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54화 (54/227)
  • < 제 17장 #3 >

    &

    용호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정수 흡수를 경험했다.

    마인인 방랑마족과 오크 전사 테라크.

    던전 몬스터인 크레이지 앤트 여왕개미의 정수.

    같은 마왕 클레스인 냉기의 마왕 포라스의 정수.

    랜드 웜의 정수는 그것들 모두와 달랐다. 그나마 여왕개미의 정수와 흡사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흡사할 뿐이었다. 본질적인 면에서는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정수의 순수함, 강력함- 질적으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 양이 참으로 충만하였다.

    정수 흡수의 쾌감이 등줄기를 꿰뚫었다. 마치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용호는 이질감을 느꼈다. 정확히는 탐욕이 포착해냈다.

    팔찌에서 새어나온 은색의 마력이 랜드 웜의 정수인 주황색 마력과 함께 호흡했다. 자극했고, 더욱 큰 맥동을 유도했다.

    용호는 거친 숨을 토했다. 정수 흡수로 커진 ‘마력의 그릇’ 자체는 별로 되지 않는데, 쏟아지는 마력이 빈 공간을 채우고도 남았다. 더 이상의 마력 흡수는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래도 쾌락이었다. 먹다가 토할지언정 탐욕은 계속해서 마력을 먹고 싶어 했다.

    용호는 절제했다. 제멋대로 날뛰는 탐욕의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팔찌에서 새어나온 마력. 유독 랜드 웜의 마력과 호응하는 그것.

    팔찌는 카이완의 집무실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마도 투기장에서 카이완이 찾은 아티펙트 같았고, 약간의 마력이 저장되어 있을 뿐 딱히 특이한 점은 없었다. 엘리고스는 마력을 저장해두는 일종의 배터리 같다고 했다.

    팔찌에 저장된 마력은 카이완의 것이 아니었다. 카이완의 반지에 남아있는 권능과는 그 성격이 달랐고, 용호 자신의 것과도 달랐다.

    ‘웜의 것과 닮았어.’

    그랬다. 오히려 랜드 웜의 마력과 닮아 있었다. 어쩌면 팔찌의 마력은 ‘마인’이 아니라 ‘마수’의 것일지도 몰랐다.

    랜드 웜은 이상할 정도로 용호 자신에게 집착했었다. 용호 자신이 랜드 웜의 머리 위에 올라가 시야에서 벗어나기 전까지는, 그 위치를 랜드 웜과 동일시하기 전까지는 스컬이나 리쿰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어쩌면 이 팔찌의 마력이 이번 사건의 원인인 것은 아닐까?

    랜드 웜의 마력과 호응하는 이것이, 투기장의 이름 모를 마수의 것임에 분명한 이 마력이!

    용호가 손을 크게 뿌리쳤다. 무익한 정수 흡수를 중단하고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단번에 현실이 몰아닥쳤다. 죽은 랜드 웜의 체내는 어두웠고 숨 쉬기가 힘들었다. 뭔지 모를 체액들이 쏟아져 몸을 뒤덮었다. 몸이 무거웠다.

    용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뒤 다시 랜드 웜의 심장에 손을 집어넣었다. 주황색 마력의 자취를 쫓아 주먹만한 크기의 단단한 돌덩이를 찾아냈다.

    웜 하트. 혹은 웜 스톤.

    무어라 불러도 좋았다. 못해도 수십 년을 넘게 살아온 거대한 랜드 웜의 심장에 축적된 마력을 먹고 자란 마정석이었다.

    용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에 웜 스톤을 쑤셔 넣은 뒤 탐욕의 불길을 일으켰다. 몸에 붙은 진액들을 불태움과 동시에 불길을 조명삼아 카타리나를 찾았다.

    랜드 웜이 날뛰는 와중에 어딜 잘못 부딪히기라도 했는지 카타리나는 빈사 상태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얼굴을 뒤덮은 진액들 때문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번 전투의 일등공신은 누가 뭐라 해도 카타리나였다.

    용호는 아몬을 잠시 바닥에 꽂은 뒤 두 손으로 카타리나를 들어올렸다. 카타리나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무리 가벼운 카타리나라도 한 손만으로 들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마치 짐을 지듯 카타리나를 왼쪽 어깨에 짊어진 용호는 팔 다리를 축 늘어트린 카타리나의 허리와 등을 단단히 붙잡았다. 다시 아몬을 뽑아들고 일어섰다.

    랜드 웜이 죽긴 죽었는데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랜드 웜의 몸체 일부는 여전히 땅속에 있었으니 들와왔던 입 외에는 출구가 없는 셈이었다.

    다행히 구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컬컬! 스컬컬!”

    뭔가에 막힌 듯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방향을 잡기에는 충분했다. 용호는 자세를 낮춘 뒤 전진을 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컬컬컬!”

    락 골렘의 괴력으로 랜드 웜의 입을 크게 벌린 스컬이 보였다. 그야말로 고지가 멀지 않았기에 용호는 힘을 냈다. 여전히 위협적인 랜드 웜의 뾰족한 이빨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카타리나를 스컬에게 넘겼고, 연이어 용호 자신도 랜드 웜 밖으로 나왔다.

    “크허.”

    공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용호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크게 골랐다. 정수 흡수의 여운도 있겠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나자빠져서 한 숨 푹 자고 싶었다.

    하지만 용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카타리나를 바닥에 눕힌 스컬이 허둥거리며 용호를 보았다.

    상태가 좋지 못했다. 단순히 어딜 부딪히고 끝난 것이 아닌 지 밧줄에 쓸려 피부가 벗겨진 허리 부근에서 정도 이상으로 피가 흘러내렸다. 머리 역시 어디가 깨지기라도 했는지 흘러내린 피가 한 쪽 눈을 뒤덮을 지경이었다.

    용호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몬을 내려놓은 뒤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일단 밧줄을 잘라냈다. 저만치 먼 곳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오직 카타리나에게만 집중했다.

    금광 탈환전에 이어 포라스와의 던전 전투, 그리고 랜드 웜과의 싸움까지 경험한 카타리나였다. 용호는 간절히 소망하며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진화 숙련치 100/100]

    다른 것 다 필요 없이 한 항목만을 확인했고, 안도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배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부드럽게 움켜쥐며 마력을 주입했다.

    이전에 이미 카타리나와 이야기를 했던 대로 다크 엘프와 서큐버스의 특성을 모두 가진 ‘쉐도우 러너’로의 승급을 단행했다.

    녹색의 마력이 카타리나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연이어 검은 실루엣이 카타리나의 몸 위에 그려졌고, 카타리나의 복부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일었다. 랜드 웜의 정수를 흡수해 충만해진 용호의 마력을 거의 절반 가까이 먹어치웠다.

    빛이 사라졌다. 새삼 마른 침을 삼킨 용호는 카타리나를 보았다. 여전히 얼굴과 배에 피가 묻은 상태였지만 상처는 깨끗하게 사라졌다. 승급 이후 외형상의 큰 변화는 당장 보이지 않았지만 - 묘하게 색기가 감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다. - 마력이 크게 성장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얼핏 검은 마력의 아지랑이가 카타리나의 몸 주위에서 피어올랐다.

    가주가 강해지면 예속 사역마도 강해졌고, 그 역 또한 성립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성장을 확신했다.

    “후아.”

    용호는 카타리나의 몸 위에 거의 엎드리듯 하며 숨을 길게 토했다. 이제야말로 한숨 돌렸다는 느낌이었다.

    그런 용호 앞에서 스컬이 껄껄 웃으며 기뻐했다. 기쁨을 표현하겠다는 듯 망치를 붕붕 휘둘렀다.

    ‘그러고 보니.’

    다시 상체를 일으켜 세운 용호는 가죽 주머니에서 웜 스톤을 꺼내들었다. 재차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켜 보았다.

    저도 모르게 씩 웃었다. 녹색의 안광에 가느다란 선들이 보였다. 웜 스톤에서부터 뻗어나간 하얀 빛의 선들이 카타리나와 스컬에게 이어져 있었다.

    ‘합체 진화.’

    아니, 이건 사역마와 사역마의 합체가 아니니 ‘합체’가 아닌 ‘강화’라고 해야 할까?

    진화 숙련치가 둘 모두 100이 아니라 그런지 합체 진화 때처럼 빛의 문자가 떠오르진 않았지만 무언가 결합이 가능하단 사실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좋아.’

    예기치 않은 랜드 웜의 기습으로 목숨이 위험하긴 했지만 동시에 얻은 것 역시 많았다.

    용호는 의식적으로 왼팔에 찬 팔찌를 돌아보았다. 랜드 웜의 정수를 흡수할 때 함께 소진되었는지 팔찌의 마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투기장의 팔찌.’

    용호의 예상대로라면 카이완의 일지에 관련된 기록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만약 정말로 팔찌의 마력이 근방을 지나던 랜드 웜을 유도한 것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활용할 방안이 있을 터였다.

    진화의 권능을 해제한 용호는 웜 스톤을 다시 주머니에 갈무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멀리서 들리던 소란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장님! 대장님!”

    요란한 흙먼지를 일으키며 일단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선 것은 분명 리쿰이었다.

    ‘가주’라 부르지 않고 ‘대장’이라 부르는 모습에 잠시 당황한 용호였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유도시 사람들에게 용호가 가주임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용호는 아몬을 허리춤에 꽂아 넣은 뒤 두 손으로 카타리나를 안아들었다. 스컬은 전투망치를 단단히 움켜쥔 채 다가오는 무리들을 주시했다.

    가장 먼저 당도한 리쿰이 정지와 동시에 말에서 뛰어내렸다.

    리쿰의 얼굴에는 기쁨과 황당함, 다급함이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다.

    설마하니 정말로 저 거대한 랜드 웜을 쓰러트릴 줄이야. 설사 포라스라도 지금 같은 일은 해내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리쿰은 기쁨과 경탄의 말을 쏟아내는 대신 용호와 더욱 거리를 좁힌 뒤 빠르게 말했다.

    “자유도시의 해체업자들이 오고 있습니다. 랜드 웜의 시신을 거래하려고 할 겁니다.”

    “해체업자?”

    “마수들의 시신으로 장사를 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저것 쓸 곳이 많으니까요. 당장 랜드 웜만 해도 가죽과 각질, 이빨, 고기 등등 뼈 말고는 버릴 것이 없을 지경입니다.”

    하기야 곰이나 호랑이만 잡아도 가죽을 벗기고 이빨과 발톱을 뽑아 뭔가를 만드는 것이 인간이었다. 마계의 사람들이라 해서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용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해체업자들을 보았다. 고블린이나 오우거도 있었고, 드워프처럼 생긴 마족도 있었다. 크고 작은 이들을 모두 합치면 못해도 스무 명은 족히 될 것 같았다.

    마계는 약육강식.

    용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이제 거의 당도한 해체업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들이 강탈을 시도할 가능성은?”

    스컬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전투 망치를 움켜쥐고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리쿰이 웃으며 답했다.

    “평소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눈앞에서 이렇게 거대한 랜드 웜을 쓰러트린 ‘웜 슬레이어’에게서 감히 강탈을 시도할 간 큰 녀석은 없을 겁니다.”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만연했다. 아무래도 용호가 카타리나, 스컬과 협력해 랜드 웜을 쓰러트리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크는 전사의 종족. 위대한 일을 해낸 강력한 전사에게 경의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용호는 의식을 잃은 카타리나를 고쳐 안은 뒤 해체업자들을 맞이했다. 어차피 랜드 웜의 시신을 던전까지 끌고 갈 방법도 없었으니 가격만 후려치지 않는다면 해체업자들에게 시신을 넘기고 돈을 챙기는 것이 용호에게도 이득이었다.

    시세에 어두운 용호 대신에 리쿰이 해체업자들과 가격 협상을 진행했다. 웜 스톤을 이미 빼냈다는 말에 해체업자들이 다소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시신의 상태가 워낙 좋았기에 이내 활발한 협상이 진행되었다.

    리쿰에게 거래를 위임한 채 한 발 물러선 용호는 자유도시 쪽을 보았다. 예기치 못한 랜드 웜의 조우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관심을 끌고 말았다.

    랜드 웜과의 조우가 과연 끝까지 길할 것인가, 아니면 흉으로 바뀔 것인가.

    자유도시 쪽에서 다시 마인 하나가 다가왔다. 던전 상회에서 카탈로그에서 본 적이 있는 하피였다.

    검은 머리칼과 갈색 날개를 지닌 하피는 용호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공손히 예를 표했다. 하피 특유의 아름다운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선술집의 주인께서 여행자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확실히 이목을 끌긴 끌었나 보다.

    용호는 바로 답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자유도시 쪽을 보았다.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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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도시는 ‘던전 없는 영지’라 해도 좋았다.

    마치 던전이라도 되듯 여러 종류의 마인, 마수들이 한 곳에 모여 살았고, 나름대로의 질서를 유지했다.

    자유도시 뉘른베르크를 지배하는 것은 세 명의 ‘던전 없는 가주’였다.

    서로 비등할 정도의 힘과 세력을 가진 이 셋은 자유도시를 삼분했고, 저마다의 구역에서 왕으로서 군림했다.

    물론 그들은 던전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었다. 마왕이라 할 수 없었고, 휘하에 거느린 세력 역시 가주들의 사역마처럼 제대로 된 지배체계를 갖추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은 자유도시를 지배하는 자들이었다.

    세 명의 던전 없는 가주.

    그 중에서 용호에게 만남을 청한 것은 선술집의 여주인.

    레드 데몬 오필리아였다.

    제 17장 - 자유도시 끝, 제 18장 - 불꽃의 마왕으로 이어집니다.

    < 제 17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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