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86화 (86/227)
  • < 제 28장 #3 >

    &

    그것은 폭발과도 같았다.

    예고 없이 시작된 폭풍우였다.

    용호의 양쪽 귀 위로 그간 감춰져 있던 뿔들이 돋아났다. 휘어지지 않고 곧게 뻗은 그것들은 날카로운 삼각형을 그렸다. 칼날과도 비할 수 있었다.

    집중된 마력은 은은히 퍼져나가지 않았다. 용호를 중심으로 사납게 휘몰아쳤고, 격류가 되어 회의장 안을 뒤덮었다.

    미치광이 오로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양쪽에 두 개씩, 도합 네 개의 뿔이었다. 어느 정도 강할 거라 생각했지만 설마 뿔이 네 개나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뿔의 숫자는 곧 마력의 격을 나타냈다.

    공백지의 가주들은 보통 두 개에서 세 개 정도의 뿔을 지녔을 뿐이었다. 마계 전체를 기준으로 한다 할지라도 뿔이 네 개인 가주의 숫자는 전체 가주들의 절반 이하일 것이 분명했다.

    ‘뿔이 전부는 아니다.’

    오로스는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격류에 휩쓸리지 않고자 스스로의 정신을 가다듬었다.

    맞는 말이었다.

    뿔의 숫자가 분명 마력의 강함을 드러내는 지표인 것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뿔이 세 개임에도 불구하고 뿔이 네 개인 자보다 더 마력이 강한 존재도 있었다.

    똑같이 뿔이 네 개라 하여 마력의 강약까지 동등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이에도 분명 강약의 서열이 존재했다.

    짧은 시간이었다. 겨우 숨을 몇 번 고를 그 사이에 오로스는 스스로의 말에 위안을 느꼈다. 당황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용호를 바라보는데 성공했다.

    뿔이 전부가 아니다.

    또한 마력 역시 전부가 아니다.

    마력의 강약만으로 강함을 논할 수는 없었다. 마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전투에 유리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명검을 든 자가 반드시 뛰어난 검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오우거와 트롤은 강인한 육체능력으로 마력의 강약을 뒤집었다. 실전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결코 마력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로스는 위축되는 자신을 느꼈다. 등을 따라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숨을 쉬기가 거북했다. 용호로부터 발산된 마력이 마치 오로스 자신을 격하게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단순히 마력이 강하다고만 표현할 수 없었다.

    무거웠다. 포라스나 융케라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오로스가 이를 악물었다. 트롤의 뛰어난 육체능력을 활성화 시켜 용호의 마력이 야기한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강하지 않아!’

    강하다. 분명 강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냉정히 셈한다면 포라스나 융케라스의 마력보다 1.5배 정도 높은 수치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아가레스의 마력은 저것보다 훨씬 더 강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력의 크기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있었다. 오로스 자신의 인지를 초월한 무언가가 용호의 마력 안에 담겨 있었다.

    용호가 마력을 개방하고 기껏해야 십여 초 남짓.

    오로스는 용호의 강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된 저항을 포기했다. 그리고 그랬기에 지난 십여 초 간 잊고 있었던 다곤의 존재를 새삼 깨달았다.

    오로스 자신은 그저 마력의 폭풍우에 휩쓸린 것에 불과했다. 다곤은 폭풍우의 근원과 마주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을 압박감은 오로스 자신의 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터였다.

    ‘다곤!’

    다곤 역시 마력을 일으켰다. 오우거 메이지인 그는 오로스보다 몇 배는 더 마력을 다루는데 능숙했다.

    다곤이 웃었다. 들어 올렸던 메이스를 내려놓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강하군. 싸울 것도 없겠어. 널… 아니, 마몬 가의 가주인 그대를 인정하겠다.”

    목소리가 좋지 못했다. 쥐어짜낸 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오로스는 다곤의 등을 보며 그 표정을 짐작했다. 힘겹게, 억지로 웃고 있는 다곤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용호는 그런 다곤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실소했다.

    “칼을 휘두르는 자는 자신 역시도 칼에 맞을 각오를 해야만 하지.”

    오른팔을 들어올렸다. 거칠게 몰아치던 마력의 흐름이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하지만 안도할 수 없었다. 지금의 정적은 폭풍전야와 같았다.

    마력이 한 곳에 집중되었다. 용호의 오른손에서부터 홍련의 불길이 일었고, 그것은 이내 하나의 창으로 화하였다.

    “시작은 네가 했지만, 끝을 내는 것은 나다. 나 역시도 네 녀석의 강함을 시험해봐야겠다.”

    휘몰아치던 마력은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다. 정련된 그것은 사납게 몰아칠 때보다 더 강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마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안에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무어라 확언할 수는 없었지만 오로스는 특별함을 느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곤은 이제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오필리아의 말처럼 마몬 가의 가주는 호구가 아니었다. 단순한 대련 정도로 마무리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고, 이 싸움의 결과는 지금까지의 대등한 관계를 완전히 박살낼 것이 분명했다.

    다곤은 거친 숨을 쉬었다. 어느 순간 욕지거리를 토하며 메이스를 움켜쥐었다.

    오로스는 갈등했다. 순간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다곤에게 합류해야 할 것인가? 함께 마몬 가의 가주와 싸워 그가 우위에 서는 상황을 막아야 할 것인가?

    하지만 어불성설이었다. 그랬다가는 마몬 가의 가주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질 수 있었다. 애당초 시작하면 안 되는 싸움이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다곤의 실책을 막지 못한 책임을 인정하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것인가? 마몬 가의 가주에게 순순히 주도권을 넘길 것인가? 아가레스라는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두고 우리끼리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며 설득이라도 시도할 것인가?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오직 용호와 다곤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오로스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위대한 마몬 가의 수장이시여, 노여움을 거두어주소서. 다곤의 실책을 용서하시고, 그를 말리지 못한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차분한 목소리는 오필리아의 것이었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던 오로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선술집의 여주인이 자리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필리아?!’

    지난 십여 년간 오필리아를 보아온 오로스였다. 그 어떤 가주를 마주하더라도 말을 높일 뿐 그 이상은 하지 않던 그녀였다. 그녀가 지금처럼 저자세를 취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오로스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오필리아의 돌발행동도 당혹스러웠지만, 그 행동이 야기할 상황 역시 오로스를 혼란스럽게 했다.

    오필리아는 자신이나 다곤과 대등한 위치에 선 자였다. 그런 오필리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이 마몬 가의 가주보다 아래에 있음을 인정했다. 이는 곧 자유도시의 다른 수장들 역시 용호의 아래에 있다는 것과 같았다. 다곤이 대련에서 무참히 패하는 것보다 모양새는 좋을지언정 실질만 놓고 본다면 더 완벽한 패배였다.

    “나 역시 용서를 빈다. 아니, 비오. 감히 그대를 시험하고자 했던 것을 용서해 주시오.”

    다곤이 말했다. 무법자들의 수장인 그는 자유도시의 수장들 가운데서 가장 힘의 우열에 민감한 자였다.

    마몬 가의 가주는 자신보다 더 강한 자였다. 지금은 인정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더 강한 자에게 덤비는 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었고, 특히나 지금의 싸움은 더욱 그러했다.

    애당초 가벼운 마음으로 대련을 청한 다곤 자신이 어리석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오필리아가 저렇게까지 해주었으니 더는 만용을 부릴 수 없었다. 머리를 숙이는 것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오필리아와 다곤이 연달아 패배를 인정하자 용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오로스를 향했다.

    오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오필리아와 다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사실상의 패배 선언을 입에 담았다.

    “용서를 비오.”

    말이 짧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용호는 여전히 차갑고 매서운 시선을 유지한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의 불길을 거두었다.

    오필리아가 그런 용호를 바라보며 강렬한 뜻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너무했다. 오글거리지 않아요? 시작은 네가 했지만 끝을 내는 건 나라니.’

    카타리나보다는 교감의 정도가 약한 오필리아였다. 하지만 용호는 얼추 알아들었고, 저도 모르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좀 더 크게 오른팔을 휘둘렀다. 아몬을 회수하며 눈빛으로 말했다.

    ‘무릎 꿇은 건 괜찮고?’

    ‘하루 이틀 꿇나. 어차피 주인님 앞이니까요. 어쨌든 뜻대로 되어서 다행이에요.’

    예상했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였다.

    오필리아는 다곤과 오로스의 성격을 꿰고 있었고, 그들이 어떤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지 역시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새삼 용호의 힘에 감탄했다. 용호를 처음 마주하고 기껏해야 한 달 남짓한 시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용호는 그 사이에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실로 무시무시한 성장속도였다.

    오늘의 작전이 무사히 성공한 것은 용호의 역할이 컸다. 애당초 용호의 마력이 지금처럼 강해지지 않았다면, 아몬의 위압감을 마력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마력의 지배력이 강해지지 않았다면 오늘의 작전은 아예 입안조차 할 수 없었을 터였다.

    ‘들키겠다. 그만 좀 웃어라.’

    ‘좋은 걸 어떡해요. 내 인생 최고의 투자였지 정말.’

    자발적이 아닌, 강제적인 투자이기는 했지만.

    가주와 그 예속 사역마 사이에 훈훈한 대화가 오고갈 무렵, 그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다곤과 오로스는 착잡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제 마몬 가의 가주는 단순한 용병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스컬은 전투 망치를 거두었고, 검은 마력을 갈무리한 카타리나는 깊은 애정과 존경이 담긴 눈으로 용호의 등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꼬리와 귀가 격하게 파닥거렸지만 다행히 다곤과 오로스는 용호에게 집중하느라 호위기사의 심리상태를 파악하지 못했다.

    용호는 원탁을 향해 걸었다. 모두가 평등함을 상징하는 원탁이었지만 더 이상 그렇지 못했다. 용호가 자리에 앉은 순간, 그 자리는 상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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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지금부터 아가레스에 대해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회의의 진행을 맡은 것은 예상대로 오필리아였다. 그녀는 마치 프레젠테이션을 하듯 각종 자료가 붙은 이동용 칠판 앞에 서서 공백지 남부의 지도를 가리켰다.

    “아가레스는 현재 자유도시 동부에 위치한 에일 가의 던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딱히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가레스가 소유한 던전들로부터 출발한 병력들이 에일 가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에일 가의 가주와 가솔들은 아가레스에게 문자 그대로 잡아먹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오로스가 새삼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담배를 입에 물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현재 예상되는 총 병력의 숫자는 최소 칠백에서 최대 일천 남짓입니다.”

    포라스가와 융케라스 가의 사역마들이 백에서 이백 남짓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실로 무지막지한 숫자였다.

    오필리아는 연이어 자유도시 삼 개 세력의 전력에 대해 설명했다. 그 숫자가 상상 이상으로 정확했기에 다곤와 오로스는 다시 한 번 침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마치 용호 앞에 발가벗은 상태로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선술집에서 싸울 수 있는 자들의 숫자는 칠십 남짓.

    생산자 길드와 무법자 무리가 각각 백 수십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숫자만 따진다면 최약이었지만, 오필리아를 필두로 한 정예의 전력은 결코 남은 두 세력에 뒤지지 않았다.

    “자유도시의 존망이 걸린 일이니 더 많은 인원들을 ‘징발’할 수 있을 겁니다. 거기다 성까지 끼고 있으니 숫자상으로는 크게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투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개인보다는 집단의 힘이 더 강해졌다.

    이 같은 전쟁의 상식은 마계에서 역시 통용되었다. 하지만 인계와 아주 같을 수는 없었다.

    마법이 실존하는 마계였다.

    강대한 마력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는 홀로 수십, 수백의 병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단신으로 전황을 뒤집는 자가 실존하는 것이 마계의 전쟁터였다.

    결국 이번 수성전의 승패를 가르는 것은 아가레스의 존재였다.

    자유도시의 수장들이 용호에게 도움을 청한 것도 결국엔 자신들과 더불어 아가레스를 격퇴할 자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오필리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가레스의 병력 구성과 대강이나마 알려진 그의 능력에 관한 것들이었다.

    회의가 파하고 일주일 뒤.

    아가레스가 이끄는 점령군이 에일 가의 던전에서 출발했다.

    제 28장 - 개전 끝, 제 29장 - 일기당천으로 이어집니다.

    < 제 28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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