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79화 (79/227)
  • < 제 25장 #2 >

    &

    아몬과 구시온이 용호를 볼 때 용호 역시 두 사람을 보았다.

    용호는 시선을 돌렸다. 관중석에서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이 폴짝폴짝 좋아하는 카타리나에게 웃어주었고, 그 너머 조금 더 먼 곳을 보았다.

    관중석에 모여 있는 이름 모를 사역마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한 구석에 카이완이 자리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 표정까지 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애틋함은 분명히 전해졌다.

    소리치면 목소리가 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용호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의 카이완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동생은 이미 병으로 죽었다고? 사랑하는 누이가 이뤄낸 모든 것들을 상실했다는 사실에 죽을 때까지 슬퍼하고 괴로워했다고?

    언젠가는 알려주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용호는 다시 돌아섰다. 강철 소의 시신은 빛이 되어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는 또 다른 빛 무더기가 남아 있었다.

    이전 불꽃의 진과 싸웠을 때 본 뒤틀림과 닮아 있었다.

    순수한 마력의 덩어리.

    마몬의 투기장이 후대에게 제공하는 것은 전투 경험과 각종 아티펙트들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플로어 마스터를 쓰러트리고 얻을 수 있는 이 정수야 말로 진정한 보상일지 몰랐다.

    용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왼손을 뻗었다. 천천히 소용돌이치던 색색의 마력이 용호의 손에 빨려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정수흡수와 같았다.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압도적인 쾌감.

    마력이 확장되는 느낌.

    하지만 어느 순간 용호는 직감했다.

    지금까지의 정수들과 달랐다. 탐욕뿐만 아니라 용호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마몬의 마력!’

    용호 자신이나 카이완의 마력에 섞여 있는, 지울 수 없는 왕의 흔적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로 마몬의 마력 그 자체였다.

    깨달음과 동시에 더욱 거대한 쾌락이 밀려왔다. 그 순수함과 강렬함에 영혼이 전율했다.

    시조의 힘.

    마몬 가 마왕들의 근원이 되는 가장 위대한 힘의 조각.

    순수한 마력의 양만을 논한다면 포라스를 쓰러트렸을 때 얻은 마력보다도 오히려 적었다. 하지만 효율이 달랐다. 용호의 모든 것이 마몬의 힘에 반응했고, 놀라울 정도의 상승효과를 이루어냈다.

    카이완은 분명 천재였다. 동시에 그녀는 엄청난 노력가이기도 했다.

    허나 그렇다 할지라도 그녀는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로도 강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녀를 그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수수께끼가 지금 풀렸다. 마몬의 투기장이 그녀를 강하게 만들었다. 시조 마몬의 힘이 그녀를 각성시켰다.

    그리고 용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몬의 힘에 전율한 그 순간, 다시금 눈을 뜨는 능력이 있었다.

    용호의 두 눈에서 초록빛 귀화가 피어올랐다. 포라스 전 이후 쌓아올린 경험들이 소리쳤다.

    진화하라.

    진보하라.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라!

    구시온을 비롯해 모두가 보는 앞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더는 자신을 자제할 수 없었다. 육신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난 탐욕이 소용돌이 쳤다. 진화의 권능이 절로 그 힘을 발하였다.

    [마력 특화 진화]

    용호의 전신에서 빛이 일었다. 녹염이 용호의 육신을 뒤덮었고, 크게 피어올랐다.

    사역마들이 당황했다. 용호에게 예속된 카타리나조차도 진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다른 이였다.

    구시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멍청한 얼굴로 용호를 보았다. 뒤돌아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비명처럼 소리쳐 물었다.

    “설마, 설마 진화의 권능인 것이냐?!”

    아몬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구시온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눈앞에 주어진 것과 같았다.

    용호가 포효했다.

    녹색의 불꽃이 순간 크게 타올랐고, 이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용호의 이마에 돋아나 있던 세 번째 뿔이 사라졌다. 귀 바로 위, 이미 자리하고 있던 두 개의 뿔 위로 각기 하나씩 새로운 뿔이 돋아났다.

    네 번째 뿔.

    뿔의 개수는 곧 마력의 강력함을 의미할지어니.

    용호는 마력의 그릇을 넓히지 않았다. 부수고 새로운 마력의 그릇을 만들었다. 더 크고 넓었고, 더 강인한 마력이 그 안을 채웠다.

    변모는 용호에게만 일어나지 않았다.

    마족에게 있어 뿔이 하나 늘어난다는 것은 그야말로 존재 개인에게 있어 혁명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카타리나의 전신에서부터 검은 마력이 분출되었다. 그림자와 같은 그것이 카타리나의 전신을 에워쌌다. 그 속에서 카타리나는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그것은 이내 환희의 외침이 되었다.

    카타리나의 오른쪽 귀 위에 있던 뿔 위로 새로운 뿔이 돋아났다. 세 번째 뿔이었다. 예속 사역마인 그녀는 용호의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용호의- 왕의 등을 따르기 위해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갔다.

    카타리나를 에워쌌던 그림자들이 사라졌다. 전신이 땀으로 뒤덮인 카타리나는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숨을 헐떡이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지친 그녀였지만 얼굴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용호와 카타리나의 변모는 거의 동시에 일어났고, 끝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용호는 숨을 크게 골랐다. 눈을 감고 진화를 만끽했다.

    네 번째 뿔이 생겨남에 따라 마력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육체 능력 역시 크게 강화되었다.

    카타리나의 변모 역시 느꼈다. 마몬의 투기장 밖에 있는 엘리고스와 스컬의 변화까지는 인지할 수 없었지만 관중석에 자리한 카타리나의 진화를 목격한 것으로 충분했다.

    숨을 가다듬은 용호가 다시 눈을 뜨자 빛으로 된 상자 두 개가 보였다.

    처음 전투에 임하기 전에 약속되었던 양자택일의 보상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용호가 어느 하나를 고르기도 전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났다. 빛의 상자들 옆에 새로운 빛의 상자 하나가 생성되었다.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루시아에게 질문을 던지려던 용호는 입을 다물었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감각이 구시온의 접근을 알렸다.

    관중석 한가운데 위치한 특별석에서 도약한 구시온이 용호 바로 앞에 착지했다. 어마어마한 덩치의 구시온이 수십 미터 거리를 가로질러 착지한 터라 그 충격을 흡수하지 못한 경기장 전체가 진감했다.

    구시온은 용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리에서 착지한 자리에서 일어섰다. 용호는 마찬가지로 구시온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분명 강렬했다. 하지만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것과는 달랐다.

    위압감의 질이 달랐다. 눈빛에 어려 있는 감정 역시 변화했다.

    구시온은 그대로 말없이 용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축하한다. 1층을 격파했다. 첫 도전으로 1층을 격파한 도전자는 참으로 오랜만이군.”

    충분히 호의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용호는 그 안에 담긴, 여전히 시험하고자 하는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용호는 구시온이 무언가 스스로 자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1층을 격파했으니 1층 격파 보상을 받아야 하겠지. 본래는 빛의 상자 두 개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것이지만 특별히 하나를 더 추가했다. 셋 중 하나를 골라라. 꽝 같은 당첨은 있어도 진짜 꽝은 없으니 부담 없이 골라도 된다.”

    결국 상자 내용물 사이에 우열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잘 선택하는 게 좋-.”

    “이걸로 하지.”

    구시온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호가 대뜸 빛의 상자 하나를 선택했다.

    결코 충동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탐욕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떤 것이 가장 용호에게 가치 있는 것인지.

    어떤 것이 가장 용호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는 것인지.

    용호의 눈빛에서 조금의 망설임도 찾지 못한 구시온은 어느새 자신의 곁에 자리한 홍련의 불길을 돌아보았다. 아몬은 이번에도 딱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시온은 이해했다.

    “탐욕.”

    그것이 힘을 발하고 있었다. 용호의 안에서 용호의 의지에 따라 그 가진 바 권능을 일부나마 발휘하고 있었다.

    홍련의 마창 아몬이 선택한 어린 주인.

    “깜짝 선물이군. 그야말로 깜짝 선물이야.”

    작게 중얼거린 구시온은 두 팔을 벌렸다. 어서 열어보라는 듯한 그 몸짓에 용호는 상자를 향해 뻗은 왼손을 통해 마력을 발했다.

    빛으로 된 상자가 부서져 흩어졌고, 그 안에 담겨 있던 내용물이 용호의 왼손에 놓였다.

    [스켈레톤 메이지 스크롤]

    용호에게 선택받지 못한 남은 두 상자 역시 빛이 되어 사라졌다. 사라지기 전에 잠시나마 그 안에 담겨 있던 것들이 보였는데, 하나는 금이었고 다른 하나는 마법이 깃든 단검이었다.

    “스켈레톤 메이지 한 마리를 소환할 수 있는 스크롤이다. 마력을 주입해서 찢으면 된다. 어떤 속성의 스켈레톤이 나올 지는 네 운이지만 말이야.”

    구시온이 짧게 설명했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마법 단검보다도 이 스크롤이 더 가치 있게 느껴졌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 머릿속에 스켈레톤 메이지를 어떻게 사용할 지가 떠올랐다.

    “어떠냐, 바로 2층에 도전할 거냐?”

    구시온이 물었다. 용호는 탐욕이 다시 한 번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마몬의 마력을 다시 한 번 취하고 싶다고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용호는 스스로를 자제했다.

    마력을 너무 많이 소진했다. 진화로 인해 그릇이 넓어지고 약간의 마력을 회복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았다. 더욱이 카타리나 또한 갑작스런 세 번째 뿔의 출현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투기장의 플로어 마스터들은 결코 녹록한 상대들이 아니었다. 충동적인 도전은 화만 부를 뿐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다시 시선을 멀리했다. 이미 생각을 정했음에도 망설임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은 카이완 때문이었다.

    [서두르지 마라, 어린 주인이여.]

    [지금 그대가 가진 힘으로는 저 아이를 구할 수 없다.]

    아몬이 나직한 목소리로 용호를 타일렀다. 용호의 머릿속에서 울린 목소리였기에 구시온은 들을 수 없었다.

    카이완이 애타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구해달라는 얼굴이 아니었다. 동생의 소식을 전해달라는, 무엇이라도 좋으니 알려달라는 얼굴이었다.

    용호는 눈을 감아 그녀를 외면했다. 마음 깊이 다음을 약속하며 구시온을 돌아보았다.

    “아니, 다음에 다시 오도록 하지.”

    “얼마든지. 마몬 나리와 나 구시온의 투기장은 늘 그대를 환영할 것이다.”

    용호를 경기장으로 안내했던 짐승 가면의 사내가 어느새 용호의 앞에 자리했다. 구시온에게 예를 표한 그는 다시 한 번 용호를 인도했고, 용호는 구시온을 지나쳐 반쯤 실신한 카타리나에게 향했다.

    구시온이 돌아서서 그런 용호의 등을 보았다.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듯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작아.”

    아직 그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마천루의 계단을 오르던, 마몬의 사역마 모두를 이끌던 위대한 왕의 등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닮았군. 아주 약간이지만. 아주아주 약간이지만 말이야.”

    이제 겨우 1층을 통과했을 뿐이었다. 아직 미약하고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구시온의 작은 고집에 아몬은 작게 미소지었다. 분리된 의식을 통해 바라보았다.

    아몬 역시 구시온과 마찬가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의 최후.

    그가 선택했던 마지막 길.

    모두를 이끌던 그의 뒷모습.

    홍련의 마창 아몬은 불길을 사르며 나아갔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보았다. 다시 한 번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옛날 그러했던 것처럼.

    왕의 등을 따라.

    바람이 불었다.

    홍련의 불꽃이 타올랐다.

    제 25장 - 홍련의 마창 아몬 끝, 제 26장 - 천둥으로 이어집니다.

    < 제 2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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