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65화 (65/227)
  • < 제 21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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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가 위대한 마몬 가의 가주 님을 뵙습니다.”

    마왕의 방.

    옥좌에 자리한 용호 앞에 무릎 꿇은 오필리아가 예를 표했다. 옥좌 바로 왼편에는 호위기사인 카타리나가 시립했고, 던전 개편때 새로이 만든 단 아래에는 엘리고스와 리쿰, 스컬이 각각 자리했다.

    오필리아는 현재 마몬 가의 존재하는 사역마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존재였다. 더욱이 한 집단의 장으로 산 세월이 적지 않다보니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아니, 무게감이라기보다는 품격인가?’

    이렇게 옥좌에 앉아 오필리아의 인사를 받으니 어린 시절 상상했던 ‘마왕’에 한 걸음 다가선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욕구 충족에 기뻐할 때가 아니었다. 오필리아의 갑작스런 방문 이유가 궁금했던 용호는 최대한 조급함을 감추고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예상보다 빠른 방문이군.”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되었으니까요. 던전 내부의 상황도 파악해야하고, 무엇보다 던전 밖 공백지의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선술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바텐더 차림을 한 오필리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복잡한 예절에 대해 잘 모르는 용호에게는 오히려 이쪽이 더 편했다.

    용호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른 가주들의 상황은 어떻지?”

    “며칠 내로 움직임을 개시할 것 같습니다. 포라스의 죽음 혹은 패배를 거의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마몬 가를 치기 위해 떠났던 그가 돌아오지 않은 지 벌써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요.”

    선술집에서 이미 한 번 거론했던 문제였다.

    다른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최소 수십 단위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고,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은 무슨 짓을 해도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특히 포라스 가 북서쪽에 자리한 에비게일 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당장 어제 선술집에 방문해 정보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자유도시의 부랑아들을 대거 고용했습니다.”

    누가 봐도 목적이 뻔한 행동들이었다.

    용호가 미간을 좁혔다.

    “포라스 가는 어떻지?”

    “사역마들이 이탈을 시작했습니다.”

    패주하는 군대에는 탈영병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던전 내에서 생활하는 사역마들이라 하여 눈과 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던전의 영혼이 죽고 새로운 가주가 등극했다.

    지난 수십 년 세월동안 포라스 가를 굳건히 지켜온 가주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더욱이 애당초 포라스가 움직였던 이유는 남부 공백지의 난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가라앉기 시작한 배에 태평히 앉아있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자유 사역마- 그 중에서도 오크들이 우선적으로 이탈하고 있습니다. 가주 님도 아시겠지만 포라스 가의 주력 사역마는 오크였습니다. 그런 오크들을 통솔하던 호위기사 고쿤뿐만 아니라 준리더 격이던 인물들까지 마몬 가의 싸움에서 거의 대부분 사라진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지휘관의 역할은 전장에서의 작전명령에만 있지 않았다. 병력의 사기 유지 또한 지휘관의 중요한 임무였다.

    오필리아의 말에 용호는 리쿰을 돌아보았고, ‘준리더 격 오크’ 가운데 하나였던 리쿰은 약간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크들은 강자를 숭상합니다. 현재 포라스 가에는 오크들을 통제할 만한 강자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썩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크들은 뜨내기 용병으로 포라스 가에 고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사역마였고, 굳이 따지자면 정규군에 가까운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가문이 위태롭다하여 제일 먼저 가문을 버렸으니 부끄러운 이야기임에 분명했다.

    리쿰의 얼굴에는 이제 수치심까지 엿보이기 시작했다. 포라스 가의 오크들이 부끄러워서만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가장 먼저 포라스 가를 버린 것은 리쿰 본인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들의 목숨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었고, 승산 없는 싸움을 마주한 상황이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포라스 가를 버리고 마몬 가를 택한 것은 사실이었다.

    후일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때는 마몬 가를 버릴 것인가?

    과연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리쿰의 속앓이를 짐작한 용호는 다시 오필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미묘한 기분이 든 것은 용호 역시 마찬가지였던 터라 딱히 다른 말을 해줄 수는 없었다.

    오필리아가 다시 말했다.

    “최초의 이탈자는 도미노의 첫 조각과 같습니다. 이탈자들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남은 이들의 마음 역시 빠르게 약해집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사역마들의 대량 이탈을 야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데.

    다른 이가 먼저 했는데. 다들 그렇게 하는데.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닌데.

    오필리아의 말대로 도미노였다. 용호는 학창시절 청소를 안 하고 도망치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 비하자면 경중이 너무 다른 사건이긴 했지만 기본적인 맥락 자체는 똑같았다.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엘리고스와 달리 카타리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귀는 축 쳐졌고, 꼬리 역시 힘없이 늘어졌다.

    이미 마몬 가가 겪은 일이었다. 몰락했다고는 하나 수십 마리가 넘는 사역마들이 있던 마몬 가의 던전에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단 둘만이 남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며칠에 불과했었다.

    “다른 가주들 역시 이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포라스 가를 떠난 오크들이 자유도시에 흘러들어오거나 다른 가주들에게 직접 찾아가 고용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포라스가 죽었다. 사역마들은 던전을 떠나고 있다.

    가주들을 재촉하는 것은 이런 포라스 가의 상황만이 아니었다.

    “엠브리오에 의한 혼란 역시 커지고 있습니다. 각지의 가주들이 경쟁적으로 던전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합종군을 이루었다가 패한 가주들까지도 새로이 동맹을 구하기보다는 다른 던전이나 가주를 먹어치워 힘을 키우는 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마몬 가의 전대 가주가 자살했을 때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다.

    가주들은 등을 떠밀리고 있었다. 던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싸움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용호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방파제로 삼은 포라스 가가 너무 빨리 무너진다면 용호에게도 이로울 것이 없었다.

    오필리아는 품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구슬을 꺼냈다. 자연스럽게 다가온 엘리고스에게 구슬을 넘긴 뒤 말했다.

    “원거리 통신기입니다. 앞으로는 통신기를 통해 정보를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엘리고스를 통해 구슬을 넘겨받은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완의 반지나 팔찌와 마찬가지로 구슬에서도 마력이 느껴졌다. 오필리아의 마력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정보도 고마웠고. 우선은… 노독을 풀도록 하지. 던전 역시 둘러보고.”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가주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오필리아가 공손히 예를 표하자 용호는 엘리고스에게 오필리아를 맡기고 옥좌에서 일어섰다. 용호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회의가 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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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보다는 던전 상황이 좋군요.”

    엘리고스를 따라 던전 내부를 일순회한 오필리아의 감상이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마몬 가의 전대 가주가 죽은 지 벌써 꽤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포라스 가가 현재 절찬리에 경험중인 사역마 이탈을 겪은 마몬 가이니 던전 내부가 정상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걸.

    던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일자형 통로와 마왕의 방 정도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마몬 가의 던전이 제법 던전다운 자태를 자랑했다.

    오필리아의 솔직담백한 감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 엘리고스가 푸근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모두 가주님의 덕분이오.”

    “그러게요.”

    이번에도 솔직담백한 대답이었다. 원하던 대답이긴 했지만 어쩐지 모르게 속이 쓰린 엘리고스였다. 마치 당신이 한 건 하나도 없다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엘리고스와 오필리아는 현재 엘리고스의 두 번째 성지 - 첫 번째 성지는 당연히 고문실이었다. - 라 할 수 있을 식당에 자리했다.

    가까스로 미소를 지킨 엘리고스가 다시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혹시 던전에 미흡하거나… 추가해야 할 부분 같은 것이 있겠소? 기탄없는 의견 부탁하오.”

    엘리고스가 마몬 가의 집사장으로 일한 시간은 길었지만 전전대와 전대 가주 시절의 마몬 가는 참으로 작았다. 선술집의 여주인인 오필리아라면 엘리고스 자신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포착해낼 터였다.

    엘리고스의 진솔한 태도에 오필리아의 표정이 약간이지만 부드러워졌다. 엷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유흥 시설이 부족하군요.”

    “유흥… 시설?”

    “본래는 가주님에게 직접 말씀을 드리려고 했는데… 아까 분위기가 분위기였으니까요.”

    지금 당장 적이 쳐들어오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 내로 적들이 움직일 가능성이 높은 것뿐이었고, 그나마도 대상은 마몬 가가 아닌 포라스 가였다. 그리고 어쩌면 포라스 가가 생각 이상으로 방파제 역할을 잘 수행할 가능성 역시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일단은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오필리아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사역마들에게도 욕구란 게 있어요.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받죠. 적절히 욕구를 해소하고 스트레스를 풀어주지 않으면 사기란 걸 유지할 수 없어요. 업무 효율도 떨어지고요.”

    “어… 던전 내에 선술집 같은 것을 설치해야 한단 말이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죠. 전전대 가주님 시절에는 선술집이 있었… 당신이 들어왔을 땐 이미 해체된 후였나 보군요.”

    엘리고스가 씁쓸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필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박장도 건설하면 좋겠어요. 사역마들에게 지급된 월급을 회수하는 아주 좋은 수단이기도 하죠. 물론 가끔 잭팟도 터져줘야 하지만… 알잖아요? 도박이란 건 결국엔 도박장이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마지막에 씩 짓는 미소는 꽤나 사악했다. 그녀가 자유도시에 있는 가장 큰 도박장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더 말이다.

    사람 좋은 엘리고스는 ‘그러는 너도 사역마잖냐’라 말하는 대신 점잖은 헛기침을 터트린 뒤 말했다.

    “가주님께 건의해 보겠소.”

    “제가 직접 할게요. 어차피 내일 떠날 생각이니까. 그리고-”

    “그리고?”

    “가장 큰 결함은 엘리고스 당신이에요.”

    오필리아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했고, 그랬기에 엘리고스는 오필리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듣고나서 한참이 지난 뒤에야 눈을 껌벅였다.

    “물론 망하기 일보 직전인- 아니, 사실상 망한 마몬 가를 지금까지 지탱한 당신의 공로는 인정해요.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의 마몬 가라면 당신으로도 충분하죠. 당신은 훌륭한 집사장이었어요. 하지만 앞으로의 마몬 가에는 아니에요. 당신은 너무 약하거든요.”

    반발의 목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랐던 엘리고스는 오필리아의 마지막 말에 움찔했다. 준비한 말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엘리고스 당신도 알겠지만 집사장은 던전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존재에요. 사실상 던전의 넘버 투라고 해도 좋죠. 그렇다면 자질구레한 일만 처리하는 것으로는 부족해요. 무력까지 넘버 투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집사장이란 직위에 어울리는 무력이 필요하죠. 집사장은 던전 방어의 최종저지선이기도 하니까요. 더욱이 지금 같은 때라면 더욱 더.”

    엘리고스는 이번에도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오필리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던전의 집사장들은 대부분 상당한 무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엘리고스의 머릿속에 포라스와의 전투가 떠올랐다. 그 전투에서 엘리고스 자신은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오필리아는 상큼하게 웃었다. 수심에 젖은 엘리고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 내가 왔으니까.”

    많은 것을 내포한 말이었다. 엘리고스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오필리아는 그런 엘리고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 마몬 가가 지금보다 더 커져서 자유도시까지 영향력을 끼치면… 그때는 저도 선술집 접고 마몬 가로 들어와야죠. 그때는 제가 집사장 자리를 맡을 테니 당신이 무리할 필요는 없어요.”

    오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한 번 엘리고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수고했어요. 앞으로도 조금만 더 수고해주세요.”

    얄밉게 말한 오필리아는 그대로 휙 돌아섰다. 붉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식당을 나섰다.

    ‘이 정도면 됐겠죠? 못된 가주님.’

    던전 내에서 수행한 첫 임무부터가 악역이라니 원.

    물론 용호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까지는 지시해주지 않았다. 그저 엘리고스를 조금 격앙시켜줄 것을 요구했을 뿐이었다.

    레드 데몬은 용호의 예상대로 전투 종족이었다.

    그랬기에 오필리아는 엘리고스가 마냥 실의에 빠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늙었어도, 순둥이 같은 성격이라도 피는 속일 수 없으니까.’

    더욱이 용호에게는 진화의 권능이 있었다. 그 경이로운 기적을 눈앞에서 몇 번이나 본 자가 과연 몇 마디 말에 쉬이 낙담해버릴까?

    ‘다 망해가는 던전을 끝끝내 지킨 근성을 보여줘요. 그건 정말 높이 평가하고 있으니까.’

    식당을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엘리고스의 모습을 슬쩍 살핀 오필리아는 악동처럼 키득 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제 막 마몬 가의 품에 돌아온 사역마 기초 훈련장에 새빨간 열기가 피어올랐다.

    밤이 새도록, 마침내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 제 21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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