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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82화 (82/227)
  • < 제 27장 - 자유도시 출진 >

    제 27장 - 자유도시 출진

    어둠 너머로 빛이 보였다.

    밤하늘의 별빛처럼 은은한 그것은 이내 다양한 색을 발했고, 하나의 영상을 만들어냈다.

    꿈속을 거닐던 용호는 그 빛을 보았다. 자신이 지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고, 지금의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 또한 인지했다.

    카이완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와 비슷했다.

    빛을 들여다보았다. 이내 그 빛이 만들어낸 영상은 생생한 현실이 되었다.

    “엘룬 님이 날 보셨어!”

    “아니야! 날 보셨어!”

    마계의 하늘 아래 건설된 공중정원이었다. 붉고 푸른 가운데 보랏빛이 가미된 마계의 하늘은 아름답고 현란한 천장화와 같았다.

    공중정원에 서서 지상을 내려다보던 구시온은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키득거렸다. 아마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저들끼리 떠든 것이겠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크고 굵직한 쇠사슬들로 거대한 부유석을 고정시켜 만든 공중정원은 탐욕의 왕 마몬이 좋아하는 휴식처 가운데 하나였다. 부유석 아래에서 공중정원을 올려다보며 떠든 것은 공중정원을 관리하는 우드 엘프들이었다.

    “그래, 둘 중에 누굴 본 거냐?”

    구시온이 낄낄거리며 물었고, 질문의 대상이 된 여인은 눈썹을 찡그렸다.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손을 들어 자신의 눈가를 가리켰다.

    붉은 가죽 끈이 그녀의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을 엉덩이 아래까지 길게 기른 그녀는 선홍빛 옷을 입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짧고 노출도가 높았지만 목적은 여성성의 부각이 아니었다. 그녀가 이 옷을 좋아하는 것은 편하고 시원하기 때문이었다.

    드래곤과 엘프의 혼혈이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엘프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드래곤의 외형을 이어받은 것은 몸 어딘가에 자리한 역린 하나 뿐이었다.

    ‘마몬의 사역마’들 대부분이 그러했지만 그녀는 마몬 가의 존재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아마 마몬의 사역마들 가운데서 인기만은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붉은 끈으로 눈을 가린 것은 그녀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두 눈 대신 다른 것으로 세상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시답잖은 농담만 하는 이 거대한 식충이를 이번에야말로 베어버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엘룬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 아니, 정말로.”

    유쾌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남자의 것이었고, 난생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용호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영혼 그 자체가 전율함을 느꼈다.

    탐욕의 왕 마몬의 목소리였다.

    돌아보고 싶었다.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카이완의 기억을 엿보았을 때처럼 시야는 고정되어 있었고, 용호가 볼 수 있는 것은 다시 한 번 껄껄 웃는 구시온의 모습과  입술을 삐쭉이는 엘룬의 모습뿐이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몬의 것에 다른 남녀의 목소리들이 섞여 있었다. 아마도 마몬의 사역마들일 터였다.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였다. 마치 단란한 가족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삐쭉이다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무어라 한 소리를 하려던 엘룬이 돌연 고개를 돌렸다. 두 눈 대신 다른 것으로 세상을 보는 그녀는 공중정원으로 다가오는 존재를 포착했고, 구시온의 농담을 들었을 때 이상으로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녀가 오는군요. 이번에도 혼자입니다.”

    감정을 죽인다고 죽였지만 앙칼진 구석이 남아 있었다.

    구시온을 비롯한 모두가 엘룬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용호는 구시온과 같은 것을 보았다.

    여인이 공중정원 위에 올라섰다.

    붉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

    “붉은색.”

    목소리를 토함과 동시에 눈을 뜬 용호는 마몬의 공중정원 대신 침실 천장을 보았다. 뿔이 네 개가 된 뒤로는 어둠 속에서도 제법 잘 볼 수 있게 된 터라 천장의 무늬까지 구분할 수 있었다.

    카이완에 이어 마몬의 기억을 보았다.

    투기장에서 흡수한 마몬의 마력에 남아 있던 기억인 걸까?

    ‘아마도 그렇겠지만…….’

    그렇다면 어째서 포라스나 융케라스의 기억을 보는 일은 없을까. 물론 둘의 기억을 봐봐야 거북하기만 하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마몬의 피가 기억을 보는 열쇠인 걸지도.’

    작정하고 잔 게 아니라, 피곤해서 잠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든 터라 용호는 더 자는 대신 침대에서 일어섰다. 대충 세수를 해 정신을 차린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카이완이 만든 도서관은 사실상 그녀의 동생인 케이언 하나를 위한 공간이었다.

    카이완도 제법 책을 좋아하긴 했지만, 무거운 사명감을 어깨에 진 그녀에게는 느긋하게 책을 읽을 시간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카이완의 동생 사랑을 드러내듯 도서관의 가구들은 무척이나 질이 좋았다. 가구뿐만 아니라 도서관 자체에도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서 책의 상태 또한 마치 새 것과 같았다.

    용호는 책장 한 구석, 마몬의 사역마들의 관한 책을 모아둔 곳 앞에 섰다.

    마몬의 사역마들은 역사 속의 인물들이었고, 마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마왕의 사역마들답게 인기도 많았다.

    시대의 승자들은 죽은 자에 대해서는 관대하기 마련이었다.

    마몬 가가 너무나 급속히 몰락했기 때문인지 마몬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왕들은 마몬과 그 사역마들의 이야기들을 억압하거나 말소하지 않았다.

    마계에는 마몬의 사역마들을 주역으로 한 이야기들과 노래들이 많았고, 아예 그것들을 한 데 모은 책들도 몇 권이나 있었다.

    마몬 가의 후예인 케이언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의 일지에는 마몬의 사역마들에 관한 이야기가 그야말로 한 가득이었다.

    ‘이건가.’

    밤을 베는 엘룬.

    마몬의 사역마인 동시에 마몬의 양 옆을 지킨 두 명의 호위 기사 가운데 하나.

    그녀는 맹인이었지만 당대 최고 수준의 검사였고, 마계의 주민들에게 검의 마녀라 추앙받았다.

    엘룬의 이야기는 마몬의 사역마들 가운데서도 특히 많은 편이었다.

    엘룬은 아름다웠고,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검의 마녀라 추앙받을 만큼 강했다. 여기에 탐욕의 왕 마몬과의 로맨스가 더해졌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죽음.’

    마몬 사후 마몬의 사역마들은 모두 탐욕의 미궁에 봉인되지 않았다. 개중 몇은 목숨을 잃었고, 엘룬은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사역마였다.

    단지 꿈속에서 한 번 보았을 뿐인데도 아쉽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녀와 함께 있던 구시온과 바로 며칠 전에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구시온에게 물어보면 - 물론 솔직하게 답해준다는 보장 하에 -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어쨌든 전승대로라면 엘룬은 마몬의 애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불쾌함을 전면에 드러냈던 붉은 머리칼의 여인.

    얼굴은 볼 수 없었다.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칼의 인상만이 강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시트리.’

    그녀가 분명했다. 그녀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시트리가 평소 말하던 것처럼 그녀는 마몬의 사역마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마몬과는 대체 어떤 관계였을까. 마몬의 또 다른 애인이었던 것일까?

    ‘그래서 마몬 가를 주시하고 있는 건가?’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가문이라서?

    ‘이쯤하자.’

    이 이상 생각해봐야 망상만이 증폭될 뿐이었다.

    용호는 방에 가서 읽을 요량으로 엘룬에 관한 책과 아주 짤막하게나마 구시온의 이야기가 실린 책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딱 때를 맞추듯, 루시아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버그림이 제작 중이던 물품들이 완성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책을 다 고를 때까지 기다려준 모양이었다. 용호는 루시아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뒤 도서관을 나섰다. 작업장으로 향했다.

    &

    작업장에는 돌덩이처럼 서있지만 그 눈에 간절함이 묻어나는 버그림과 진짜 쇳덩이인 스컬, 미묘한 눈싸움을 펼치는 살라미와 나이트메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컬컬!”

    스컬이 전투 망치를 들어 올리며 나름 예를 표했다. 스켈레톤 메이지와 합체한 이후로는 어느 정도 예의에 눈을 떴는지 용호 앞에서는 바닥을 구르는 일이 줄어든 스컬이었다.

    살라미 역시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고, 나이트메어는 살라미에게 질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는 흉내를 냈다.

    용호는 그들 모두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례한 뒤 버그림에게 다가갔다. 말을 못하는 버그림은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작업대 위에 올려둔 물건들 가운데 하나를 용호에게 진상하듯 내밀었다.

    잘 만들어진 안장이었다.

    오필리아에게 받은 랜드 웜의 가죽과 포라스 가의 창고에 남아있던 각종 마수의 뼈와 가죽들을 재료로 한 물건이었는데, 문외한인 용호가 보기에도 무척이나 질이 좋은 상급품이었다.

    ‘진짜 손재주 좋네.’

    안장에 달린 주머니와 발걸이까지 살펴본 용호는 건네받은 안장을 스컬에게 주었다. 버그림은 연이어 살라미용으로 만든 커다란 안장을 용호에게 바쳤다.

    나이트메어와 덩치 자체는 비슷하지만 아무래도 몸 구조가 다른 터라 일반적인 안장과는 차이점이 제법 있었다. 용호는 기쁜 마음으로 안장을 들고 살라미에게 다가갔다. 살라미는 나이트메어를 한 번 슥 돌아보더니 보란 듯이 날개를 눕힌 뒤 바닥에 엎드렸다.

    그 모습에 나이트메어 역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컬에게 등을 내주었다. 용호가 모르는 사이에 서로 라이벌이 된 모양이었다.

    확실히 안장을 달고 나자 탑승감 자체가 달라졌다. 등에 손잡이까지 있는 살라미였던 터라 이제 아무리 빨리 날아도 떨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문제는 진화 후인데 말이지.’

    강습형으로 진화하면 지금보다 더 덩치가 커지는 살라미였다. 어쩌면 진화할 때마다 새 안장을 맞춰야 할지도 몰랐다.

    스컬 역시 안장을 얹은 나이트메어 위에 올라탔다. 전신이 쇳덩이인 터라 무게가 상당한 스컬이 올라탔음에도 나이트메어는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살라미 앞이라고 그냥 참고 있는 건가…….’

    나이트메어를 위해서라도 스컬의 다음 합체 진화를 모색해야 할 것 같았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티타늄이었지만 과연 티타늄 골렘이 존재할지 의문이었다. 오리하르콘이나 미스릴 같은 속칭 신의 금속들을 찾는 게 빠를 것 같았다.

    살라미의 등에서 내려온 용호는 다시 버그림에게 시선을 주었다. 목소리를 내지 못해서 그렇지, 카이완처럼 이미 눈으로 많은 말을 하고 있는 버그림이었다.

    루시아가 약간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일이 없을 때는 훈련장에서 허수아비를 두드릴 정도로 열성입니다.]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진화 숙련치를 쌓아야 한다는 사실을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진화 숙련치는 용호에게만 보이는 것이었다. 버그림 입장에서는 그저 죽어라 일하고 훈련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는지 진화 숙련치가 꽉 차 있었다. 용호는 지체 없이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고, 버그림의 두툼한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마력 특화 진화 1/2]

    초록빛 섬광이 일었지만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용호는 다소 불안한 눈으로 버그림을 보았고, 눈을 꽉 감고 있던 버그림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스스로를 돌아보다가 이내 실망을 드러냈다. 하지만 짧았다. 마력이 완전히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몸 상태가 훨씬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용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버그림에게 말했다.

    “앞으로 한 번 정도 더 치료를 하면 성과가 있을 거다. 하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마라.”

    버그림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을 보니 무리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리 같았다.

    ‘기대되는데.’

    마력을 쓰지 못하는 지금도 이렇게나 멋진 안장을 만들어낸 버그림이었다. 그가 마력을 다시 회복하게 되면 얼마나 굉장한 마법 장비들을 만들어낼까. 무기도 무기였지만 방어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마법 갑옷 같은 것 말이다.

    버그림에게 다시 한 번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한 용호는 스컬과 더불어 작업장을 나섰다.

    던전 통로에 선 용호는 잠시 망설였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푹 쉬는 것이었다. 내일 아침에 투기장 2층에 도전할 예정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트리에게서 구시온을 비롯한 마몬의 사역마들과 투기장에 대해 묻고 싶었다. 카이완이 투기장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었는지도 궁금했다.

    일단 어느 쪽이든 마왕의 방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용호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막 목욕탕 앞을 지나칠 때 즈음이었다.

    [주인님, 던전 미어 캣들의 보고입니다.]

    [부외 사역마 오필리아가 빠른 속도로 던전에 접근 중입니다. 평소처럼 말을 타지 않고 비행형 마수를 타고 있습니다.]

    [무척이나 급한 일인 것 같습니다.]

    오필리아의 마몬 가 방문은 언제나 비밀스러웠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중간에 공수한 것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비행형 마수를 타고 날아왔다는 것일 터였고, 이는 무척이나 눈에 띄는 행동이었다.

    분명 어제 통신기로 나눈 대화대로라면 오필리아는 오늘이 아니라 이틀 뒤에 마몬 가를 방문했어야 했다.

    무슨 일인 걸까. 설마 예속 사역마가 하루라도 빨리 되고 싶어 서두르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 분명했다.

    “루시아, 엘리고스와 카타리나… 그리고 리쿰을 던전 입구 방으로 불러줘. 오필리아를 마중 나간다.”

    [알겠습니다.]

    용호는 바로 살라미의 등에 올랐고, 스컬 역시 나이트메어에 올라탔다. 각자 주인을 태운 두 마리 마수는 경쟁하듯 던전 입구 방을 향해 달렸다.

    &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가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큰일입니다.”

    < 제 27장 - 자유도시 출진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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