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67화 (67/227)
  • < 제 22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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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필리아의 재방문은 기습적이라 해도 좋았다.

    마몬 가와 자유도시 사이의 거리는 말을 달려도 하루 이상을 가야하는 거리였는데, 오필리아는 딱 하루만에 되돌아 왔기 때문이다.

    말을 죽일 각오로 미친듯이 달리지 않았다면 자유도시에 당도하기도 전에 다시 말 머리를 돌려 마몬 가에 돌아온 셈이었다.

    격렬한 주행을 온 몸으로 설명하듯 오필리아는 엉망진창이었다.

    색이 연한 금발은 흙먼지 때문에 탁해져 있었고, 반듯하고 단정하던 옷매무새 또한 흐트러져 있었다.

    전신이 땀으로 젖은 오필리아의 말은 마몬 가의 던전 입구에 당도하자마자 철푸덕 쓰러졌다. 오필리아는 그런 말을 돌봐줄 새도 없이 마몬 가에 입성했다.

    탐사대를 이끌고 던전 탐사 중이던 용호가 던전 입구에 도착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고작해야 십분 남짓한 그 시간이 오필리아에게는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마침내 당도한 용호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급하게 돌아왔는지, 왜 통신기를 쓰지 않고 직접 왔는지 등등 의문점이 많았다.

    그 모든 것을 함축한 질문에 오필리아는 새삼 숨을 한 번 골랐다. 용호가 떠올린 많은 의문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것은 나중 일이었다. 제대로 된 인사조차 생략하고 말했다.

    “포라스 가가 아비게일 가에 항복했습니다.”

    순간이지만 숨이 멎었다. 오필리아를 마주하고 있던 이들 사이로 깊은 침묵이 감돌았다.

    던전을 버리고 항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한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다.

    포라스 가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가주를 잃었다. 주된 전투 병력이었던 오크 전사들도 대거 잃었고, 불안을 느낀 사역마들은 이탈을 시작했다.

    주변 정세라도 안정적이라면 모를까, 바야흐로 난세였다. 언제 던전 전투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세상이었다.

    용호는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떠올릴 수 있는 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포라스 가는 방파제가 아닌 적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전투도 없이 던전을 포기하고 항복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사역마들도 포라스 가가 쉽게 항복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애당초 던전 공략을 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못했고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루시아가 위로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호는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루시아의 말에 의존해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기 위함이었다.

    “항복 시점은? 포라스 가는 이미 아비게일 가의 수하에 들어간 건가? 그리고 항복의 형태는 어떻게 되지?”

    항복을 선언한 순간 이미 포라스 가는 아비게일 가의 수하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였다.

    용호가 묻는 것은 포라스 가가 항복의 뜻을 전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항복의 형태 또한 중요했다.

    삼국지에서 성주가 성을 바치고 항복한 것과는 상황이 다소 달랐다.

    던전 전투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수를 빼앗기 위해서’였다.

    가주의 정수.

    던전의 심장에 축적되어 있는 마력.

    물론 그냥 던전을 온전히 보존한 뒤 제 2던전 정도로 삼을 수도 있었다. 지부나 확장기지의 개념으로 말이다.

    오필리안은 연신 침을 삼켰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렸기 때문인지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약간은 갈라진 목소리로 답했다.

    “포라스 가를 이탈한 사역마들 가운데 일부는 정말로 이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항복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한 시늉일 뿐이었죠.”

    용호는 오필리아에게 들었던 보고를 떠올렸다. 포라스 가를 떠나 자유도시나 다른 가주의 던전으로 흘러 들어간 사역마들.

    그들 가운데 일부, 정확히 말해 아비게일 가에 흘러 들어간 사역마들은 도망자가 아닌 항복 사절이었다.

    “이미 항복의 뜻을 전한지 며칠정도 지났습니다. 더욱이 최악인 것은… 제가 마몬 가를 방문한 며칠 사이에 아비게일 가의 가주- 융케로스가 던전을 나선 것 같습니다.”

    “포라스 가를 접수하기 위해서 말이오?”

    엘리고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필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유도시로 귀환하던 도중 제 수하에게서 급히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융케로스가 포라스 가의 던전에 당도했을 겁니다.”

    이미 포라스 가는 아비게일 가의 수중에 들어갔다. 어찌 저지해볼 틈도 없었다.

    용호는 생각했다. 낙담하기 앞서 다시 정보를 갈구했다.

    “아비게일 가의 가주가 포라스 가에 직접 방문한 것은 역시 던전의 심장을 접수하기 위해서인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포라스 가의 후계자를 자신의 사역마로 등록시키기 위해 직접 행차한 것 일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잠시 말끝을 흐린 오필리아는 입술을 한 번 살짝 깨물었다. 다소 망설이다가 말했다.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던전의 정수를 취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몬 가의 가주- ‘불꽃의 마왕’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니까요. 포라스 가의 던전을 전진기지 삼기보다는 아예 싸울 일 자체를 없애는 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유도시 인근에 자리한 가주들은 선술집을 정보의 원천으로 삼았다. 오필리아의 정보 공작 덕분에 ‘불꽃의 마왕’이라 알려진 용호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노익장으로 유명했던 포라스를 단신으로 꺾은 데다가, 거대한 랜드 웜을 쓰러트린 무투파였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속으로 2의 거듭제곱을 헤아려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필리아의 말대로라면.’

    일단 당장에 던전 전투가 일어날 가능성은 낮았다. 아비게일이 포라스 가를 해체해버리고 떠나면 마몬 가 주위에는 이렇다 할 던전이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아비게일이 포라스 가를 전진기지 삼아 마몬 가에 쳐들어올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금방 답이 나올 문제가 아냐.’

    조급해 한다고 하늘에서 답이 떨어지진 않았다.

    평정을 되찾은 용호는 일단 사역마들을 다독이고자 했다. 여기까지 급히 달려온 오필리아의 공을 치하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입에 담기도 전에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다.

    [포라스 가의 방향에서 오크 여러 마리가 급히 달려오고 있습니다!]

    [던전 미어 캣들의 보고에 따르면 전원 말을 탄 것 같습니다!]

    “설마 적의 공격인가?!”

    엘리고스가 당혹스런 목소리를 토했다. 리쿰이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작 오크 몇 기로 공략할 수 없는 던전이오. 가주님, 접근 중인 오크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엘리고스와 마찬가지로 당황했던 용호는 리쿰의 침착한 목소리에 안정감을 얻었다. 가볍게 손을 놀리자 루시아가 응답했다.

    [숫자는 모두 넷.]

    [개중 선두에 선 오크가 하얀 천이 달린 깃대를 등에 매고 있습니다.]

    사역마들도 볼 수 있도록 허공에 빛의 문자가 그려졌다.

    리쿰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포라스 가에 남아있던 오크들이 항복하러 온 게 분명합니다.”

    오필리아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리쿰 경비대장이 마몬 가에 항복했다는 이야기를 포라스 가를 이탈한 사역마들에게 은연중에 흘려 두었습니다. 어쩌면 경비대장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찾아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카타리나가 기대 어린 얼굴로 용호를 돌아보았다.

    호재였다.

    포라스 가를 이탈한 오크들의 가치는 정보에 있었다. 포라스 가에서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비게일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충분한 단서가 주어질 터였다.

    “루시아, 던전 문을 개방해. 던전 입구에서 직접 맞이한다.”

    루시아에게 명한 직후 용호는 사역마들을 돌아보았다. 카타리나와 스컬이 고개를 끄덕였고, 리쿰과 오필리아 역시 용호를 따라 던전을 나섰다.

    “키라키라.”

    던전 미어 캣이 멀리서 달려오는 오크들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용호는 그런 던전 미어 캣의 머리를 한 차례 쓰다듬어 준 뒤 오크들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리쿰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수하에 있던 녀석들이 분명합니다.”

    오크들 또한 리쿰을 알아본 것 같았다. 아직 거리가 제법 되었지만 급박한 표정 속에 안도와 기쁨이 어리는 것을 카타리나가 포착했다.

    “리쿰 분대장!”

    당도하자마자 말에서 거의 구르다시피 뛰어내린 오크가 크게 소리쳤다. 연이어 도착한 오크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리쿰은 그런 오크들에게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주 님의 앞이다. 먼저 예를 표해라.”

    이미 리쿰이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녀석들이라 다음 행동 역시 빨랐다. 상황이 상황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리쿰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인지 조금의 주저도 없이 용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마몬 가의 가주님을 뵙습니다.”

    눈앞의 오크들에게서는 사역마 특유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포라스 가와의 사역마 계약 자체가 끊어진 상태 같았다.

    용호는 다급함을 억누르고 말했다.

    “잘 왔다. 리쿰의 수하들이었나?”

    “예, 리쿰 분대장 밑에 있었습니다.”

    하얀 깃발을 등에 매고 있던 녀석이 대표로 대답했다.

    리쿰이 대신 나서 용호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포라스 가가 아비게일 가에 항복했다는 게 정말이냐?”

    모두의 시선이 오크에게 집중되었다. 스컬조차도 바닥을 구르는 대신 전투 망치를 꽉 움켜쥔 채 오크를 보았다.

    과도한 시선의 집중에 긴장한 듯 입술을 달싹이던 오크는 이내 입을 열었다. 용호는 물론이고 오필리아 역시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꺼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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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라스 가의 가주… 어린 주인님은 융케라스 놈에게 죽었습니다. 그리고 융케라스는 지금 포라스 가의 던전에 갇혀 있습니다.”

    설명이 필요했다.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이해 못할 구석이 있었다.

    포라스 가의 후계자가 죽었다?

    가능했다. 항복을 받아주는 척하고 항장을 죽이는 일은 마계가 아니라 인계의 역사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비게일 가의 가주인 융케라스가 포라스 가의 던전에 ‘갇혔다’는 부분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리쿰이 오크를 채근했고, 오크는 말주변이 없는지 떠듬떠듬 자신이 아는 것들을 토해냈다.

    “어린 가주님… 아니, 포라스 가의 가주는 던전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사장 역시 동의했고요. 전투 사역마들은 거의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하나 둘 던전에서 도망치고 있었으니까요.”

    이미 예상한 바였다. 용호는 재촉하는 대신 인내했다. 오크가 용호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선택지는 몇 없었습니다. 가주 입장에서는 원수… 으, 원수인 마몬 가의 가주님에게 항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래서 아비게일 가의 가주인 융케라스 놈에게 항복하기로 했습니다. 항복하는 대신 마몬 가에 복수를 해달라고 하면서요.”

    “하지만 융케라스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었군. 항복을 받아주는 척하면서 포라스 가에 방문, 포라스 가의 가주를 죽이고 던전의 심장까지 파괴할 심산이었겠지. 정수만 꿀꺽하면 되니까.”

    오필리아가 말했고 오크가 어찌 그걸 다 아냐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융케라스는 호위기사들과 정예를 이끌고 왔습니다. 포라스 가주의 사역마 등록이 끝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죠. 하지만 집사장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집사장이라는 말에 엘리고스가 잠시 움찔했다. 오크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융케라스를 의심하던 집사장은 만약을 대비해 함정을 파뒀습니다. 융케라스 놈은 가주를 죽인 직후 던전의 심장을 접수할 생각이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죠. 집사장이 융케라스를 맞이한 곳에 있던 것은 가짜 던전의 심장이었습니다. 집사장은 던전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던전을 폐쇄해?”

    용호가 저도 모르게 되묻자 루시아가 급히 답했다.

    [가주가 죽으면 던전의 영혼 역시 죽습니다. 하지만 마몬 가가 그랬듯이 던전의 영혼이 죽는다 하여 던전의 기능 자체가 마비되는 것은 아닙니다. 축적해둔 마력을 소진해가며 천천히 죽어갈 뿐이죠.]

    [아마 포라스 가의 집사장은 천천히 죽어가는 대신 급격히 죽어가는 것을 택한 것 같습니다.]

    [잔여 마력을 단번에 쏟아 부어서 던전의 함정을 전부 활성화 시키는 한편 던전의 문을 봉하는 거죠. 이렇게 하면 마력 소모가 큰 터라 던전의 죽음이 앞당겨지겠지만… 대신에 던전에 들어온 자를 가둘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냥 죽지 않고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은 셈이었다.

    “저와 동료들은 비밀통로로 던전을 빠져나왔습니다. 하지만 융케라스 놈은 지금도 던전 최심부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있을 겁니다. 집사장이 놈을 유도한 가짜 마왕의 방 주변은 함정 투성입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상황을 정리했다.

    포라스 가의 후계자는 죽었다.

    아비게일 가의 가주인 융케라스는 포라스 가의 던전에 갇혀 있다.

    융케라스는 포라스 가의 던전 구조에 대해 모른다. 그리고 포라스 가의 함정들은 그에게 적대적이다.

    물론 함정들은 용호 자신에게도 적대적일 터였다. 하지만 용호는 포라스 가의 구조를 알았다. 아는 자들을 수하에 두고 있었다.

    “융케라스는 수하들을 얼마나 이끌고 왔지?”

    용호의 물음에 오필리아의 눈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오크는 눈을 껌벅이다가 손가락으로 수를 헤아리며 답했다.

    “호위 기사와 정예 이십여 명 정도만 이끌고 왔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함정에 상한 놈이 꽤 될 겁니다.”

    용호는 수를 헤아렸다. 탐욕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의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면.

    던전 전투.

    이번에는 공격에 나설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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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22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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