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50화 (50/227)
  • < 제 15장 #3 >

    &

    “가주님과 마몬 가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사역마들의 생활관.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이니 커다란 생활관도 제법 비좁게 느껴졌다.

    사역마들은 저마다 마계 맥주가 든 술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손이 없는 살라멘더는 맥주가 든 양동이를 머리맡에 두었고, 트리엔트는 덩굴로 감아쥔 맥주잔을 자기 뿌리에 뿌렸다.

    엘리고스는 정말로 통 크게 물자를 풀었다.

    용호가 새로 주문한 물자가 불의의 사고로 내일 도착하지 못하면 며칠을 굶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말이다.

    이전에 사냥해서 비축해둔 고기들, 던전 상회에서 사들였던 우유와 달걀에 밀가루를 팍팍 풀어 만든 팬케이크와 각종 야채 볶음.

    사실 그리 대단한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양만은 푸짐했다.

    유일한 흠이라면 음식에 비해 맥주의 양이 너무 적은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간 마몬 가에 술을 마실만한 상황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그나마도 엘리고스가 혹여 용호가 필요로 할지 모른다 생각해서 한 통 사둔 것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다들 물 잔만 들고 있을 뻔 했다.

    오크들은 용호의 생각 이상으로 호쾌한 종족이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개체차일지 모르겠지만, 어찌되었든 마몬 가에 새로 고용된 오크들은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몬 가를 먼저 공격한 것은 포라스였다.

    또한 포라스와 사역마들은 용호와 그 휘하 사역마들을 죽이고자 했다.

    리쿰과 오크들 역시 목숨을 걸고 다른 이의 목숨을 탐하려 한 것은 다르지 않았다.

    던전 전투- 특히 던전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가주들 간의 싸움은 치열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싸움에서 포라스는 패했고 용호는 승리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미 끝난 이 싸움에 원한이나 복수 같은 단어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

    겨우 한 잔 뿐이었지만 술이 분위기를 돋아주었다.

    오크들은 자신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고블린들은 저들끼리 춤을 추며 좋아했고, 코볼트 역시 방정맞게 꼬리를 흔들며 컹컹 잘도 짖어댔다. 공주개미는 멍하니 앉아 그런 모두를 지켜봤다. 음식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니면 분위기가 좋았는지 아주 작게나마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보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번에 마몬 가의 사역마들 가운데 ‘죽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아가 없는 클레이 골렘과 락 골렘 둘 뿐이었다.

    만약 다른 사역마들 가운데 목숨을 잃은 이가 있었다면 지금처럼 부드럽게 오크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터였다.

    용호도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다. 마계는커녕 외국산 맥주도 제대로 마셔본 적이 없는 용호였지만 어찌되었든 알콜은 알콜이었다. 인계의 것보다 조금 독한지 금방 알싸하게 술기운이 돌았다.

    “의외네.”

    “네?”

    용호가 말하자 바로 옆에 앉아 고기를 잘라먹던 카타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용호는 구태여 대답하는 대신 속으로만 생각했다.

    ‘술 약할 줄 알았는데, 꽤 세네?’

    제법 큰 잔을 원샷 했는데도 멀쩡한 카타리나였다. 이번에도 허당스럽게 술에 약한 모습을 보여줄 거라 생각했는데.

    이유모를 약간의 아쉬움 속에 용호는 술잔을 드는 것으로 얼굴을 가렸다. 카타리나는 다시 몇 번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용호의 측근인 또 한 사람.

    “스컬컬.”

    스켈레톤인 터라 맥주를 마시지 못하는 스컬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대신 트리엔트의 뿌리에 맥주를 뿌려주었다. 남들보다 맥주를 두 배나 마신 덕분인지 트리엔트는 몸을 흔들며 행복해했다.

    그렇게 약 두 시간.

    회식을 마친 용호는 고블린 레인져들과 오크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뒤 던전의 핵심 인사들을 이끌고 마왕의 방으로 향했다.

    집사장인 엘리고스.

    호위 기사인 카타리나.

    마몬 가 전투의 에이스인 스컬.

    새로 합류한 오크들의 수장인 리쿰.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에 취했기 때문인지 몸이 꽤 노곤했다.

    하지만 그래도 내일을 맞이하기 전에 의논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늘 하루 바쁘게 여러 일들을 처리했지만 그래도 아직 시급을 다투는 일들이 많았다.

    “내일 오전에 던전 상회에서 택배 기사가 올 거야. 그러니 그 전에 대강이나마 던전 재배치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면 해.”

    카타리나는 애당초 용호와 함께 설명을 들었고, 스컬은 부르긴 불렀지만 의견을 낼 리 만무했다.

    엘리고스와 리쿰은 각기 노련한 집사와 전사답게 던전 재배치가 무엇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번 던전 방어전을 통해 던전 구조가 방어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달은 용호였다.

    던전 전투의 무대가 되는 것은 던전 그 자체였다.

    던전 방어자는 자신이 유리한 '전장'을 구축해야만 했다.

    전투의 여러 승리 요소 가운데서도 결코 그 비중이 작지 않은 '지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니, 그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공간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길을 꼬기만 하면 '벽 파괴'에 취약해진다.

    그렇다고 직선으로 쭉 뻗은 길을 만들면 던전의 방어력이 취약해진다.

    너무 방어에만 신경 써서 구조를 결정하면 던전 생활에 수많은 불편함이 생긴다.

    용호는 빛의 창을 크게 펼쳤다. 던전 입구 방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새카만 던전 현황도를 만들었다.

    용호와 사역마들 모두가 동의한 것은 마왕의 방과 던전의 심장 방을 좀 더 안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무기고와 금광까지의 거리는 기존의 마왕의 방에서 입구 방까지의 거리보다도 더 멀었다. 이 거리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방어력 증강을 기대할 수 있었다.

    한 번 이상 확인한 비활성화 방들은 거의 대부분을 메워버리기로 했다. 빈 공간을 그때그때 활용하는 것은 매력적이었지만, 텅 빈 공간은 벽 파괴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았다.

    [현재 제 통제 범위 내에 있는 ‘확인한’ 비활성화 방들 가운데는 선대 가주님들의 유산이 잠들어 있는 방이 없습니다.]

    마몬 가의 던전에는 아직도 비밀이 너무 많았다.

    던전의 영혼이 현재 통제 가능한 범위라고 해봐야 1층 전체의 2할에서 3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 범위 밖에 존재하는 것들은 과연 비활성화 방인지, 그냥 막힌 공간인지, 유산이 잠들어 있는 방인지 구분이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나하나 탐사해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던전 재배치 과정 중에 움직일 수 없는 금광이 기준점이 되었다.

    용호는 금광과 가까운 곳에, 즉 최대한 안쪽에 마왕의 방과 던전의 심장을 배치했다.

    마왕의 방에서 던전 입구 방까지의 통로는 적당히 꼬는 선에서 만족을 했다. 사역마 생활관이나 식량 창고 같이 안쪽에 위치해야만 하는 시설들을 배치할 공간을 확보하다보니 마왕의 방 부근은 절로 길이 단순해졌다.

    “기본 얼개는 이렇게 잡고… 다음은 새로 추가할 던전 시설인가.”

    현재 던전에 존재하는 시설들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금광, 무기고, 사역마 생활관, 자재창고, 감옥, 고문실.

    용호는 손가락을 놀려 빛의 창에 새로 추가 가능한 시설들을 나열하였다.

    수원과 수로, 던전 감옥, 던전 사역마 생활관, 던전 기초 훈련장, 던전 기초 작업장.

    마음 같아서는 한 번에 전부 다 추가하고 싶었지만 마력과 자재 등의 문제 때문에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일단 사역마들이 이구동성으로 찬성한 것은 - 물론 스컬은 스컬컬 거렸기에 알 수가 없었지만 - 수원과 수로의 건설이었다.

    특히 수로는 던전 구조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시설들을 설치하기 전에 수로를 먼저 건설하는 것이 맞았다.

    [수원이 될 수 있는 지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던전 생활의 중심이 될 수도 있는 곳이니 가능한 안쪽에 배치하시길 추천 드립니다.]

    현재 통제 범위 내에서 수원으로 선택할 수 있는 후보지는 모두 셋이었다. 용호는 그중에서 가장 마왕의 방과 가까운 것을 골랐다.

    던전 현황도에 수원을 표시한 뒤 수로를 연결하자 졸졸졸 물이 흐르는 것 같은 효과가 추가되었다.

    진짜로 설치한 것도 아니고, 던전 현황도에 나타난 것뿐임에도 어쩐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용호는 슬쩍 엘리고스 쪽을 보았다. 매일 아침 물 뜨러 던전 밖을 나가야 했던 엘리고스인만큼 수로 설치의 감회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 예상과는 살짝 달랐다.

    엘리고스는 던전 현황도를 보며 안절부절 못했다. 마치 격렬한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는 것 같았다.

    “가, 감옥이… 큿 하지만 역시 수로가…….”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지만 다들 침묵하고 있는 터라 잘 들렸다.

    용호는 키득 웃으며 사역마들이 수원과 수로 다음으로 추천한 던전 시설을 추가했다.

    던전 사역마 생활관이었다.

    사역마들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고, 던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역마들이 필요했다.

    사역마들의 역할이나 종족에 맞춰서 생활공간을 따로 배정해줘야 하니 지금의 생활관만으로는 공간이 부족했다.

    수로와 생활관을 신설하고 나니 가용 가능한 마력과 자재가 다소 애매하게 남았다.

    엘리고스는 혹여나 감옥이 가능할까 싶어 계산을 하기 시작했고, 카타리나와 리쿰은 그냥 남기는 것을 추천했다. 그리고 스컬은 언제나처럼 스컬컬 호쾌하게 말했다.

    하지만 용호는 누구의 의견도 따르지 않았다.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던전… 기초 작업장?”

    새로 추가된 던전 시설을 보고 카타리나가 눈을 깜박였다. 엘리고스와 리쿰도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사역마들의 표정을 충분히 즐긴 용호가 말했다.

    “제조 기능이 있는 사역마를 하나 구매했어. 엄청난 건 만들어내지 못하겠지만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자체적으로 생산이 가능할 거야.”

    용호의 말에 카타리나는 입을 헤 벌렸고, 이미 포라스의 던전에서 장인들을 몇이나 본 리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엘리고스는 늘 그랬던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이 되었다.

    “오오… 수로에 이어 이제는 작업장과 장인까지… 마몬 가의 던전이 드디어 제대로 된 기틀을 갖춰가는 것 같습니다.”

    엘리고스의 말에 자극 받았는지 카타리나 역시 감격한 얼굴이 되었다. 리쿰이 용호에게 물었다.

    “어떤 사역마를 구하셨는지요? 장인들은 그 기술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터라… 자유 사역마 장인일 경우엔 터무니없는 보수를 요구하는 경우도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

    “3성 노예 사역마 중에서 드워프를 골랐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너무 대단한 건 기대할 수 없겠지만 실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충분히 생산이 가능할 거야.”

    그리고 용호에게는 진화의 권능이 있었다. 장인 기술이란 것이 육체적 진화와는 얼핏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열심히 기량 특화와 속성 특화를 해주다보면 성과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포라스의 던전에도 드워프 장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성격이 투박하기는 해도 손재주가 좋은 친구였죠. 드워프마다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잘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던전 기초 작업장까지 추가하고 나니 던전 현황도가 정말 그럴싸하게 변했다.

    ‘감개무량하네.’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마왕의 방 이외에는 이렇다 할 시설 하나 없는 황량한 던전이었는데.

    겨우 감상에서 빠져나온 엘리고스가 용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던전 재배치를 위해서는 상당한 마력과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일 던전 상회 택배 기사가 도착한 이후부터 재배치를 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대격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던전을 뜯어고치는 작업이었으니 얼마 안 되는 세간살림이지만 밖으로 빼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던전을 재배치하기 전에.

    용호 자신이 보았던 길이 달라지기 전에.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의아한 얼굴이 되어 용호를 보았다. 리쿰은 혹여 자신이 전에 말했던 선술집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스컬은 언제나처럼 바닥을 구르며 스컬컬거렸다. - 몸이 돌이 되어서 그런지 이전보다 묘하게 더 어울렸다. -

    용호는 왼손에 낀 은색 반지를 보았다.

    달을 삼키는 늑대의 문장.

    반드시 다시 일어서겠다 말했던 잿빛 머리칼의 여인.

    “3대 전 가주. 카이완의 집무실을 찾는다.”

    그곳에 있을 카이완의 일지.

    그녀의 기록.

    용호는 눈을 감았다. 카이완의 얼굴을 떠올렸다.

    제 15장 - 던전 개편 끝, 제 16장 - 일지로 이어집니다.

    < 제 15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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