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56화 (56/227)

< 제 18장 #2 >

&

압도당했다.

너무나도 거대한 그것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것 같았다. 아니, 하늘에서 쏟아진 폭우에 파묻힌 것만 같았다.

유린당했다.

정복당했다는 표현이 떠올랐다. 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너무나 보잘 것 없이 느껴졌기에 과연 그런 표현이 합당한지 조차 의심되었다.

혼란 속에 그저 바라보았다.

사고는 정지했고 생각은 끊어졌다.

낱낱이 분석 당했다.

욕망 앞에.

거대한 탐욕 앞에서 본래 하려던 일을 역으로 당했다.

상대에게서는 그리 강한 의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이가 입 안의 사탕을 굴리듯 오필리아라는 존재의 정신을 가지고 놀았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어느 순간 자력으로 정신을 차려서가 아니었다. 어쩌면 너무나 거대한 저 존재가 조금 더 가지고 놀기 위해 일부러 틈을 준 것일지도 몰랐다.

울부짖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없이 강하게 분출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수십, 수백 개나 되는 촉수들이 오필리아의 육신을 옭아맸다. 마치 그 저항이 우습다는 듯 오필리아가 허우적거릴 때마다 더 많은 촉수들이 어딘가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선술집의 여주인 자리는 그저 물려받는다고 해서 유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타인의 정신을 엿본다는 것은 그 자신의 정신을 보호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무력했다. 마치 그 따위 것이 무엇이냐는 듯 고개를 쳐들 때마다 더 큰 벽을 마주할 뿐이었다.

오필리아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촉수들도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공간을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수습할 정신도 여유도 없었다. 숨이 턱까지 닿았지만 감히 멈출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살았다.

이제 살았다.

터무니없이 거대한 위압감이 멀게만 느껴졌다. 압도적인 절망에서 빠져나왔다는 환희가 정신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렇게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세상이 불타올랐다. 하늘과 땅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홍련의 화염에 휩싸였다.

불꽃 한 가운데 존재했다. 몸이 타들어갔다. 생으로 육신이 불타는 고통은 지금까지 겪은, 상상해본 어떤 고통보다도 더 끔찍했다.

하지만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거대하고 거대한 불타는 눈동자가 눈앞에 있었다. 그것이 오필리아를 내려다보았고, 오필리아는 턱을 떨었다. 다시 한 번 압도적인 존재에 짓눌려 눈물을 쏟아냈다. 입에서 바보처럼 침이 흘러내렸다.

개미에게 있어 인간의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과연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일 것인가.

눈동자에 무심함이 스쳤다.

오필리아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육신에 붙어있던 불이 일순간 크게 타올랐다.

인생을 돌아본다는 주마등도 없이 그저 소멸하려는 순간.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다시 나타난 촉수들이 불꽃을 대신해 오필리아의 몸을 휘감았다. 오필리아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존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그 육신도, 영혼도, 머리칼 한 올조차도.

그러니 허락할 수 없다.

이 보잘 것 없는 계집의 삶도 죽음도 이제는 나의 것이니.

육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그 자체가 발하는 힘이었다.

붉고 붉은 눈동자는 오필리아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오필리아는 순간이지만 눈동자가 미소를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하소서.

아직은 미숙한 나의 왕이여.

불꽃이 사라졌다. 세상 전체를 뒤덮던 홍련 대신 푸른 밤이 모든 것을 채웠다.

오필리아는 그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고개를 떨구었다.

오필리아를 감싼 촉수가 녹색의 불꽃으로 화했다. 동시에 너무나 높은 곳에서 들려오던 목소리 대신 어쩐지 친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머물렀다.

“찾았다.”

오필리아는 눈을 떴다. 등 뒤를 돌아보았다.

‘커헉!’

정신적인 신음이었다. 입술은 여전히 맞닿아 있었다. 마치 서큐버스가 혼을 탐하듯 가볍게 뒤섞인 혀와 타액 또한 그러했다.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멍청한 얼굴로 넋이 나가 있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손을 꽉 움켜쥔, 다른 한 손으로는 오필리아 자신의 멱살을 틀어쥔 채 무시무시한 녹색의 귀화를 불태우는 한 사람의 가주였다.

오필리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의 앞에 있는 존재가 누구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몸이 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용호는 움켜쥐고 있던 멱살을 놓았고, 유일한 지지대를 잃은 오필리아는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몸을 떨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압도적인 공포에 질린 나머지 실금까지 하고 말았다.

아무 소리도 없자 살짝 눈을 떴다가 용호와 오필리아가 키스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카타리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리쿰이 보기에도 난데없이 오필리아가 용호에게 키스하더니 연이어 바닥에 나자빠진 상황이었다.

용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 너머에 주저앉은 오필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오필리아는 그런 용호를 보았고, 이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 탐욕의 왕.”

말한 순간 인지했다. 세상을 불태우던 홍련의 불꽃.

너무나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붉고 붉은 눈동자.

홍련의 마창 아몬.

탐욕의 왕 마몬의 상징과도 같은 그것!

환희와 공포와 절정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포라스의 죽음.

갑자기 강력해진 카타리나.

다시 일어서기 시작한 마몬 가.

탐욕의 왕 마몬 이래 자취를 감추었던 칠대죄악 가운데 하나.

‘탐욕’이 돌아왔다.

동시에 저 홍련의 마창 아몬조차도 오랜 잠에서 깨어나 돌아온 탐욕의 왕과 함께 했다.

마왕 엠브리오가 일으킨 난세.

혼란에 빠진 공백지.

그것은 누구를 위해서인가.

답은 자명했다. 오필리아는 전율했다.

떨리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다른 한쪽 무릎을 세웠다. 공손히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했다. 목소리를 떨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단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환희와 감동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엔델리온의 딸 오필리아. 마침내 돌아오신, 탐욕의 왕을, 뵙나이다.”

오필리아의 이마 위로 빛으로 된 문장이 형성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대로부터 이어진 마몬 가 사역마의 문장이었다.

용호는 그런 오필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를 받아들였다.

&

새로 귀빈실로 안내받은 용호는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소파 위에 앉았다. 다인용 소파였기 때문에 그 오른편에는 카타리나가 자리했고, 왼편에는 스컬이 자리했다. 리쿰은 옆에 놓인 일인용 소파에 앉았다.

일행을 안내한 하피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그 두 눈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빛이 어려 있었다. 눈앞의 존재가 대체 누구이길래 오필리아가 무조건 절대 복종하라는 명을 내렸단 말인가.

하피는 호기심이 많았지만 동시에 어리석지도 않았다. 불필요한 호기심은 화를 자초한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귀빈실로 용호를 안내한 뒤 공손히 예를 표하고 방을 나섰다.

탐욕에 이어 아몬을 마주한 대가로 실금까지 해버린 오필리아였던 터라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필요했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킨 뒤 손끝으로 입술을 어루만졌다.

‘운이 좋았어,’

설마 오필리아가 정신 쪽으로 침투를 해올 줄이야.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당해보지 못한,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의 공격이었다.

다행히 오필리아는 탐욕 앞에 자멸하고 말았다. 설사 탐욕이 나서지 않았다 할지라도 아몬이 그녀를 가로막았을 터였다.

‘정신 방어 쪽은 오히려 무적에 가까운 거 아냐?’

현실에서는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탐욕과 아몬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그 본질까지 쇠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탐욕.

한 번 휘둘러 천지를 불사르는 홍련의 마창 아몬.

새삼 둘의 존재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용호 자신의 안에 얼마나 거대한 힘이 맥동하는지 깨달았다.

탐욕이라는 거대한 홍수 속에서 의지를 발해 오필리아를 찾아냈다는 사실과 아몬에게서 오필리아를 양보 받았다는 것 역시 기뻐할만한 성과였다. 아직 감당 못할 힘이었지만 탐욕과 아몬 모두 용호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의식중에 입술을 매만지던 용호는 순간 손을 멈췄다.

‘처, 첫 키스.’

남중 남고 공대라는 기적의 테크트리를 타던 용호였다. 여자친구는커녕 여자사람친구조차 없었던 세월이 곧 나이이지 않았던가.

뭔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첫 키스였다. 그것도 제법 농염한 프렌치 키스 말이다.

‘기억이 안 나.’

상황이 상황이었다 보니 입술의 감촉이라든지, 첫 키스의 느낌이라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무언가 억울했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아무 생각 안 나는 게 환장할 지경이었다.

‘릴렉스.’

이런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용호 자신은 치킨집 아들내미이자 미팅 한 번에 사활을 거는 컴공과 신입생 인간 천용호가 아니었다.

마몬 가의 가주.

일곱 개의 대죄 가운데 하나인 탐욕을 소유한 탐욕의 마왕!

‘아니, 씨발! 그래도!’

저도 모르게 후하고 한숨을 내쉰 용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멍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던 카타리나가 깜짝 놀라 움찔했다.

“카타리나?”

“가, 가주님께서 원하신다면! 그,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귀를 축 늘어트린 채 꼬리를 빳빳이 세운 카타리나가 횡설수설하다 시선을 내리 깔았다.

잠시 카타리나가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던 용호는 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숫자를 헤아렸다.

‘릴렉스.’

생각해보니 카타리나나 리쿰은 아직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갑자기 오필리아가 용호 자신에게 키스하더니 바닥에 나자빠졌고, 연이어 충성을 맹세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천성 가운데 하나인 엉큼함을 필사적으로 억누른 용호는 헛기침을 터트렸다. 카타리나의 발언 때문에 묘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듯 오필리아와 있었던 일을 간추려서 이야기했다.

“아! 그래서!”

비로소 이해가 갔는지 카타리나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스컬 또한 껄껄껄 기분 좋게 웃었다.

용호에게 탐욕과 아몬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리쿰은 완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지만, 일단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일이다보니 적당히 수긍하는 눈치였다. - 오필리아가 용호를 탐욕의 왕이라 부르는 것도 마몬 가의 가주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

마침 설명이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오필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과 거의 똑같은 바텐더 복장이었다.

“위대하신 왕과의 대면에 그만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미천한 오필리아가 탐욕의 왕께 감히 용서를 청합니다.”

용호 앞에 무릎 꿇은 오필리아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이 정도의 극존대는 처음 겪는 용호였던 터라 다소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제법 여유롭게 말했다.

“용서한다. 일어나 자리에 앉아라, 오필리아. 네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감사합니다, 탐욕의 왕이시여.”

다시 한 번 예를 표한 오필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용호의 맞은 편 소파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자유도시의 일각을 담당하는 선술집의 여주인 오필리아.

그녀가 용호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마몬 가의 사역마가 되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 째, 아니 밭 째로 굴러들어온 상황이었다.

오필리아가 선술집의 여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재력과 정보력. 휘하에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했다. 금광과 무기고를 되찾았을 때의 환희와도 같았다.

아래 층에 자리하고 있는 선술집의 무사들, 창기들, 도박사들.

그들 모두가 마몬 가의 사역마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선술집 여주인 오필리아에게 고용된 이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고용주인 오필리아가 용호 자신의 것이었다.

용호는 지나친 흥분을 경계했다. 선술집에 방문했던 첫 번째 목적을 상기했다.

오필리아에게 물었다.

“이 근방 가주들의 정보를 원한다. 북부에 나타났다는 마왕에 대해서도.”

기다렸던 질문이라는 듯 오필리아가 바로 입술을 열었다. 정보에 목말라 있던 용호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사실들을 입에 담았다.

&

< 제 18장 #2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