지 않았다. 아몬을 팔찌로 변환시켜 아가레스로부터 떨어졌다.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고개를 쳐들어 마력의 흐름을 읽어냈다.

    아가레스의 마력이 문자 그대로 휘몰아쳤다. 본능적인 생존욕구가 재생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전신의 마력을 한 곳에 집중시켰다.

    그렇기에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가레스의 마력이 집중되는 곳. 아가레스의 정수가 위치한 장소!

    용호는 다시 아몬을 움켜쥐었다. 필사적인 재생을 하느라 움직이지 못하는 아가레스의 복부 한 가운데를 보았다. 아몬을 당기며 초고온의 화염을 일으켰다.

    투기장 1층에서 강철 소를 꿰뚫었던 그 순간의 일격.

    용호는 아몬에게서 배운 것들을 기억했다. 그가 펼쳤던 일수를 지금 이 순간 재현해냈다.

    창끝이 일점을 꿰뚫었다. 초고온의 화염이 아가레스의 갑각을 파괴했다. 아몬이 아가레스의 복부를 파고들었고, 재생을 위해 한껏 집중된 마력을 와해시켰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아몬의 창끝에서부터 찬란한 녹염이 일었다. 아가레스의 정수를 집어삼켰다.

    < 제 29장 #3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