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4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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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강렬한 감정이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카이완은 용호가 그녀의 동생- 전전대 가주 케이언의 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혹시나 케이언의 후손이 아닐까. 아들은 아니더라도 손자라거나 증손자는 아닐까.
하다못해 케이언의 소식을 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면서도 말을 하지 못했다. 입 밖으로 쏟아내고 싶은 것은 감정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무 말도 토하지 못했다.
초조함과 조급함 속에서도 스스로를 자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말을 허락받지 못했다. 카이완의 입술은 경련할 뿐 크게 벌어지지 않았다. 용호는 알 수 있었다.
구시온.
그가 카이완을 지배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대강 그려지는 구도는 있었다.
어째서 죽었다고 알려진 카이완이 살아있는지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구시온의 시선은 여전히 용호에게 향해 있었다. 차가웠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호보다는 불호에 가까웠다.
용호는 구시온에게 반발심을 느꼈다.
충동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아마도 카이완 때문일 터였다.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화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용호는 늘 카이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처지에서 연민을 느꼈고, 동생을 아끼는 그녀의 마음에서 따스함을 느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지만, 그런 카이완을 억압하는 구시온에게 좋은 감정이 생길 리 만무했다.
“케이언은 전전대 가주의 이름입니다. 카이완 당신이 실종되고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용호가 말했다.
카이완의 눈빛에 더욱 강렬한 감정이 실렸다. 그녀는 동생의 소식에 헐떡였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원했다.
그리고 용호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이완은 기대하고 있었다.
카이완은 실종되던 당시에 스무 살 남짓에 불과했다. 그녀의 동생인 케이언은 십대였고, 수십 년 세월이 지났다 해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와 재회할 수 있지 않을까?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눌 수 없는 마당에 섣불리 케이언의 죽음을 언급할 수 없었다.
카이완이 갈망했다. 어느새 창백한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표독스런 눈매에는 불쌍할 정도로 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전대 가주도 아니고 전전대 가주다.
통상적으로 본다면 불의의 사고든 요절이든 전전대 가주는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이완은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떠올리고도 무시하는 것에 가까울 터였다.
카이완의 시선이 용호의 손가락을 향했다. 그녀가 동생에게 남겼던 반지.
왜곡의 권능이 담겨 있는 기물.
네가 케이언의 후계자구나.
혹시 손자이거나 그런 거니? 네게 케이언의 피가 흐르는 거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마 마주하기 괴로울 정도로 절절한 감정이었다.
말해줘. 말해줘.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말해줘!
소리 없는 절규였다. 그리고 그것은 완벽히 차단되었다. 구시온이 손을 한 번 그 순간 어둠이 카이완을 뒤덮었다. 어둠의 장막이 카이완이 있던 장소를 가려버렸다.
용호가 구시온을 노려보았다. 구시온은 그런 용호의 시선을 즐겼다. 마치 자신에게 적대하는 용호를 보는 것이 즐겁다는 듯이, 어서 덤벼보라는 것 같은 얼굴로 마주했다.
“문지기의 무례함이 너무 했던 것 같군. 그저 수하들을 시켜 데려가라 한 것뿐이니 그쯤 하시지. 한 대 칠 것 같은 눈빛이야.”
[구시온.]
아몬이 낮은 목소리를 토했다. 은은한 분노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구시온은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 키득 웃었다.
“존대는 첫 인사 한 번으로 족해. 그것도 아몬 네놈의 얼굴을 봐서 해준 것에 불과하다. 탐욕을 가졌다 하여 이 꼬맹이가 마몬 나리인 것은 아니야. 마몬 가의 가주라 하여 나의 주인인 것 역시 아니지. 나는 네놈의 말마따나 ‘마몬의 사역마’다. 내 주인은 마몬 나리 오직 한 분뿐이시다.”
뒤로 갈수록 표정이 매서워졌다. 마지막은 거의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이곳은 투기장이다. 그리고 나는 투기장의 관리인 구시온이다. 이곳에는 투기장의 규칙이 있고, 그 규칙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마몬 나리뿐이시다. 그러니 규칙을 준수해라.”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구시온이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무지막지한 거대함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아몬이 불길을 일으켜 그런 구시온의 압박감으로부터 용호와 카타리나를 지켰지만 역부족이었다.
카타리나는 온 몸에서 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였고, 용호 역시 이를 악물고 녹염을 일으켜야만 했다.
구시온의 얼굴에 다시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스스로를 퇴보시켰구나, 아몬. 껍데기 가문의 가주에게 맞춰주기 위함이었나? 마몬 나리의 힘이 충만한 이곳에서도 고작 그 정도 힘을 발하는 것이 전부라니, 네 라이벌로서 안타깝구나.”
[그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나의 어린 주인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구시온. 네가 말했던 것처럼 투기장의 규칙을 준수해라. 네놈이 마주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탐욕의 왕을 마주하라.]
“변함없이 모범생이시군.”
어깨를 으쓱인 구시온은 힘을 거두었다. 위에서 찍어 누르던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그 공백이 다시 한 번 카타리나와 용호를 덮쳤다. 용호는 똑바로 서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카타리나는 허리를 단단히 감싸 쥔 용호의 팔에 겨우 매달린 형국이었다.
“탐욕의 왕, 아몬의 어린 주인아. 다시 한 번 소개하지. 마몬 나리의 투기장을 관리하는 구시온이다. 마몬의 사역마 가운데 최강이라 하면 단연 이 몸을 가리키는 것이지.”
구시온이 용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른팔로 카타리나를 지탱하고 있는 용호를 배려한 것인지, 아니면 본래 왼손잡이인지 왼손을 내밀었다. 용호는 구시온의 시선을 마주하며 마찬가지로 왼손을 내밀었다.
투박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사람 손이 아니라 단단한 바위를 만진 느낌이었다.
“주인에게 의존하는 호위 기사라니, 아무리 껍데기 가문이라지만 마몬 가도 몰락했군.”
작은 중얼거림에 카타리나가 흠칫했다.
용호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노여움이 일자 구시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렇게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좀 그렇군. 아몬 말마따나 투기장의 규칙을 따라야겠지. 안으로 들겠나?”
투기장은 위험했다.
눈앞의 구시온이란 자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도발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카이완에 대해 알고 싶었고, 구시온이 말하는 투기장의 규칙이 무엇인지 역시 알고 싶었다.
[어린 주인이여, 그는 결코 당신을 직접적으로 해하지 못한다. 두려워마라. 그대는 탐욕의 왕이고, 이 아몬이 그대와 함께 한다.]
오직 용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였다.
구시온이 말했던 것처럼 이 투기장 안에는 마몬의 힘이 충만했다. 그렇기에 평소에는 용호와 이렇다 할 대화도 나눌 수 없는 아몬이 어느 정도 힘을 발할 수 있었다.
용호 안에서 탐욕이 눈을 떴다. 불꽃처럼 일어난 그것은 용호에게 전진하라 말했다.
“함께 하겠습니다.”
카타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용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섰다.
구시온이 그런 카타리나를 눈빛으로 비웃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노여움을 느꼈다.
아몬이 그런 용호를 다독였다. 뒤를 받쳐주었고, 힘을 실어주었다.
카타리나 또한 아몬의 비호가 없음에도 똑바로 서서 구시온의 시선을 마주했다.
예속 사역마 카타리나의 결의와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녀는 스스로가 모욕당하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오직 용호를 위해, 자신의 주인의 명예를 위해 구시온이란 거인 앞에서 사력을 다해 버텼다.
그렇기에 용호는 분노를 다스렸다. 이성을 잃는 대신 분노의 폭발력만을 품은 채 구시온에게 말했다.
“안내해라, 구시온. 투기장의 규칙을 설명해라.”
“얼마든지. 이쪽이다.”
빙글 돌아선 구시온이 앞장서서 걸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돌아서기 직전에 지은 미소에는 기꺼움과 호의가 어려 있었다.
구시온이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천장에서 빛이 쏟아져 어두운 복도가 밝아졌다. 구시온이 말했다.
“이곳은 마몬 님께서 후대의 육성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남기신 투기장이다. 뭐, 반쯤은 여흥이 아니었나 싶지만 말이다.”
후대를 위해서라는 말은 얼추 이해가 갔다. 하지만 구시온을 위해서라니?
“투기장에는 이 몸을 비롯해 수많은 사역마들이 존재한다. ‘껍데기 마몬 가’와 별도로 존재하는 이곳에는 수많은 층이 존재하고, 각 층에는 그 층을 담당하는 사역마들이 있지. 난 그들을 플로어 마스터라고 부른다.”
카이완의 일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용호는 구시온의 말을 분석했다. ‘껍데기 마몬 가’라 함은 탐욕의 미궁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1층에서만 머물러야 했던 마몬의 후예들을 비꼬는 것일 터였다.
‘어쩌면 문자 그대로의 껍데기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시트리에게 처음 탐욕의 미궁에 대해 들었을 때부터 생각했던 것이었다.
어쩌면 마몬 가에는 ‘두 개의 던전’이 있는 것은 아닐까?
탐욕의 미궁과 그 위에 존재하는, 탐욕의 미궁을 가리기 위한 던전.
구시온의 설명이 이어졌다.
“투기장의 룰은 단순하다. 도전자는 각 층을 담당하는 플로어 마스터에게 도전한다. 승리하면 마몬 나리께서 준비해두신 적절한 보상을 얻을 수 있고, 패배하면 역시나 적절한 벌칙이 주어지지. 벌칙은 층마다 다르다. 뭐- 애당초 ‘후대를 위해’ 마몬 나리께서 건설하신 시설인 만큼 대부분의 층은 그 벌칙이 별거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층들도 존재하지.”
카이완의 얼굴이 떠올랐다.
투기장을 통해 마몬 가를 강화시키던 그녀는 어느 날 실종되었고, 지금은 투기장에서 투기장의 관리인인 구시온의 통제를 받으며 노예처럼 부림당하고 있었다.
벌칙의 결과임이 분명했다.
“가주가 아니더라도 투기장에 도전할 수 있다. 이를 테면 호위 기사라든가, 집사장이라든가 그냥 사역마라든가- 까놓고 말해 누구든 상관 없다는 말이지. 보상 역시 가주와 똑같이 주어진다. 하지만 벌칙은 훨씬 더 크지. 몇 번이나 말했지만 이곳은 마몬 나리의 후대를 위해 건설된 장소이니까 말이야. 얻는 것이 큰 만큼 위험 역시 커야 이치에 맞는 법이지.”
구시온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두컴컴한 복도를 지나자 가슴이 시원해질 정도로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을 보는 것 같았다. 수천 명을 족히 수용할 수 있는 넓은 관객석 아래에는 원형의 경기장이 자리했다.
실내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구시온은 바람을 등지고 돌아섰다. 용호를 마주하며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투기장의 마지막 규칙. 마몬 나리께서 그 분의 후대와 이 몸 모두를 위해 남겨주신 규칙. 투기장의 모든 층을 정복한 자는 투기장의 주인이 된다. 이 괴력의 구시온을 비롯한 투기장의 모든 사역마들을 그 휘하에 둘 수 있다.”
다시 한 번 거친 바람이 불었다. 구시온의 얼굴에 시원한 미소가 어렸다.
“아몬의 어린 주인아. 카이완에 대해 알고 싶나? 그녀를 해방시키고 싶나? 이 구시온을 무릎 꿇게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투기장을 정복해라. 마몬 나리에 이어 이 몸의 주인이 되어 보아라. 네 놈이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소리 내어 웃었다. 동시에 굉음이 일더니 복도의 문이 닫혔다.
“투기장의 규칙 또 한 가지. 투기장에 들어온 자는 그냥 나갈 수 없다. 반드시 하나의 층 이상에 도전해야만 한다. 동행이 있을 경우에는 한 명만 도전해도 괜찮다.”
구시온이 용호를 내려다보았다. 용호는 대답 하는 대신 오른팔을 들어 녹염을 일으켰다. 용호의 손목에 감겨 있던 아몬이 불꽃의 창으로 화해 용호의 오른손에 쥐어졌다.
구시온이 웃었다. 그 눈빛에는 이제 도발 따위가 아닌 진실 된 즐거움이 어렸다. 한참을 소리 내어 웃었다.
“도전은 성립되었다. 투기장에 온 것을 환영한다, 탐욕의 왕이여.”
마몬의 투기장.
1층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 24장 - 마몬의 투기장 끝, 제 25장 - 홍련의 마창 아몬으로 이어집니다.
< 제 24장 #3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