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68화 (68/227)
  • < 제 22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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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흐름이 갑자기 빨라졌다.

    카타리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결국엔 앙 다물고 용호를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도 이야기의 맥락을 읽는 능력 정도는 있었다. 지금 눈앞의 오크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용호는 어떤 식으로든 움직여야만 했다. 그 정도의 가치를 지닌 정보였다.

    하지만 만약 진실이 아니라면.

    이것이 잘 만들어진 함정이라면.

    카타리나는 포라스 가의 후계자를 몰랐다. 그가 눈앞의 적을 쓰러트리기 위해 집안에 범을 들이는 우를 범할 만큼 어리석은 자일까? 융케라스는 항복을 청한 자를 잔혹하게 살해할 정도로 교활하고 악랄한 자인 걸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타리나가 입을 다문 것은 용호를 믿었기 때문이다. 카타리나 자신도 떠올린 가능성을 용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진실 여부를 판단할 것인가.

    카타리나의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용호는 곧 해답을 찾아냈다.

    “오필리아.”

    “예, 가주님.”

    용호의 부름에 오필리아가 바로 답했다. 아직 용호가 무어라 명령도 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아는 눈빛이었다.

    오필리아는 용호의 명령을 기다렸다. 카타리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용호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바에서 있었던 일을 재현해 줄 수 있을까?”

    “약간의 준비가 필요합니다만 가능합니다. 진실 여부를 판별해 보겠습니다.”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오가는 말에 오크들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여 눈을 껌벅였다. 리쿰이 당황해서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이 녀석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겠다는 거요?”

    “믿을 수 없으니까요. 당신의 옛 부하라는 이유만으로 신뢰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오필리아는 직설적으로 말했고, 리쿰은 자신이 의심받은 것 마냥 이를 악물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사리 판단이 빠른 그답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당신 말이 맞소. 추태를 용서해 주십시오, 가주님.”

    말을 마친 리쿰은 용호에게 목례를 한 뒤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용호 앞에 꿇어 앉아 이야기를 늘어놓던 오크는 당황해서 리쿰을 돌아보았다.

    “부, 분대장님?”

    “별 거 아니다. 그저 잠깐 네 말이 진실인지를 시험해보려는 것뿐이다. 네게 해로운 일은 없을 터이니 날 믿고 가만히 있어라.”

    리쿰의 침착한 목소리에 오크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꽤 불안해 보였지만 딱히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용호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오필리아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오필리아는 조끼 안주머니에서 하얀 분필 같은 것을 꺼내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꿇어앉은 오크를 중심으로 한 마법진이었는데, 용호가 못 봐서 그렇지 사실 선술집의 바에도 비슷한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용호 같은 ‘마왕’의 정신을 엿보기 위해서는 정말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했지만 이번에 엿볼 것은 단순한 오크 중에서도 특히 단순해 보이는 녀석이었다.

    약 5분에 걸쳐 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오필리아는 허리를 쭉 피고 일어섰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용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오크들은 불안한 얼굴로 오필리아와 꿇어앉은 오크를 번갈아 보았고, 리쿰은 ‘만약’을 대비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카타리나는 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인지 오필리아의 입술을 눈여겨보았다.

    오필리아가 오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자세를 낮췄다. 그대로 오크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오크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다시 눈을 껌벅이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눈꺼풀이 거짓말처럼 고정되었다. 오크는 멍한 눈으로 오필리아를 보았고, 오필리아는 다시 그런 오크의 눈을 보았다. 조금씩 오크와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 간의 거리가 영이 되었을 때.

    깜짝 놀란 엘리고스는 눈을 크게 떴고, 카타리나는 저도 모르게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오필리아의 말을 기다렸다.

    접촉의 순간은 짧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오필리아는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벅벅 닦은 뒤 용호에게 돌아섰다. 오크는 여전히 멍한 얼굴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진실입니다. 저 녀석… 고칸은 포라스 가의 집사장이 융케라스에게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리쿰은 안도의 숨을 토했고 용호는 눈을 감았다.

    진실의 여부가 갈린 지금 필요한 것은 빠른 판단이었다.

    ‘아비게일 가를 치는 것은 불가능해.’

    일단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아비게일은 전력을 이끌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포라스 가를 치는 것도 저어했던 용호가 가주가 자리를 비웠다고 아비게일 가를 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포라스 가를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분명히 지리적인 이점은 있었다. 아비게일 가의 가주인 융케라스 쪽이 포라스 가의 함정에 당했을 가능성도 고려한다면 수로도 크게 밀릴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위험한 것은 분명했다.

    포라스 가는 적지였고, 융케라스와 그 수하들의 저력은 미지수였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융케라스에게 패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험이 큰 만큼 이득 역시 컸다.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융케라스와 포라스 가 후계자의 정수뿐만 아니라 포라스 가의 던전의 심장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포라스 가에 남아 있을 재물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필요한 것은 정보.

    그리고 정보라는 영역에 있어서 용호는 자유도시 부근의 그 어떤 가주보다도 앞서 있었다.

    “오필리아, 융케라스의 강함은 어느 정도지? 데리고 있는 호위기사와 사역마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있나?”

    마몬 가의 부외 사역마인 동시에 선술집의 여주인인 오필리아는 미리 준비해뒀다는 듯 빠르게 답했다.

    “융케라스는 포라스 같은 무투파가 아닙니다. 하지만 워낙에 타고난 덩치와 힘이 좋기에 육탄전에는 제법 능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명은 안타깝게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전투계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용호가 가진 진화의 권능도 비전투계 권능이었다.

    모든 마왕들이 포라스의 냉기처럼 전투와 관련된 권능만을 가지고 있으라는 법은 없었다.

    공백지 남부는 가주들 간의 던전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땅이었다. 가주들의 직접적인 전투력에 대한 정보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위기사와 사역마들에 관한 것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융케라스의 호위기사는 제 주인을 닮은 오우거입니다. 머리는 단순하지만 힘과 체력이 우수합니다. 오크 전사 열과 동시에 싸워 이긴 적도 있습니다.”

    “너와 비교하면 어떻지?”

    “제가 더 강합니다.”

    다소 치기어린 대답이었지만 오필리아의 두 눈에 어린 것은 자만심 따위가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을 담담히 논하는 평온한 눈빛이었다.

    오필리아는 설명을 재개했다.

    “주로 부리는 사역마는 던전 상회에서 사들인 리빙 아머들입니다. 고칸 역시 융케라스가 리빙 아머들을 대동한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렇지?”

    오필리아가 마지막에 고칸을 돌아보았고,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고칸은 깜작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제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리빙 아머는 이제까지 마주해본 적이 없는 사역마였다. 던전 상회의 카탈로그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리쿰이 용호를 거들듯 말했다.

    “리빙 아머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데다가 베기나 찌르기 공격에 사실상 면역입니다. 하지만 도검이 아닌 둔기로 무장한다면 충분히 싸워볼만한 상대입니다. 갑옷 자체를 부수거나 찌그러트리면 제 아무리 리빙 아머라고 해도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둔기라는 말에 스컬이 전투 망치를 붕붕 휘둘렀다.

    용호는 다시 셈을 해보았다. 이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전력과 융케라스가 보유하고 있을 병력들을 비교해 보았다.

    전투에 절대라는 것은 없었다.

    만약 그런 것이 존재했다면 용호 자신은 결코 포라스를 이기지 못했을 터였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탐욕이 일었다. 용호에게 길을 인도했다.

    “전투 준비를 갖춘다. 공격대를 구성해 포라스 가를 친다.”

    용호가 빠르게 말했다. 엘리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엘리고스, 트리엔트와 더불어 던전 방어를 부탁한다. 난 카타리나와 스컬, 살라미, 오필리아와 리쿰, 오크들을 이끌고 포라스 가를 치겠다.”

    엘리고스는 잠깐이지만 망설였다. 짧고 짧은 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동시에 했다.

    하지만 결국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한 엘리고스는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집사장 엘리고스, 가주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겠습니다.”

    카타리나와 스컬은 이미 만전의 태세를 갖춘 상황이었다. 리쿰은 급히 용호에게 예를 표한 뒤 말했다.

    “10분 이내로 집합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용호는 항복한 오크들의 사역마 등록을 서두르지 않았다. 손가락을 놀려 루시아에게 살라미를 호출하라 명했다.

    던전 상회에 팔고 남은 전투 마차가 두 대. 병력을 운송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정보를 손에 넣기 전에 속전속결로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용호의 속을 읽기라도 했는지 오필리아가 말했다.

    “융케라스는 성격이 급한 다혈질입니다. 포라스 가의 던전이 마력을 모두 소진해 자연적으로 정지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 가능성은 없다고 해도 좋습니다. 분명 던전의 심장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함정에 의한 피해 역시 누적되겠죠.”

    융케라스가 던전의 심장을 찾아내 포라스 가를 이탈하면 낭패였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자신을 달랬다. 탐욕 역시도 용호의 등을 떠미는 대신 침착할 것을 요구했다.

    큰 먹잇감을 얻기 위해서는 때론 기다리기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용호는 아몬을 움켜쥐었다. 포라스 가가 있는 북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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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는 전력을 다해 달렸다. 마차에 내장된 마정석의 마력을 아낌없이 소모했고, 말들이 지치는 것 또한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운용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운용하면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마차는 사실상 기능이 정지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만 했다. 카타리나를 등에 태운 채 공중에서 정찰을 하며 앞서 나가고 있는 살라미를 마차 창문을 통해 확인한 용호는 다시 마차 안쪽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커다란 종이 위에 리쿰이 포라스 가의 던전 지도를 그렸다. 기억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몇 년이나 포라스 가에 머문 리쿰이었기에 틀린 곳은 거의 없었다.

    고칸을 비롯한 리쿰의 옛 부하들이 새로운 가주가 등극한 이후 달라진 것들을 지도에 표시했다. 가주 자리에 오른 지 며칠 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크게 변한 것은 없었다.

    포라스 가의 던전은 비밀통로가 무척이나 많았다. 포라스가 벽 파괴로 용호가 준비한 던전 방어의 맹점을 찌른 것은 평소 포라스가 벽 파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보면 큼직큼직한 통로들이 연이어져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 통로가 많았다. 더욱이 안으로 들어갈수록 ‘골목길’이라 해야 할 길들이 많아졌다.

    “융케라스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은 이곳입니다. 그리고… 진짜 던전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희도 알지 못합니다.”

    고칸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리쿰이 고칸에게 물었다.

    “사역마들은 던전을 모두 빠져나왔나? 융케라스에게 붙잡혀서 길 안내를 할 만한 녀석은 없고?”

    “어… 확신은 못합니다만 거의 다 빠져나갔을 겁니다. 애당초 융케라스와 가주… 전 가주가 만나는 장소에는 사역마들이 거의 다가가지 못했고요.”

    진짜 던전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고칸 역시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리쿰은 던전 지도의 한 축을 가리키며 말했다. 융케라스가 갇힌 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던전의 심장은 이 근방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지만… 집사장의 성격상 가능한 먼 곳에 떨어트려 놓았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던전 지도를 다시 면밀히 살펴보았다. 길잡이 역할을 해줄 오크들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다. 용호 자신이 지도를 외우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마차가 더욱 더 속도를 높였다.

    포라스 가의 던전 지도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용호는 눈을 감고 침투로를 생각했다.

    포라스 가의 던전에 진입하면 가장 우선시 해야 할 것.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마몬 가의 전투 마차 두 대가 포라스 가의 던전에 당도했다.

    < 제 22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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