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61화 (61/227)
  • < 제 20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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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서두르지 않았다.

    밀고 당기기가 중요한 것은 남녀관계만이 아니었다.

    “나는 네가 일하게 될 마몬 가의 가주 천용호다.”

    용호의 소개에 버그림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타인의 감정을 읽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 용호도 쉬이 알 수 있을 정도로 초조함을 보이더니 이내 축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시 망설이다가 목례로나마 용호에게 예를 갖췄다.

    죽은 눈을 하고 돌처럼 앉아 있을 때보다는 좋은 반응이었지만 썩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어느새 다가온 엘리고스가 용호에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던전 상회의 사역마 보존용 상자에서 나온 뒤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계 내에서 언어를 통한 소통을 해결해주는 ‘마신의 마법’ 덕분인지 일단 말을 알아듣는 것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용호는 진짜 말을 할 수 없는지 여부를 캐물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수염으로 뒤덮인 버그림의 얼굴은 비교적 태연했지만 두 눈은 달랐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저런 상황임에도 마력을 회복할 수 있는 지 묻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말을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용호는 차분히 말했다.

    “네 전용이 될 작업장을 현재 건설 중이다. 네가 충분한 성과를 보인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을 거다.”

    일부러 상상하게 했다.

    명확하게 무엇을 해줄 거라 말하는 대신 생각하게 만들었다.

    버그림이 마른 침을 삼켰다. 조용한 감옥 안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크게 들렸다.

    용호가 다시 말했다.

    “아마 내일쯤이면 작업장에 마련할 숙소로 옮길 수 있을 거다. 그 전까지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곳에서 머물러줬으면 한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서자 버그림이 다시 간절한 눈으로 용호를 보았다. 용호는 무어라 말하는 대신 고개만 한 번 끄덕여 준 뒤 감옥을 나섰다.

    아마 지금쯤 버그림은 속으로 오만가지 상상을 하느라 바쁠 터였다.

    이게 최선인지는 용호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죽은 눈을 하고 축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았다.

    감옥을 나선 용호는 그대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감옥 통로 문을 닫고 나서야 잠시 멈춰 서서 엘리고스와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용호의 의중을 읽은 엘리고스가 먼저 물어보았다.

    “마력에 이상이 생긴 드워프인 겁니까?”

    “아마도. 혹시 드워프에 대해 아는 것 좀 있어? 그러니까 저 친구… 버그림이 속한 이계의 드워프에 대해서 말이야.”

    “으음… 이름이 버그림이었군요.”

    이름도 이제야 처음 알았다는 엘리고스의 반응이었다. 아무래도 이계의 드워프에 대해서는 딱히 아는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용호와 엘리고스의 눈치를 살피던 카타리나가 손을 살짝 들어올렸다.

    “카타리나?”

    “그… 전대 호위기사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력에 이상이 생겼다고 하니… 아마도 제가 들은 드워프 종족 이야기 같아서요.”

    용호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손짓을 하자 카타리나는 목소리를 가다듬듯 헛기침을 한 번 터트렸다. 침까지 한 번 꿀꺽 삼킨 뒤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계에는 마력을 생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을 따로 가지고 있는 종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가주님께서 쓰러트리신 랜드 웜처럼 마력이 체내의 일정 부분에 모였다기 보다는 마치 피를 만들어내는 심장처럼 마력을 만들고 퍼트리는 그런 기관이요.”

    “그럼 그 기관이 상하면 마력을 쓰지 못하게 되는 건가?”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같은 일반적인 마족들은 마력이 집중된 부분이 파괴된다고 해도 마력이 약해질 뿐 마력을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이 충분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마력을 다시 회복 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말씀드린 종족 같은 경우에는 해당 기관이 없어지면 마력 자체를 쓰지 못한다고 합니다. 약간의 비유를 하자면… 도구를 다루는 손발을 잃는 것처럼 말이죠.”

    “과연. 무협 소설의 단전 같은 건가.”

    “네?”

    용호가 작게 중얼거리자 카타리나가 그게 뭐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용호는 대충 얼버무렸다.

    “네가 말한 것과 비슷한 기관이야. 아무튼… 카타리나 말대로라면 어느 정도 이야기가 되는 것 같네.”

    던전 전투 중에 ‘단전 - 일단은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이 망가져서 마력을 쓰지 못하게 된 상황.

    ‘동료도 잃고 이계에 노예로 팔려온 판국에 마력까지 잃어서 더더욱 자포자기하고 말았다-인가.’

    더욱이 마력을 담은 도구를 만드는 데 특화된 종족이라는 던전 상회의 설명이 신경 쓰였다.

    어쩌면 버그림에게 있어 마력의 상실은 목숨의 상실과도 같을지 몰랐다.

    ‘평생 동안 매진한 길에서 강제로 밀쳐져 나간… 그런 느낌일수도 있겠네. 소위 말하는 삶의 목적을 잃었다는 건가…….’

    너무 과한 상상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호는 부정하는 대신 버그림의 동요 섞인 눈을 떠올려 보았다.

    ‘목적을 잃은 삶.’

    그렇다면 과연 용호 자신의 목적은 무엇일까.

    공간의 문을 설치할 수 있을 정도로 던전을 키우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마몬 가를 다시 크게 부흥시키는 것일까.

    단순히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그렇게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호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엘리고스가 카타리나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고, 카타리나는 어느새 또 바닥을 뒹굴고 있는 스컬을 한 번 돌아보더니 입술을 살짝 삐쭉였다. 조심스럽게 용호를 불렀다.

    “가주님?”

    “어, 그래. 어. 음. 맞아. 카타리나가 말한 것과 비슷할 가능성이 높은 것 같네.”

    용호는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상념을 지워버렸다. 엘리고스가 다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혹여 가주님의 권능이라면…….”

    “그래, 아마도 치료가 가능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아예 진화가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표시가 되었을 터였다.

    더욱이 승급은 육체를 어느 정도 재구성하는 효과가 있었다. 잘하면 승급으로도 치유가 가능할지 몰랐다.

    “드워프들은 평소 의심이 많고 타인을 잘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만큼 누군가를 한 번 신뢰하면 그때부터는 그 신뢰를 죽음 이후까지 가져간다고 들었습니다.”

    카타리나의 말에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정말로 용호가 마력 이상을 치유해준다면 버그림은 거의 카타리나나 엘리고스만큼이나 깊은 충성심을 보일 터였다.

    ‘그러고 보면.’

    새삼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를 돌아본 용호는 피식 웃었다. 용호의 갑작스런 웃음에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우뚱 하는 두 사람을 재촉해 감옥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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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옥을 나선 이후로는 크게 설명할 것이 없었다.

    복도에 선 엘리고스는 던전의 심장과 연결되어 있는 마왕의 방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주님의 침실과 카타리나의 침실은 이전처럼 마왕님의 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엘리고스도 딱히 안내할 마음이 없어 보였고, 용호도 일단은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다. 새로 재편된 던전의 핵심 시설들인 금광 방과 무기고, 작업장등을 돌아볼 요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호가 마왕의 방을 등진 순간이었다.

    [흠흠.]

    [흠!]

    [흠흠흠!]

    이제까지 얌전하던 루시아가 돌연 목소리를 냈다.

    성대도 없으면서 연신 헛기침 소리는 내는 것이 어쩐지 의미심장했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걸까.

    고개를 갸우뚱하던 용호는 이내 알아차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키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 애구나.’

    용호가 약속했던 선물.

    ‘생각해보면 아직 생후 한 달도 안 된 애기인건가?’

    상상 속의 루시아의 모습이 소녀에서 아기로 자연스럽게 변하였다. 이런 용호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시아가 다시 한 번 용호를 재촉했다.

    [흐흐흐흠!]

    [흠!]

    조금 더 애를 태워줄까 했지만 용호는 곱게 돌아섰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스컬을 데리고 마왕의 방으로 들어섰다.

    마왕의 방은 놀라울 정도로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그랬기에 용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던전의 심장으로 통하는 비밀 문을 열었다.

    [어머나, 주인님 오셨어요?]

    그렇게 와달라고 졸랐으면서 루시아가 새삼 새침하게 말했다.

    이미 버그림과의 밀당으로 지친 용호였던 터라 루시아를 약올리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던전의 심장 앞에 선 뒤 허리춤에 잘 챙겨둔 주머니를 들어올렸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루시아가 심장박동을 작게 소리 내어 말했다. 그만큼 기대가 큰 모양이었다.

    어쩐지 모를 부담감 속에서 용호는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마력의… 덩어리?]

    다름 아닌 웜 스톤이었다.

    “던전의 심장은 정수나 마력을 흡수해서 성장한다고 들었으니까. 여태까지 제대로 정수 한 번 못 먹여줬는데… 별미라고 생각하고 받아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용호와 정신적으로 연결된 루시아가 신호를 보낸 것일지도 몰랐다.

    용호는 던전의 심장에 웜 스톤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딱딱한 바위같던 던전의 심장이 마치 젤리처럼 부드러워졌고, 이내 웜 스톤을 쑥 받아들였다. 문자 그대로 흡수였다.

    처음 하는 일이었기에 용호는 긴장된 눈으로 던전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도 숨을 죽이고 던전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스컬컬!”

    스컬이 돌연 외친 그 순간 던전의 심장에서 환한 빛이 일었다.

    [맛있다!]

    루시아가 소리쳤다. 행복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맛있어요! 다음 성장을 위한 마력도 상당 부분 채운 기분이고요!]

    [감사합니다, 주인님.]

    아무래도 용호가 무안할까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된 용호는 마찬가지로 기쁘게 웃었다. 이제야 겨우 자유도시에서부터 시작된 일정을 제대로 끝마친 기분이었다.

    하지만 용호는 이내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용호와 마찬가지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카타리나와 달리 웜 스톤을 보고 눈을 껌벅인 엘리고스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너무 미루긴 했네.”

    용호는 스컬과 카타리나를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한 뒤 엘리고스와 마주하고 앉았다. 오필리아의 집무실에 있던 소파가 새삼 부러워졌다.

    ‘이번에 던전 상회가면 하나 사와야겠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나중의 이야기.

    용호는 눈앞의 엘리고스에게 집중했다. 자유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감없이 이야기했다.

    “허… 오필리아가 선술집의 여주인이었다니 정말 놀랍군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엘리고스의 첫 소감이었다. 이번에는 용호가 당황해서 물었다.

    “오필리아를 알아?”

    엘리고스는 전전대 가주 시절에 마몬 가에 들어온 사역마였다. 오필리아와 그 아버지는 전전대 가주가 즉위하자마자 마몬 가를 떠났다고 하니 서로를 마주할 시간이란 것이 없었다. 혹시 떠날 때까지 걸린 약간의 시간 동안 짧게나마 마주했던 것일까?

    엘리고스가 어찌 설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듯 약간 뜸을 들이다 말했다.

    “알기는 합니다만 서류상으로만 압니다. 전전대 가주님의 사역마 명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도 전대 호위기사에게 오필리아의 아버지인 엔델리온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3대 전 가주님의 휘하에서 가장 강한 사역마였다고 했습니다.”

    엘리고스에 연이어 카타리나가 말했다.

    확실히 자유도시의 일각인 선술집의 주인이 될 정도면 상당한 강자였음에 분명했다. 어쩌면 지금의 용호 자신보다도 강할지 몰랐다.

    ‘오필리아도 만만치 않아 보였고.’

    무법의 땅인 자유도시에서 전대 주인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선술집 주인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쩌면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레드 데몬’ 자체가 상당한 전투 종족일지도 몰랐다.

    엘리고스가 다시 말했다.

    “일단은 동족이기도 한 터라 기억에 남겨두었는데… 허허… 자유도시의 선술집 주인을 사역마로 거두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몬 가의 큰 복입니다.”

    선술집이 가진 가장 큰 가치는 정보였다. 애당초 굳이 던전 밖으로 나갔던 이유도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조만간 오필리아가 던전에 방문할 거란 사실까지 모두 전한 용호는 던전의 심장 방을 나서서 바로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금광 방이라든지, 목욕탕이라든지 아직 둘러보고 싶은 시설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잠깐 앉아 있는 사이에 노독이 밀려왔는지 일단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급한 일은 모두 끝났기 때문에 엘리고스는 식사 시간 때 알려드리겠다며 공손히 물러났고, 카타리나도 용호에게 예를 표한 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온전히 혼자가 된 용호는 이제는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한 짚단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정말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집.’

    새삼 버그림을 마주했을 때 떠올렸던 것들이 생각났다.

    마몬 가의 가주.

    던전의 주인.

    용호는 눈을 감았지만 1분도 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 갑자기 의욕이라도 생긴 건지 가만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벗어둔 겉옷에서 엘리고스가 만들어준 마계문자 표를 꺼냈다. 탁자 위에 올려두었던 낡은 마계문자 교본을 펼친 뒤 던전의 심장 방에서 다시 챙겨온 가장 중요한 물건을 손에 들었다.

    3대 전 가주.

    왜곡의 마왕 카이완의 일지.

    용호는 첫 장을 펼쳤다. 어렵게나마 해석을 시작했다.

    제 20장 - 카이완의 일지 끝, 제 21장 - 카이완의 유산으로 이어집니다.

    < 제 20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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