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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87화 (87/227)

< 제 29장 - 일기당천 >

제 29장 - 일기당천

건조한 바람이 동쪽에서부터 불어왔다.

아가레스는 움직임을 숨기지 않았고, 자유도시의 모두는 동풍과 함께 군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도시를 버리고 도망치는 자들이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는 자들도 있었고, 오히려 맞서 싸울 의지를 불태우는 자들도 있었다.

이틀이란 시간이 걸렸다.

아가레스의 군대가 황야를 가로지르는 데 걸린 그 모든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자유도시의 목을 죄었다.

“거의 다 왔다.”

성벽 위에 서서 멀리 바라보던 미치광이 오로스는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벌써 여섯 번째 담배였지만 그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가레스의 병력은 대략 일천 여 마리의 사역마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자유도시의 수비 병력이 오백 사십 이 마리의 사역마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숫자였다.

오로스는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들을 파멸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군대에게서 시선을 돌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성벽 위에 도열한 자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았다.

동쪽 성벽 끝에 선 다곤의 커다란 덩치가 보였다. 그 옆으로는 그의 부하들이 무법자들답게 제멋대로인 무장 상태로 서 있었다. 거리가 멀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다곤은 긴장하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싸움 터를 전전한 그에게도 전쟁은 낯선 것이었다.

오필리아는 팔짱을 낀 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아가레스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침착한 시선과 달리 허공에 연신 팔자를 그리며 움직이는 꼬리에는 불안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약간은 삐딱하게 선 자세 역시 그녀의 심정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자유도시의 세 수장들은 모두 성벽 위에 있었다. 하지만 마몬 가의 가주는 성벽 위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자유도시에조차 자리하지 않았다.

이틀 전이었다.

오필리아가 아가레스의 움직임을 포착한 바로 그때 그는 자유도시를 떠났다.

도망은 아니었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자유도시를 나서기 직전에 한 가지 말을 남겼다.

‘전투가 시작되면 내가 적진에 큰 혼란을 일으키겠다. 그전에는 수비만 하다가 혼란이 발생하면 역공을 개시해라.’

어떻게 혼란을 일으킬 것이냐 물었지만 마몬 가의 가주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혼란의 징조는 어떻게 알아보냐는 질문에도 그냥 보면 바로 알 것이라는 뻔한 대답만을 남겼다.

오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오필리아의 바로 옆에 자리한 마몬 가의 호위 기사와 스켈레톤 나이트의 존재가 그나마 오로스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떠난 것은 마몬 가의 가주뿐이었다.

오필리아의 말에 따르면 저 다크 엘프 호위 기사는 마몬 가 가주의 애인이기도 했다. 마몬 가의 가주가 진정 도망치려 했다면 자기 애인을 자유도시에 남겨뒀을 리가 없었다.

아가레스의 군대는 성벽에 설치된 각종 병기의 사거리 밖에 정지했다. 잠시나마 병력을 쉬게 한 뒤 전투를 개시할 요량인 것 같았다.

자유도시만큼이나 제멋대로인 병력이었다. 아가레스가 동부의 가주들을 잡아먹는 과정에서 부하로 삼은 사역마들이었기에 그 종류가 실로 다양했다.

고블린이나 오크, 오우거는 물론이고 오로스의 동족인 트롤들도 있었다. 라이칸슬로프로 추정되는 일단의 무리 곁에는 군단의 거의 절반 가량을 차지하는 크고 작은 곤충형 괴물들이 자리했고, 다시 그 옆으로는 보기만 해도 끔찍한 공성병기들과 골렘들이 위치했다.

일천 이란 숫자는 수만 대군과는 다른 현실적인 압박감을 주었다.

오로스는 숨을 골랐다. 귀에 부착해둔 근거리 통신기로부터 다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몬 가의 가주는 아직인가? 혹시,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지만 도망친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놈이 아니다. 놈은 반드시 올 거다. 다곤 네 녀석도 그의 눈을 보지 않았나. 그건 도망치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싸우고자 하는 자의 눈이었지.”

오로스는 반사적으로 답했다. 다곤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당부하기 위한 말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는 믿는 수밖에 없었다.

오필리아는 따로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로스는 더 속이 탔다. 다곤에게 말했던 것처럼 마몬 가 가주의 눈빛을 떠올려 보았다. 회의장에서 마주했던 그는 결코 도망칠 자가 아니었다. 애당초 도망칠 것이라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요청에 불응했을 터였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동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은 어느 순간 멈추었고, 이를 대신하듯 아가레스의 군대가 다시 진군을 개시했다. 아니, 그것은 이미 돌진이라 할 수 있었다.

괴성과 포효가 황무지를 뒤덮었다. 하나 된 소리는 그것만으로도 무기라 할 수 있었다. 성벽을 때리는 함성에 자유도시의 병력들은 일순간이나마 위축되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일단은 싸워야만 했다. 오로스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뱉으며 소리쳤다. 다곤 역시도 메이스를 움켜쥐며 주문을 준비했다. 사수들과 포수들은 저마다의 무기 앞에 서서 발사 명령을 기다렸다.

땅이 울렸다. 군대와 성벽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 오로스는 크게 손을 휘두르며 명령했다.

오크들의 전투함성이 성벽 위를 뒤덮었고, 각종 수성 병기들이 아가레스의 군대 머리 위로 쇄도했다.

오로스는 마몬 가의 가주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아가레스의 돌격병들이 쏟아지는 포화를 뚫고 돌진했다. 양측이 내쏜 화살의 비가 하늘을 뒤덮었고, 돌과 마법이 허공을 갈랐다.

소음이 소음을 낳았다. 괴성과 울부짖음, 포효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보다 잘 들을 수 있었다. 나직한 한 마디가 거짓말처럼 소음을 찢고 오로스의 귀에 파고들었다.

[온다.]

오필리아는 아가레스의 군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곁에 서 있던 다크엘프 호위 기사- 카타리나는 환한 얼굴로 남쪽을 향해 돌아섰다. 공성병기가 성벽을 때렸다. 하지만 오로스는 신경 쓰지 못했다. 마치 홀린 것처럼 카타리나와 오필리아를 따라 돌아섰다. 등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스컬컬!”

먼 곳에서부터 불꽃의 궤적이 하늘을 갈랐다. 이미 한 번 본 것이었기에 오로스도 알 수 있었다. 마몬 가의 가주였다. 그가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마몬 가의 가주만이 아니었다.

땅이 흔들렸다. 주변 일대가 진감했다. 아가레스의 군대가 돌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공성병기와 수성병기가 각기 성벽과 바닥을 강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로스는 이 진동 또한 알고 있었다. 남부 공백지에 살며 몇 번인가 경험해본 일이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 없었다.

설마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그것을 내뱉기도 전에 상상했던 존재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포효하며 땅을 헤집었다. 거대한 랜드 웜이 지면으로부터 솟구쳐 올랐다. 더욱이 하나가 아닌 셋이었다.

[랜드 웜! 설마 랜드 웜을 부리는 건가?!]

다곤이 경악했다. 오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가레스의 군대보다도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불꽃과 랜드 웜을 보며 확신했다.

“쫓기고 있는 거다. 쫓기고 있는 거야! 랜드 웜들을 유인해 온 거다!”

랜드 웜의 포효가 오로스의 외침을 집어삼켰다. 폭풍처럼 돌진하던 아가레스의 군대는 순간 주춤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쉼 없이 서로를 노리던 공성 병기와 수성 병기들 역시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전장의 모두가 한 곳만을 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의 홍수 속에서 용호가 명령했다. 살라미가 다시 한 번 불꽃의 날개를 크게 펼쳤다.

“파고들어!”

바람을 갈랐다. 불꽃의 잔영이 랜드 웜들을 자극했고, 살라미는 짜릿한 공포와 쾌감 속에서 고도를 낮췄다. 마치 지면 위를 미끄러지듯 초저공 비행을 실행했다.

용호는 집중했다. 왼팔에 찬 팔찌로부터 마구잡이로 발산되던 마력을 그러모았다. 마몬의 투기장 3층을 돌파하고 얻은 보상이었다. 과거 카이완이 손에 넣은 것과 똑같은 팔찌였고, 그 안에는 용호가 기대했던 마력이 담겨 있었다.

이틀.

용호가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며 랜드 웜들을 찾아 헤맨 시간이었다. 그리고 용호는 마침내 랜드 웜 세 마리를 모을 수 있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시간을 맞춘 것은 실로 천운이었다.

살라미가 아가레스의 군대 한 가운데를 파고들었다. 무지막지한 빠르기로 돌진하는 불꽃을 아가레스의 군대는 감히 건들지도 못했다. 살라미의 비행이 최저점에 도달한 그 순간 용호는 팔찌 안의 마력을 단번에 방출시켰다.

그것은 마력의 폭발이었다. 휘몰아치는 갈색의 마력 속에서 용호는 살라미의 등에 돋아난 손잡이를 당겼다. 다시 한 번 명령했다.

“날아올라!”

불꽃의 날개가 허공을 때렸다. 살라미는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부하 속에서 중력을 거슬렀다. 수직으로 솟구쳐 올랐다. 속도가 만들어낸 바람을 타고 불꽃의 잔영이 흩날렸다.

마력을 발산하고 기껏해야 수초.

아가레스의 군대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드리웠다. 하늘조차 가린 그것들은 이내 피할 수 없는 재앙으로 화하였다.

랜드 웜 세 마리는 더 이상 용호를 노리지 않았다. 그것들은 마력의 잔향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아가레스의 군대 한복판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지면이 뒤흔들렸고, 비명과 울부짖음이 순식간에 전장을 가득 채웠다. 개중 작은 것도 십 여 미터에 달하는 랜드 웜들의 몸부림은 끔찍하기 짝이 없는 결과를 낳았다.

굉음이 비명을 묻었다. 뼈와 살은 짓뭉개졌고, 순식간에 수십에 달하는 사역마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욱이 끔찍하게도 랜드 웜들은 조금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앙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던 자들은 말을 잊었다.

미치광이 오로스 역시 그저 멍청한 얼굴로 바라만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마몬 가의 가주는 어떻게 랜드 웜들을 유인한 것인가.

이제 그냥 구경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었다.

랜드 웜은 크고 강했지만 일천이란 숫자의 사역마들을 일소할 정도는 아니었다. 옆구리를 물어뜯긴 아가레스의 군대가 혼란에 빠지긴 했지만 랜드 웜만으로 궤멸할 리는 없었다.

용호가 남겼던 말에는 한 가지 명령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성벽 위에는 그 명령을 잊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공격 개시! 있는 대로 쏟아 부어!”

오필리아가 명령했다. 압도적인 광경에 짓눌려 있던 자유도시의 병력들은 그 순간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화력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랜드 웜들은 자유도시의 우군이 아니었다. 피아를 구분할 필요는 없었다.

“쏴라!”

“쏴라!”

함성을 토하며 랜드 웜과 아가레스의 군대를 가리지 않고 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명령이 연이어졌다.

“스컬컬!”

성문이 열렸다.

칠흑의 거마가 쏘아진 활처럼 자유도시를 떠났다. 그 뒤를 따라 스켈레톤들을 태운 짐승들이 질주했다. 오필리아의 정예 병력들로 구성된 기병대 역시 스컬의 뒤를 따랐다.

스컬은 전장을 우회했다. 랜드 웜이 파고든 것은 아가레스 군대의 한복판이었다. 전장은 넓었고, 랜드 웜으로부터 떨어진 곳에도 병력은 존재했다. 랜드 웜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휩쓸리진 않았지만 그들 역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스컬을 필두로한 기병대가 그들을 향해 휘몰아쳤다. 스컬이 휘두른 망치로부터 번개가 방출되었고, 저마다의 창을 세운 스켈레톤들과 기병대가 아가레스의 군대를 짓밟았다. 그것은 흡사 검은 질풍과도 같았다.

하늘 높은 곳에서 불꽃이 선회했다. 살라미의 등 위에서 전장을 굽어 본 용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성벽 위에서 검은 마력을 일으키는 카타리나를 보았다. 거리는 멀었지만 시선이 교차했음을 직감했다.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용호는 미소 지었다. 오른 팔을 크게 뻗어 허공에 형성된 불꽃의 창을 움켜쥐었다.

안전한 곳에서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다. 이 전장은 용호 자신의 것이었다.

살라미가 포효하며 다시 한 번 반전했다.

전장의 좌측.

아가레스의 군대 우측을 들쑤시고 있는 스컬과 기병대에 짝을 맞추듯 용호와 살라미가 지상을 향해 돌진했다.

지상을 찌르는 불꽃의 창으로 화하였다.

&

< 제 29장 - 일기당천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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