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76화 (76/227)
  • < 제 24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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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급 수련장을 지나 던전 안쪽에 자리한 시설들 가운데 중요한 곳이라면 도서관과 마법 연구실 정도를 꼽을 수 있었다.

    카이완의 도서관은 사실 꽤 초라한 편에 속했다. 서책의 종류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 하나하나가 잘 보관되어 있었다. 무척이나 소중하게 책을 다뤘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책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만 가득인 마몬 가인 터라 도서관을 이용하는 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용하고 싶은 이는 신청을 하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신청자는 엘리고스가 유일했고, 엘리고스가 탐독한 책은 요리책이었다.

    3대 전 가주 카이완과 그 동생인 전전대 가주의 향취가 가득 묻어 있는 도서관을 지나자 마법 연구실이 나왔다.

    마법 연구실은 거의 훈련장만큼이나 넓었다. 연구실 절반 정도는 아예 공터였는데, 아무래도 마법을 실험해보기 위한 공간인 것 같았다.

    루시아의 설명에 따르면 마법 연구실에서 각종 마법 연구를 진행할 수 있다는 것 같았지만-

    ‘할 사람이 없지. 사람이.’

    현재 마몬 가의 사역마들 가운데 오필리아가 그나마 마법에 능하긴 했지만 오필리아는 레드 데몬이었다. 지금 수준의 마법을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기에 그 이상을 바라기는 힘들었다.

    다시 한 번 마법사의 부재를 느끼는 용호였다. 다음에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하면 꼭 마법사를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미련 없이 마법 연구실을 나온 용호는 일단 걸음을 한 번 멈췄다. 카이완이 1층의 80% 가량을 개척하기는 했지만 그 80%를 빠짐없이 채워 넣은 것은 아니었다. 용호가 던전 전반부에 새로운 시설 설치를 고려해 듬성듬성 빈 공간을 만들어둔 것처럼 카이완의 1층 청사진에도 빈 공간이 더러 있었다.

    ‘남은 20%와 이어지는 곳.’

    허공에 펼친 던전 현황도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용호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아침이라 그런지 카타리나가 열심히 아침잠과 싸우고 있었다.

    “카타리나.”

    “어, 으, 예 가주님. 안 졸았습니다. 안 졸았어요. 진짜로……”

    마지막에 가서는 거의 쥐구멍에 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용호 역시 카타리나가 졸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머리만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카타리나는 대체 어쩌다가 마몬 가의 사역마, 그것도 호위 기사가 된 것일까?

    그야말로 문득 든 의문이었다.

    마왕과 그 예속 사역마인 만큼 용호와 카타리나의 관계는 돈독했다. 하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적었다.

    ‘잠도 깰 겸, 환기도 할 겸 물어볼까?’

    잠깐 망설이던 용호는 이내 마음을 정했다. 최대한 가볍게, 마치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그러고보니 카타리나는 어쩌다가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된 거야?”

    의도와 달리 꽤나 돌직구였다. 카타리나는 귀를 한 번 파닥이다가 푸근한 얼굴이 되어 답했다.

    “자유도시에 버려져 있던 것을 전대 호위 기사가 거둬주었습니다.”

    씁쓸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카타리나의 얼굴에는 어둠이 없었다. 진한 애정과 그리움을 담아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무척이나 어렸을 때지만 그래도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된 첫 날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떠돌이 고아였던 제게는 처음 생긴 집이었죠. 말 주변이 없어서 잘 표현은 못하겠지만… 저는 마몬 가가 참 좋습니다. 참 좋아요. 물론 가주 님도 좋고요.”

    활짝 웃으며 말을 끝낸 카타리나는 이내 맹렬한 속도로 당황하기 시작했다. 본인이 표현한 대로 다소 엉망인 이야기도 이야기였지만, 마지막에 입에 담은 말 때문이었다.

    그리고 용호 역시 카타리나만큼이나 당황했다. 이유는 보다 직접적이고 단순했다.

    ‘처, 처음이야.’

    남중, 남고, 공대라는 기적의 테크트리를 탄 용호였다. 또래 - 적어도 외형상으로는 - 여자에게 ‘좋다’는 말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먼저 냉정을 찾은 것은 용호였다. 공대생답게 생각했다.

    ‘좋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

    카타리나는 마몬 가도, 엘리고스도 좋아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카타리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시 이동할까?”

    “네, 가주 님.”

    어쩐지 모르게 귀를 살짝 늘어트린 카타리나가 짐짓 힘찬 어조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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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층의 나머지 20%는 단순히 비활성화 된 공간이 아니었다. 꽉 막힌 진짜 벽이 대부분이었고, 때문에 통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마력과 시간을 투자해야만 했다.

    용호는 카이완이 사역마들에게 투기장을 비밀로 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비밀통로라는 것에 ‘절대’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가다보면 우연히 발견될 수 있는 것이 비밀통로였다.

    사람의 접근이 별로 없는 곳. 사실상 카이완만이 오가는 곳. 그러면서도 남은 20%의 공백과 가까운 곳.

    도서관은 일단 제외였다. 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카이완이 동생의 성이라 할 수 있을 도서관에 투기장과 이어지는 통로를 만들어둘 것 같지는 않았다.

    용호는 걸었다. 던전 깊은 곳에 자리한 카이완의 개인 휴게실에 들어섰고, 용호의 침실보다 약간 더 큰 그 방에서 탐욕의 힘을 발동시켰다.

    원하는 것. 바라는 것. 갈망하는 것.

    마음을 기울였다. 용호의 전신에서부터 불꽃처럼 일어난 탐욕은 수십, 수백 갈래로 나뉘어져 방 안의 모든 것들을 휘감았다.

    용호는 그것들을 하나로 모았다. 카타리나를 휘감고 있던 갈래를 중심으로 하나가 된 탐욕은 이내 어느 한 방향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불현듯 처음 아몬을 마주했을 때가 떠올랐다.

    용호는 탐욕을 따라 걸었고, 달을 삼키는 늑대의 문장이 양각된 벽 위에 손을 올렸다. 자연스럽게 마력을, 마몬 가의 피에 각인된 힘을 일깨웠다.

    ‘비밀통로.’

    마치 클리셰라도 되듯이 문장 바로 옆의 벽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탐욕의 인도가 계속되었다. 마른 침을 한 차례 삼킨 용호는 카타리나를 돌아보았고, 카타리나는 재빨리 허리춤에서 조명 장치를 꺼내 용호에게 내밀었다.

    “내가 앞장설게.”

    자신 몫의 조명 장치를 새로 꺼내는 카타리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둠 속에서도 볼 수 있는 카타리나였지만 탐욕의 인도를 받는 용호 자신이 앞서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었다.

    호위 기사라는 직위 때문인지 카타리나가 잠시 망설였지만 그래도 이내 용호의 뜻을 따랐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었다.

    차가운 어둠은 빛과 소리를 집어삼켰고,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깊은 침묵이 용호와 카타리나를 압박했다.

    용호는 계속해서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멈춰 섰다. 통로의 끝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연결이 끊어졌어.’

    항시 연결되어 있던 루시아가 느껴지지 않았다. 던전 안에 있음에도 마치 던전 밖에 나가 있는 것 같았다.

    용호는 위화감을 느꼈다. 과연 루시아와 연결이 끊어진 것은 언제였을까. 어쩌면 통로에 들어온 직후에 이미 연결이 끊어졌던 것은 아닐까?

    ‘아몬을 얻었을 때.’

    그때 역시 루시아와의 연결이 끊어졌었다. 용호는 직감했다. 이 통로는 루시아의 통제 범위 밖에 존재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용호는 탐욕의 인도를 계속해서 따랐다. 그리고 얼마나 나아갔을까. 시간의 흐름이 어둠에 녹아들었다. 용호는 자신이 과연 얼마나 오랫동안 통로를 걸었는지 인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길을 인도하던 탐욕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어둠 속에 있음에도 용호는 커다란 문 하나를 볼 수 있었다.

    세상 위에 군림하는 용의 문장.

    손을 뻗지 않았음에도 문이 열렸다. 빛이 어둠을 집어삼켰다.

    “마몬 가의 투기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목소리에 의식을 차렸다. 약간은 낮고 거친 여인의 목소리였다.

    돌로 만든 어두운 복도였다. 비밀 통로보다 훨씬 넓어서 장정 네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걸어도 될 것 같았다.

    용호는 숨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고 들어왔으니 응당 뒤에 문이 있어야 했지만 문 대신 쭉 뻗은 통로가 있을 뿐이었다.

    카타리나는 경계심을 잔뜩 드러낸 채 정면을 보았다. 용호 역시 정면에 선 여인을 보았다.

    커다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인이었다. 얼굴에는 아무런 모양 없는 회색 가면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몸에 제법 달라붙는 로브에 드러난 곡선이 아니었다면 여자라는 것도 알아보지 못했을 터였다.

    용호에게 공손히 예를 표한 여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마몬 가의 투기장’이란 말에 긴장한 용호를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돌연 용호와의 거리를 할 걸음 좁혔다. 아까보다 좀 더 낮고 은밀한 목소리를 토했다.

    “투기장을 찾으신 분이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여인이 다가서는 순간 카타리나가 반응했다. 용호는 손을 뻗어 그런 카타리나를 제지한 뒤 여인의 가면을 마주하며 말했다.

    “천용호. 마몬 가의 새로운 가주다. 아버지의 함자는 천 도자 일자시다.”

    용호의 대답에 여인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착각일수도 있지만 용호는 여인에게서 당황과 실망을 느꼈다.

    어째서-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도 전에 여인이 다시 거리를 좁혔다. 약간의 조급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이름은-”

    “그 정도로 하지.”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무척이나 커다란 손이 용호와 여인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야말로 갑작스런, 아무런 기척이나 소리 없는 등장이었기에 소스라치게 놀란 카타리나가 무기를 뽑아들었다. 용호 역시 뒤로 크게 물러섰다.

    새로운 목소리는 검은 정장을 입은 거한이었다. 붉은 피부와 이마에 황소처럼 돋아난 두 개의 뿔, 길고 붉은 꼬리에서 용호는 오필리아와 엘리고스를 떠올렸다.

    거칠게 자란 수염을 쓰다듬으며 용호를 내려다보던 거한은 빙그레 웃었다.

    “수하의 무례를 용서해주게. 나는 투기장의 관리인인 구시온이네.”

    인사를 받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용호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그러지 못했다. 거한- 구시온의 등 뒤에서 여전히 조급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엉뚱한 생각이었다. 근거가 부족했다. 하지만 직감했다.

    “카이완?”

    부름에 반응했다. 조급해하던 여인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구시온의 미소가 일그러졌다. 카타리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구시온을 주시했다.

    동시에 목소리가 터졌다.

    “케이언의 후손이니?! 케이언은 잘 있어?!”

    “거기까지 하라 말했다!”

    그것은 힘의 폭발이었다. 단숨에 개방된 힘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필사적인 목소리를 토하던 여인은 고통스런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고, 카타리나는 손을 덜덜 떨었다. 용호를 지켜야 한다는 의지로 버티고 서있긴 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구시온이 용호를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찍어 누를 것 같은 압도적인 기운을 발했다.

    하지만 그 순간 구시온의 압박을 찢어발기는 것이 있었다. 그 힘을 살라먹으며 일어나 용호를 보호하는 것이 있었다.

    불꽃.

    용호의 영혼을 상징하는 녹색이 아니었다. 붉고 붉은 홍련의 불꽃이 일어 구시온의 압박을 밀어냈다.

    이번에는 구시온의 얼굴에 다채로운 표정이 떠올랐다. 분노, 경악, 참을 수 없는 유쾌함!

    “아몬?! 아몬인 거냐?!”

    부름에 응답했다. 홍련의 불꽃이 더욱 크고 아름답게 피어올랐다. 거대한 목소리가 통로 전체를 짓눌렀다.

    [탐욕의 왕 앞에 무릎 꿇어라! 괴력의 구시온! 마몬의 사역마여!]

    거인들의 대립은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의 것들을 파괴했다. 카타리나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렸고, 그런 카타리나의 허리를 용호가 단단히 붙잡았다. 홍련 속에서 녹염의 불길을 일으켰다.

    구시온이 용호를 보았다.

    용호 또한 구시온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구시온이 입을 열었다.

    “마몬의 사역마 구시온, 돌아온 탐욕의 왕을 뵙습니다.”

    무릎 꿇지 않았다. 오히려 시험하겠다는 눈빛이 느껴졌다.

    용호는 개의치 않았다 마주 구시온을 노려보는 대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구시온의 시선이 무서워 피한 것이 아니었다. 거인들의 대립을 정면에서 뒤집어 쓴 채, 쓰러져 헐떡이는 여인을 보았다.

    가면은 어느새 벗겨져 있었다. 표독스러워야 할 눈에는 절망에 가까운 실망과 당혹이 어려 있었다. 꽉 깨문 입술사이로 채 감추지 못한 감정이 흘러내렸다.

    용호는 확신했다. 저 얼굴과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재투성이 가주. 왜곡의 마왕 카이완.

    그녀였다.

    < 제 24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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