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2장 - 던전 오펜스 >
제 22장 - 던전 오펜스
용호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앞으로의 일들이 걱정되어 잠을 설친 것이 아니었다.
[주인님!]
[훈련장에 빨리 가 보세요!]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 죽어요!]
루시아의 비명 같은 재촉에 정신이 번쩍 든 용호는 세수 할 새도 없이 방을 나섰다. 그 와중에도 루시아는 계속해서 말했다.
[물론 정말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한계 이상으로 몸을 움직인 터라 결단코 정상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밤새도록, 정말 밤새도록 훈련장의 허수아비를 두드렸다고요!]
현재 시간을 고려한다면 아마 근 8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두드렸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물론 8시간 운동한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하물며 엘리고스는 마족이고, 얼마 전에 체력 진화를 하지 않았는가.
[제가 드린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주세요!]
[한시도 쉬지 않은 게 분명해요!]
루시아라고 해서 엘리고스의 자기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루시아는 레드 데몬이란 종족을 알았다.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가 어떤 자인지를 거의 카타리나만큼 잘 알고 있었다.
기초 훈련장으로 달리며 용호는 이를 악 물었다.
오필리아에게 엘리고스를 격앙시켜 달라고 부탁한 것은 용호 자신이었다. 그리고 엘리고스가 밤늦게 아무도 없는 훈련장에 몰래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루시아에게 들었을 때는 노림수가 먹혔다고 좋아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답 없이 고지식한 집사장이 설마 이런 식으로 자기 학대를 할 줄이야.
‘오필리아가 대체 뭐라고 한 거야?!’
분명 어제는 잘 되었다고 보고하지 않았나?
잘 되긴 잘 되었다. 너무 잘 되어서 문제지.
어느새 훈련장 앞에 당도한 용호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훈련장 안에서 밀려온 붉은 열기에 깜짝 놀라 순간이지만 숨을 멈췄다.
붉은 열기의 근원은 엘리고스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먹으로 허수아비를 치고 있는 엘리고스의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땀이 흘렀고, 그 땀에 뒤지지 열기가 솟아올랐다. 마치 한증막 사우나를 보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땀이 저렇게 증발할 정도로 열을 발하고 있다고?’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멈칫했다. 엘리고스는 마족이었다. 레드 데몬은 본래 저런 종족일지도 몰랐다.
[땀이 증발한 것은 아닙니다.]
[레드 데몬이 전투 시에 흔히 발하는 특유의 열기- 주인님! 빨리 말려주세요!]
“엘리고스!”
루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호가 크게 소리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가주의 목소리였기에 무아지경으로 허수아비를 두드리던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는 몸을 멈췄다. 허수아비를 향해 내지르려던 주먹을 내리고 돌아섰다.
“가주님.”
하지만 여전히 반쯤은 정신이 나간 상태로 보였다. 움켜쥔 두 주먹은 너덜너덜했고, 허수아비에는 엘리고스의 피로 보이는 붉은 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레드 데몬 종족이 전투에 극도로 집중할 경우 발생하는 ‘광화Berserk’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종족 특성이 다른 것도 아닌 광화라니. 진짜 전투 종족은 전투 종족인 모양이었다.
용호는 최대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엘리고스, 괜찮아? 나 알아보겠어?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있고?”
연달은 질문에 엘리고스는 하나하나 답했고, 그 와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멍해있던 두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대가라도 되듯이 돌연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늘어트렸다.
[광화가 풀리면서 그간 잊고 있던 육체 데미지를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심각한 수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엘리고스, 일단 앉아봐. 물줄까?”
“감사…합니다.”
쥐어짠 것 같은 엘리고스의 대답이었다. 용호는 얼른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통을 끌러 바닥에 주저앉은 엘리고스에게 가져갔다. 처음에는 건네주려 했지만 엘리고스의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린 터라 손수 뚜껑을 열고 입안에 흘려 넣어 주었다.
“죄송합니다.”
“그보다 왜… 아니, 됐고. 일단 물이나 더 마셔.”
엘리고스는 수치심을 느꼈다.
자제심을 잃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고, 가주에게 손수 물시중을 들게 한 작금의 상황이 괴로웠다.
하지만 뭣보다 부끄러운 것은 엘리고스 자신의 생각이었다.
엘리고스가 강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무너져 가는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된 이래 늘 품어온 생각이었다.
오필리아의 한 마디를 듣고 격앙되어 갑자기 수련에 매진한다?
계산이 하나 있었다.
진화의 권능.
사역마를 문자 그대로 진보시키는 용호의 힘.
진화 숙련치가 필요했고, 그래서 허수아비를 밤새도록 두드렸다.
그것이 부끄러웠다.
가주의 권능에 빌붙으려는 자신의 생각이. 지난 수십 년 세월동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강해지는 노력을 게을리 한 자신이. 용호의 권능을 몇 번이나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가 도발하기 전까지는 지금 같은 행동을 할 생각도 못했던 자신이.
어쩌면 시간을 잊고 허수아비를 치는 행동 자체에 몰두한 것은 이러한 부끄러움 때문일지도 몰랐다.
용호는 엘리고스의 생각을 읽어낼 순 없었다. 하지만 가주와 예속 사역마의 관계였다. 엘리고스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는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훈련장은 어제 막 발견했고, 그간 엘리고스는 자신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왔다. 던전의 살림을 사실상 혼자 꾸려나간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용호는 입술을 벌렸지만 결국 꺼낸 것은 다소 엉뚱한 말이었다.
“엘리고스도 남자네.”
오기와 치기.
조급함.
엘리고스는 다시 한 번 창피함에 얼굴을 붉혔다. 본래 붉은 피부임에도 티가 날 정도였다.
용호는 괜한 말을 더하는 대신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진화 숙련치 : 100/100]
노력이 허사는 아니었다. 진화가 덜 되어있었다고는 해도 하룻밤 만에 진화 숙련치는 다 채웠으니 말이다.
- 물론 진화가 거듭될수록 진화 숙련치 쌓기가 힘들다는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이런 방식이 통하지는 않을 터였다. -
“가능…합니까?”
용호의 눈에 초록색 귀화가 피어오르자 엘리고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리고 이내 다시 부끄러움을 느꼈다. 가주에게 권능을 발휘해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호는 개의치 않았다. 씩 웃으며 엘리고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가능해. 힘이나 체력을 특화시키는 게 아니라, 승급을 할 거야.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빼.”
엘리고스는 그렇게 했다. 용호는 주저 없이 마력을 쏟아 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마력을 소모해야 했지만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름 : 엘리고스 (남)]
[종족 : 레드 데몬 - 비스트]
[분류 : 마인 (중급)]
[속성 : 불꽃 1레벨 / 어둠 1레벨]
[개체 천성]
[성실함 / 강직함 / 충실함]
[개체 적성]
[힘 / 체력]
[진화 숙련치 : 0/100]
[힘 특화 1레벨| ★★☆ (2.5)]
[체력 특화 2레벨| ★★★ (3)]
[기량 특화 1레벨| ★★ (2)]
[마력 특화 1레벨| ★★ (2)]
전반적인 능력 모두가 골고루 성장했다. 더욱이 변한 것은 능력만이 아니었다.
“와우.”
괜히 ‘비스트’가 아니었다. 체력 특화로 이미 꽤 건장했던 엘리고스의 몸이 이제는 문자 그대로 강건해졌다. 상의를 벗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 변화가 더욱 눈에 띄었다.
근육으로 꽉 찬 상체는 역삼각형을 그렸고, 가슴과 팔에는 털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얼굴 역시 잔주름이 이전보다 더 줄어 이제는 노년이라기보다는 중장년이란 느낌이 들었다.
‘회춘? 아니… 엘리고스가 본래 겉늙었다든가… 아니면 살라미 때처럼 내 생각에 외형이 영향을 받는 건가?’
엉뚱한 생각을 떠올리며 용호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짐승남. 정말 딱 그대로였다. 울버린으로 분한 휴 잭맨이 떠올랐다. 이전과 달리 덮수룩한 수염까지 생긴 터라 더욱 더 그랬다.
“온 몸에서… 힘이 넘칩니다.”
엘리고스 역시 상당한 고양감을 느끼는 지 목소리가 떨렸다.
승급 덕분에 몸에 생긴 상처까지 모두 치유된 상황이었다.
용호는 자신 또한 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간 꽤나 강해진 용호였기에 현격한 차이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강해진 것은 강해진 것이었다.
‘예속 사역마가 강해지면 가주가 강해진다. 가주가 강해지면 예속 사역마 역시 강해진다.’
엘리고스는 강해졌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럼 이제 돌아갈까? 다들 놀라게 해줘야지. 특히 오필리아.”
용호의 말에 엘리고스가 웃었다.
푸근하다기보다는 호기 넘치는 사나이의 미소였다.
&
단정한 집사장 전용의 검은 슈트도 변화를 감출 수는 없었다.
식당에 모인 사역마들은 모두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부엌과 식당을 오가는 엘리고스를 보았다.
특히나 엘리고스가 지나가는 노인1 이던 시절부터 함께한 카타리나의 놀라움이 컸다.
카타리나는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용호를 돌아보았고, 연이어 리쿰을 필두로 한 오크 전사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용호를 돌아보았다.
용호는 그들 사이에서 그저 흐뭇하게 웃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공백지 상황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저 오필리아가 빨리 식당에 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필리아가 나타났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식당에 들어오자마자 용호에게 예부터 표한 오필리아는 어제 지정받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심상치 않은 사역마들의 분위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왜 저래? 특히 오크들.’
경험상 오크들이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을 하는 경우는 꽤나 한정되어 있었다.
엄청나게 맛있는 걸 먹을 때, 여자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뭔가 선망하는 것을 마주했을 때.
“우히히.”
바로 옆에서 새어나온 웃음에 오필리아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던 카타리나는 얼른 입매무새를 단정하게 하고 냉정한 여기사를 연기했다. 하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실없기는.’
집사장보다는 호위기사부터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오필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보았다. 다른 사역마들 다들 그러했던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고, 연이어 눈을 깜박였으며, 종국에는 멍한 목소리를 토했다.
“에, 어, 어?”
“오필리아, 입에 파리 들어가겠소. 물론 내가 관리하는 식당에 파리 따위는 없다만.”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오필리아 앞에 내려놓은 엘리고스는 그대로 무심히 돌아섰다. 오필리아의 두 눈에 완벽한 역삼각형을 그리는 엘리고스의 짐승같은 등짝이 그대로 들어왔다.
용호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역시 엘리고스는 남자였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어린애인 남자 말이다.
넋 놓고 엘리고스의 등을 바라보던 오필리아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멋-어쩌고 하는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급히 입술을 꾹 다문 그녀는 용호를 돌아보았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용호는 지금 이 상황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용호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나, 엘리고스를 위해서나 말이다.
“밥 먹자.”
용호가 말하며 식기를 들었고, 사역마들은 다 같이 식사를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식사하는 내내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짐승 같은 몸으로 푸근한 미소를 짓는 엘리고스를 훔쳐보기 바빴다.
“가주님의 권능은 정말 대단합니다. 아니, 대단하다는 말만으로도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식사가 끝나고 약간의 휴식 시간을 가진 뒤 용호는 오필리아와 더불어 던전 입구방까지 이동했다.
가주가 몸소 배웅해준 것에 감사를 표한 오필리아는 연이어 용호의 권능에 찬사를 보냈다.
용호는 이번에도 기분 좋게 웃었다. 약간의 겸양을 섞어 말했다.
“엘리고스의 가능성을 이끌어 준 것에 불과해.”
진화의 권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힘이 아니었다. 각각의 존재가 가진 잠재력을 개화시키는 능력이었다. 각 진화 루트에 표시되는 잠재력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용호가 가진 진화의 권능이 실로 엄청난 능력이란 사실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필리아는 소녀같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마몬 가는 다시 일어설 겁니다. 반드시.”
난세의 바람은 매섭고 사나웠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오필리아는 이제 진심으로 마몬 가의 부흥을 믿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여부가 있을까요. 충심으로 마몬 가와 가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가주와 부외 사역마의 기분 좋은 인사가 끝나자 용호는 슬쩍 엘리고스에게 눈짓을 보냈다. 용호 옆에 서있던 엘리고스는 오필리아에게 짧게 인사했다.
“잘 가시오.”
“아직은 좀 부족한 거 아시죠?”
“더욱 정진하겠소.”
오필리아가 약간은 장난스럽게 쏘아붙이자 엘리고스는 평온한 얼굴로 최대한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 대답에 오필리아는 다시 웃었다. 근성 하나는 예전부터 인정하고 있던 자신의 동족에게 말했다.
“그래요, 다음에 뵐 때를 기대하고 있을게요. 엘리고스 오라버니.”
“그… 에, 어?”
식당에서의 오필리아와 똑같은 얼굴이 된 엘리고스가 버벅였다. 오필리아는 상쾌한 얼굴로 용호를 돌아보았다. 웃음이 만개한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다음에 또 보자고.”
멍한 얼굴이 된 건 매한가지인 카타리나에게까지 눈인사를 건넨 오필리아는 마지막으로 엘리고스를 보았다. 여전히 넋이 나간 그에게 찡긋 윙크를 해준 뒤 돌아섰다. 이번에도 붉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오빠래. 좋겠구만.”
용호는 돌아섰고, 멍해 있던 카타리나는 얼른 그런 용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엘리고스는 눈을 껌벅였다. 분명 펀치를 먼저 날린 건 자신인데 오히려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할까.
‘나쁘진 않군.’
엘리고스는 결국 푸근하게 웃었다. 그대로 돌아섰고, 집사장으로서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오필리아가 다시 마몬 가를 방문할 날을 기대했다.
그리고 하루 뒤.
엘리고스의 기대는 다소 어긋난 형태가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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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2장 - 던전 오펜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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