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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62화 (62/227)
  • < 제 21장 - 카이완의 유산 >

    제 21장 - 카이완의 유산

    강함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흔히들 강함이라 했을 때 떠올리는 물리적인 힘.

    원하는 것을 강제로라도 이루어내는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폭력.

    마계는 약육강식이었다.

    때문에 폭력 하나만으로도 거의 모든 강함을 대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일뿐이었다.

    전부라 할 수 없었다.

    완력과 마력은 폭력에 해당했다.

    강력한 힘.

    지고한 마력.

    그렇다면 다른 강함이란 무엇일까.

    엠브리오에게 있어 강함이란 원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힘이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이루어내는 것.

    아름다움 또한 훌륭한 강함이었다.

    미희의 마음을 사기 위해 얼간이 짓을 해대는 사내들의 이야기는 참으로 많고 많지 않던가.

    타인의 욕망을 부추겨 따르게끔 만든다.

    아름다움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언변 또한 강함이었다.

    날카로운 송곳과 같은 그것들은 충분히 타인을 찌르는 치명적인 칼날이 될 수 있었다.

    엠브리오는 인정했다.

    그것들은 분명 강함이었다. 하지만 격이 낮은 강함이었다.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들.

    폭력 앞에 색이 바랄 나약한 가치들.

    너무 무식하고 단순한 소리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었다. 엠브리오는 이미 몇 번이나 폭력 앞에 다른 강함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해 왔다.

    눈앞의 강함도 그러했다.

    엠브리오는 부서지고 무너진 자유도시에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작고 아늑한 집 안에 자리했다.

    눈앞에는 무척이나 늙은 나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지혜와 경험이란 강함을 가진 자였다. 그녀는 수십, 수백 번이 넘는 허물벗기를 경험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오며 쌓은 지식과 지혜를 자신의 강함으로 삼았다.

    그녀는 조언자였고, 세상사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지식의 도서관이었다.

    그녀는 엠브리오라는 폭력 앞에 저항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가진 수많은 지식들 가운데 엠브리오를 무릎 꿇게 하거나 안달하게 만들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사 그런 것이 있었다 할지라도 엠브리오는 상대의 강함에 쉬이 굴복하지 않았을 터였다.

    마계는 넓었고, 눈앞의 나가 노인의 지식이란 결국 한계가 있었다. 남부 공백지의 자유도시에 사는 나가 노인이 아는 정도의 지식이라면 마계 어딘가에 똑같은 지식을 가진 자가 존재할 것이 분명했다.

    나가 노인은 그것을 잘 알았다. 그랬기에 섣부른 흥정 따위 하지 않았다. 엠브리오의 폭력 앞에 무릎 꿇었고,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칠대죄악. 일곱 개의 대죄. 누군가는 마신왕의 파편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마신왕 그 자체라고도 부르는 그것.”

    점쟁이 특유의 다소 과장된 어투였지만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엠브리오는 묵묵히 들었고, 나가 노인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마계를 지배한 것은 늘 죄악을 소유한 자들이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죄악은 무엇일까. 대체 어떤 힘이 있기에 소유자들을 ‘왕’으로 만들어 준 것일까.”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엠브리오의 곁을 맴도는 거대한 늑대들이 낮은 으르렁거림을 토했고, 나가 노인은 작게 웃었다.

    “각각의 죄악에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힘이 깃들어 있지. 하지만 그 힘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아는 자들은 없어. 다들 추상적으로 추측할 뿐이지. 색욕의 죄악은 이성을 유혹하는 힘이 있다든지, 격노의 죄악은 분노를 타인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야.”

    격노, 오만, 탐욕, 식탐, 색욕, 질시, 나태.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야. 사용 여부에 따라 분명 어마어마한 힘이 될 수도 있는 능력들이지만, 일곱 개의 대죄- 저 칠대죄악의 진짜 힘은 훨씬 더 순수하고 본질적이라네.”

    나가 노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엠브리오를 바라보았다. 청자의 반응을 살피고 이야기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리는 점쟁이들의 흔한 술수였다.

    엠브리오는 무심한 눈으로 나가 노인을 보았다. 나가 노인은 주름 진 눈을 감았다.

    “폭력의 왕… 그는 마계에 존재하는 저 위대한 일자의 왕- 드래곤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존재라 할 수 있겠지. 그렇기에 그는 죄악이 없음에도 다른 죄악을 가진 왕들과 나란히 설 수 있었어. 그에게는 마계 제일이라 해도 좋을 거대하고 강력한 마력의 덩어리- 드래곤 하트가 존재하니까 말이야.”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왕들 가운데서 죄악을 소유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

    오직 신기만을 가졌음에도 다른 왕들과 나란히 선 절대적인 폭력의 소유자.

    나가 노인은 끝을 예감했다. 엠브리오가 자유도시를 무너트리고 입성했을 때부터 이미 정해진 미래였다. 나가 노인이 가진 강함으로는 엠브리오의 폭력을 꺾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나가 노인은 오랜 삶을 살아온 자답게 깨끗한 마지막을 선택했다.

    “엠브리오, 자네는 폭력의 왕이 아니야. 드래곤이 아니지. 죄악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아. 그렇기에… 자네는 왕이 될 수 없네. 결코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없어.”

    나가 노인은 마지막으로 곰방대를 입에 물었다. 연기를 빨았고, 엠브리오는 작은 집을 떠났다. 늑대들이 나가 노인에게 마지막을 선사해주었다.

    죄악이 없기에 왕이 될 수 없다.

    엠브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리석고 헛된 저항일지 모르지만 부정했다.

    이미 죄악 없이 왕의 자리에 오른 자가 존재했다.

    그 자가 마계 최강의 드래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엠브리오는 남쪽을 보았다.

    저 먼 곳에 위치한 마계의 끝을 주시했다.

    &

    “당분, 당분이 필요해…….”

    밤새도록 카이완의 일지를 해석한 용호는 탁자 위에 철푸덕 엎어졌다.

    소득이라면 분명히 있었다.

    일단 마계문자 독해능력이 크게 늘었다.

    속된 말이지만 외국어는 침대에서 배우는 게 최고라는 말이 있었다. 이성에게 배우는 게 최고라는 게 아니라, 그만큼 언어를 배우고픈 욕망과 관심이 합치되어야 빠르게 익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완의 일지를 해석하는 작업은 꽤나 재미있었다.

    절대로 남의, 그것도 여자 일기장을 훔쳐보는 게 재미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용호 자신은 그렇게까지 타락한 인간이 아니었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어쩐지 모를 강한 부정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카이완의 일지는 꽤 재미있었다.

    용호는 카이완의 일지를 보물지도라 생각했다. 조금씩 파헤치면 결국엔 보물이 있는 장소가 튀어나온다- 이렇게 생각하니 어찌 재미가 없겠는가. 더욱이 딱딱한 문서도 아니었고 일기장이었다.

    아직 마계문자가 서툴러서 문장의 수준을 논하는 것도 우스웠지만 카이완은 생각보다 달필이었다.

    글을 길게 쓰는 일은 별로 없었지만 단문을 자주 사용해서 그런지 가독성이 좋았고, 군데군데 들어간 멘트들이 꽤나 유쾌하고 재치가 있었다. 어쩌면 카이완은 그 겉모습과 달리 은근히 유쾌한 여자였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뭣보다 동생을 끔찍하게 아끼는.’

    일지의 절반은 동생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리 사전 지식 없이 봤다면 카이완이 누나가 아니라 엄마라고 착각할 지경이었다.

    카이완이 실종된 이후의… 동생의 삶에 대해서 카이완이 알았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부모와도 같은,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누이가 이루어낸 것들을 하나 둘 잃어가는 나날.

    병마와 평생을 함께한 나약한 몸이었기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해보지 못했던 전전대 가주.

    카이완은 생각보다 어렸다.

    젊다는 표현 대신 어리다는 표현을 쓴 것은 정말로 그랬기 때문이다.

    ‘나랑 동갑… 많아봐야 한 두 살인가.’

    카이완은 일지를 매일 쓰지 않았다. 연달아 쓰는 날도 있었고, 며칠 간격으로 드문드문 쓸 때도 있었다.

    첫 장에 써져 있는 내용을 보니 이번 일지는 다섯 번째 일지이자 마지막 일지였다.

    대충 일지 한 권이 2년의 세월을 담고 있다고 계산하면 카이완은 스무 살 무렵에 실종된 셈이었다.

    열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망해가는 가문의 가주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십년 동안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가문을 일으켜 세웠다.

    카이완이 어느 정도 강했을 지는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용호 자신보다 몇 배는 더 강했을 것이 분명했다.

    새삼 왼손에 낀 카이완의 반지를 돌아본 용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 초반부 밖에 탐독하지 못한 일지를 덮고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일지에 그려져 있던 지도를 바탕으로 용호가 새로 옮겨 그린 ‘카이완 시대의 던전’이었다.

    그리다 만 데다가, 앞으로의 구상을 담은 일종의 청사진이었기 때문에 현재 숨겨진 구획이 지도대로라는 법은 없었다. 더욱이 전전대와 전대 가주 시절에도 던전의 모습이 변했고, 용호가 아예 던전 개편까지 단행한 터라 지금의 던전과는 완전 딴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용호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무리 던전을 개편하고 뜯어고쳐도 바뀌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던전의 입구와 식수원과 금광과 같이 고정된 장소들이었다.

    용호는 입구와 금광 방까지의 거리를 기준으로 하여 던전 현황도와 카이완의 지도를 똑같은 비율로 다시 그렸다. 그리고 그 둘을 겹쳐 던전 현황도의 빈 공간을 채웠다.

    사역마 훈련장.

    도서관.

    마법 연구실.

    엘리고스가 사랑해마지 않을 전문 고문장과 대형 감옥.

    용호가 갈망하는 투기장은 지도에 그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는 카이완이 이미 1층의 80%이상을 공략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카이완의 청사진에 빈공간이 얼마 되지 않았다.

    투기장이 1층에 존재한다면 그 여백 어딘가에 반드시 투기장 입구가 있을 터였다.

    대강의 지도와 방향성.

    필요한 것은 대강 갖춘 셈이었다.

    “미안.”

    사망- 아니, 실종되었을 때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인지 친구에게 건네는 것 같은 말이 나왔다.

    용호는 카이완의 일지 표지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카이완의 비밀을 더 엿보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리고스와 카타리나, 리쿰을 마왕의 방으로 불러줘.”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리고… 나가시기 전에 세수라도 좀 하시고요. 이왕 잘생긴 얼굴이시잖아요?]

    루시아가 말했고, 용호는 피식 웃었다. 제법 까칠하게 자란 턱수염을 매만졌다.

    &

    “어… 그러니까 지금 가주님께서 가주님의 던전을 탐사하신다는 말씀…이신지요?”

    해괴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들었다는 리쿰의 표정이었다.

    집주인이 자기 집을 탐험한다고 하니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했다.

    괜히 무안해진 용호는 흠흠 헛기침을 토한 뒤 말했다.

    “리쿰 너도 알다시피 마몬 가의 던전은 오래 되었다. 3대 전 가주의 시절에 만든 여러 가지 시설들이 어둠 너머에 숨겨져 있지. 그것들을 찾아내겠다는 말이다.”

    마몬 가의 던전이 사실 탐욕의 미궁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현재 네 사람뿐이었다.

    용호 본인과 예속 사역마인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용호에게 이 사실을 알려준 던전 상회의 시트리.

    리쿰에게까지 비밀을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용호는 아직 리쿰을 카타리나나 엘리고스만큼 믿지는 못했다.

    “아, 그런 말씀이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부하들을 준비시킬까요?”

    3대 전 가주 카이완은 일종의 프리패스와도 같았다. 리쿰이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용호에게 물었다.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탐색은 나와 카타리나, 스컬… 그리고 살라미와 바둑이만으로 한다. 리쿰 넌 부하들과 함께 던전 방비에 힘써줘.”

    던전 탐사는 진화 숙련치를 쌓을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던전의 주력 병력인 카타리나와 스컬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살라멘더- 살라미를 데려가는 것은 빨리 다음 진화와 승급을 시키고 싶은 용호의 개인적인 욕심이 결부된 결과였고, 코볼트- 바둑이는 전령 겸 정찰용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뜻을 받들겠습니다.”

    리쿰이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용호는 엘리고스를 돌아보았다.

    “바둑이를 데려가도 공주개미… 그러니까 유리아는 괜찮겠지?”

    “괜찮을 겁니다. 거의 대부분 자기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요. 고블린 준에게 이런저런 소일거리들을 배우고 있기는 한데… 손재주는 좋지만 좀 멍한 것이 흠입니다.”

    공주개미 유리아는 금광 방 근처에 마련해둔 사육장에서 지냈다.

    아직 어린 공주개미라 크레이지 앤트의 군락을 이루는 것은 무리였지만, 언젠가는 금을 모두 채굴한 금광에 새로운 군락을 건설할 터였다.

    ‘딱히 진화 숙련치 쌓게 해줄 방법이 없다는 게 살짝 문제이긴 한데.’

    이것도 나중에 기초 훈련장 같은 것을 건설하면 어떻게든 해결될 문제이기는 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엘리고스에게 말했다.

    “버그림도 작업장으로 이동하게 한 다음에… 적당히 아무 거나 일을 좀 줘. 의욕이 있는지 확인도 해봐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당장에 필요한 선반이나 의자 같은 것들을 만들게 하겠습니다.”

    아직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어찌되었든 전문 장인이 들어왔기 때문인지 던전의 살림꾼인 엘리고스의 표정이 밝았다.

    당장에 필요한 일들은 대강 다 끝났다.

    오필리아와 엔델리온을 떠올린 용호는 엘리고스도 탐사에 데려가고 싶다는 유혹에 빠졌지만 어찌어찌 견뎌냈다. 엘리고스에게는 당장의 진화보다 더 급한 일들이 여럿 있었다.

    “좋아, 그럼 출발할 준비 갖춰서 10분 후에 여기서 다시 모인다.”

    용호의 말에 카타리나가 얼른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고, 스컬은 대답한 직후 바닥에 나자빠져 하릴 없이 구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0분 뒤.

    어쩐지 모르게 의욕이 넘치는 바둑이를 앞세운 용호는 사역마들과 함께 마왕의 방을 나섰다.

    카이완의 유산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탐사의 시작이었다.

    &

    < 제 21장 - 카이완의 유산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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