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49화 (49/227)
  • < 제 15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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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자마자 워낙 정신없이 여러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막상 팔러 가지고 온 전투 마차를 보고서에서만 본 용호였다.

    물론 포라스가 공격해 올 때 먼발치에서나마 보기는 했지만, 그때 분간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색이 검다는 것과 모양이 네모나다는 것 정도였다.

    “흠, KV-128이군요. KV 시리즈의 명작 가운데 하나죠. 다소 투박하게 생긴 게 흠이지만 튼튼하고 힘도 좋아요. 내장된 마정석도 꽤 성능이 좋은 편이고요.”

    현재 용호와 시트리 앞에 나타난 전투 마차는 포라스가 타고 온 마차 그 자체는 아니었다.

    던전 상회의 인식 마법진 위에 올려둔 보고서에 적힌 형식 번호를 보고 동형 모델을 구현한 것이었다.

    용호의 눈에도 호기심이 어렸다. 눈앞의 전투 마차는 마치 탱크 같았다.

    승합차를 연상시키는 검고 네모진 사각 동체에는 바퀴가 자그마치 여섯 개나 달려 있었다.

    각각의 바퀴에는 추가 장갑이 붙어 있었고, 창과 문에는 마치 범인 호송차량처럼 철창이 달려 있었다.

    “전투 마차는 말을 비롯한 각종 동물들을 이용해 운용할 수도 있지만, 자체적인 마력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답니다. 물론 그 속도가 좀 느리긴 하지만요.”

    마치 모터쇼의 나레이터 모델이라도 된 것 마냥 시트리가 전투마차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과연 말마따나 문을 열어보니 간단하게마나 조작을 할 수 있는 장비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운전면허 시험장 트럭 같네.’

    핸들과 패달, 기어를 변경하기 위한 스틱이 정말 딱 자동차 같았다. 어쩌면 인계의 자동차들과 조작법 자체가 동일할지도 몰랐다.

    차체 내부는 외양과 마찬가지로 투박했다. 가운데에 우뚝 솟은 네모난 상자가 하나 있었고, 그 좌우로 벽에 붙은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시트리가 상자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전투 마차를 움직이기 위한 마정석이 들어 있는 장소입니다. 전투 마차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죠.”

    아예 전투 마차 안에 들어선 시트리는 가늘고 긴 손가락을 놀려 상자의 윗부분을 개방했다. 그러자 마치 던전의 심장처럼 밝은 빛을 내는 주먹만한 크기의 돌덩이가 드러났다.

    “전투 마차의 가치는 얼마나 강력한 마정석을 사용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엘리고스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딱 KV-128의 표준형 마정석을 장착했더군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새삼 전투 마차의 장갑을 돌아보았다. 정말 강력한 마정석을 이용한다면 아예 말이나 여타 짐승을 사용하지 않고 장갑차처럼 운용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방어 마법 같은 것도 당연히 걸 수 있겠지?’

    여왕개미가 사용하던 방어막을 떠올린 용호는 다시 한 걸음 물러서서 전투 마차를 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트리가 생긋 웃었다.

    “포라스가 사용한 KV-128은 단순 수송용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강습이라든가, 함정 돌파를 위한 전투 마차 역시 존재하죠. ‘전투’ 마차니까요.”

    전투 마차에서 내린 시트리는 탕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덕분에 의식을 환기한 용호는 다시 시트리에게 집중했다. 전투 마차의 카탈로그를 보여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무엇 때문에 던전 상회를 방문했는지를 잊지 않았다.

    “전투 마차 세 대와 마차를 끌던 말 여섯 필을 판매하고 싶습니다.”

    전투 마차의 크기와 무게만을 고려한다면 마차 한 대 당 말 여섯 마리는 붙어야 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대당 두 마리 씩만 붙어 있을 뿐이었다. 아마 마정석의 도움 덕분인 것 같았다.

    이번 전투로 용호가 손에 넣은 전투 마차는 모두 다섯 대.

    그 가운데 두 대는 마몬 가에서 쓰기 위해 남기고 세 대는 처분하기로 했다.

    시트리가 즉답했다.

    “KV-128이라면 꽤 세세하게 중고가가 설정되어 있답니다. 실질적인 가격은 저희 직원이 방문해서 물건을 직접 살펴봐야 알겠지만… 사랑하는 고객님이시니 조금 후하게 계산을 해드릴 게요. 아마 이 정도 선에서 거래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용호의 눈앞에 작은 빛의 창이 생겨났다. 금액의 최저치와 최대치가 적혀 있었는데, 엘리고스가 계산한 예상가보다 1.2배 정도 가격이 높았다.

    “만족스러우시죠?”

    시트리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고, 용호는 약간은 의뭉스런 미소로 화답했다.

    전투 마차가 사라지고 다시 용호와 시트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다시 소파 위에 우아하게 걸터앉은 시트리는 용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눈빛으로 다음 거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용호 역시 소파 위에 자리를 잡았다. 시트리와 괜한 밀당을 하는 대신 바로 다음 거래를 제시했다.

    “최저치를 정해주셨으니… 그 최저치에 맞춰서 일꾼으로 쓸 사역마들과 던전 운용에 필요한 물자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시트리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한 손으로 턱을 괴었고, 그대로 지그시 용호를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과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마치 대견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미소 같았다.

    “사랑하는 고객님,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먼저 사과부터 한 시트리는 자세를 바로 했다. 용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사실 무모하게 포라스의 던전을 공격하겠다-는 이야기를 하시면 어쩌나 걱정했답니다. 하지만 역시 기우였던 것 같네요.”

    “지금은 내실을 다지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탐욕을 가진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지금 포라스의 던전을 치는 것은 말 그대로 소탐대실이니까요.”

    용호의 말에 시트리는 까르르 웃었다. 약간 방정맞은 웃음소리였음에도 그 웃음의 주체가 시트리이기 때문인지 무척이나 아름답고 우아해 보였다.

    “역시 고객님. 제 사랑을 받으실 자격이 충분하시군요.”

    시트리는 언제나처럼 호의를 보였다. 용호는 그 눈빛에 빠져드는 대신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용호가 예상하는 시트리의 정체는 마몬 가의 후견인.

    하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시트리는 마몬 가의 몰락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전전대 가주도, 전대 가주도 시트리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추가로… 정보를 좀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정보를 말씀이시죠?”

    “포라스 가 주변에 자리한 가주들의 정보를 사고 싶습니다. 북부에 나타났다는 가주에 대한 정보도 추가적인 게 있다면 구매하고 싶고요.”

    이번에는 시트리가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지랖이라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정보 구매를 그다지 추천 드리지 않습니다. 지난번에도 살짝 말씀드렸지만 던전 상회의 정보료는 제법 비싼 편이거든요. 그리고… 이번 기회에 던전 상회 외의 곳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도 익히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분명히 조언이었다.

    ‘확대 해석 하지는 말자.’

    인계의 가게들도 단골이 되면 이런 저런 혜택을 봐주기 마련이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었지만 시트리는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녀에게 맹목적인 신뢰를 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낭패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그럼 일꾼으로 쓸 클레이 골렘 세 마리와 목록에 적힌 물자를 부탁드립니다.”

    말을 마친 용호는 시트리가 했던 것처럼 손가락을 놀려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식량과 자재 등 각종 생활에 필요한 물자들의 목록이었다.

    “클레이 골렘을 세 마리나 한 번에 구매하시니 할인율을 좀 적용해드리면… 돈이 꽤 남네요. 다른 것을 추가로 더 구매하실 건가요? 아니면 금광을 담보로 대출하셨던 금액의 일부를 지불하실 건가요?”

    이번에는 용호의 눈앞에 빛의 창이 만들어졌다. 표기된 금액을 보니 아슬아슬하게 3성 사역마 하나를 구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빚을 안고 있는 게 싫긴 하지만…….’

    지금은 좀 더 투자를 해야 할 때였다. 클레이 골렘들을 구매했으니 금광이 정상화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추가로 사역마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고객 님 얼굴을 봐서 살짝쿵 할인해드리면 3성 노예 사역마 까지는 가능할 것 같군요. 3성 카탈로그를 드릴까요?”

    시트리의 물음에 용호는 살짝이지만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역마를 추가로 구매하기로 마음 먹었을 때부터 이미 정해둔 것이 있었다.

    “제조 능력이 있는 사역마들만 따로 모아서 볼 수 있을까요? 장인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사역마면 좋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준비해 드리죠.”

    마치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것처럼 시트리가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용호의 눈앞에 식당 메뉴판처럼 얇은 카탈로그가 생겨났다.

    시트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처럼 우아하게 예를 표한 뒤 말했다.

    “사랑하는 고객님, 즐거운 쇼핑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저는 이만 다시 자…가 아니라 돌아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뵐게요.”

    실수를 무마하듯 귀엽게 윙크한 시트리는 그대로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시트리가 사라진 장소를 빤히 바라보던 용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선을 정해놓는다고 정해놓는데, 자꾸만 넘고 싶어질 정도로 매력적인 시트리였다.

    “아무튼 정신 차리고.”

    짝짝 가볍게 양 뺨을 두드린 용호는 카탈로그를 펼쳤다. 동시에 커다란 빛의 창이 형성되었고, 제조 능력을 갖춘 1성부터 3성까지의 사역마들의 목록이 나타났다.

    ‘자아, 어떤 녀석을 골라야 할까.’

    역시 물건을 고르는 이 순간이 제일 좋았다.

    용호는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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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가 귀환한 것은 가상공간에 접속하고도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시간이 지난 후였다. 시트리와의 거래 자체는 짧았지만 구매할 사역마를 고민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진 탓이었다.

    ‘은근히 종류가 많았단 말이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용호는 옥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카타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다, 다녀오셨나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째 한 번 봤던 광경을 또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시트리는 카타리나보다 훨씬 침착했고, 침도 안 흘렸지만 말이다.

    ‘미인은 잠꾸러기가 맞네.’

    언제나처럼 긍정적으로 해석한 용호는 카타리나가 민망하라고 일부러 자기 턱 주변을 어루만졌다. 이내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카타리나는 다급히 턱에 흐른 침을 닦아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흠흠.”

    용호가 초등학생의 마음이 되어 웃고 있는 사이 어찌어찌 단장을 마친 카타리나가 바로 섰다. 약간 뒤늦긴 했지만 이제는 포기해도 좋을 것 같은 냉정한 여기사의 얼굴이 되어 말했다.

    “엘리고스가 식사 준비를 해두겠다고 했습니다. 지시하신 대로 오크들의 환영회를 겸한다고 합니다.”

    [오크들은 리쿰의 통제하에 사역마 생활관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예속 사역마 스컬과 트리엔트, 살라멘더가 사역마 생활관에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고블린들은 준의 지휘 하에 죽은 오크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의 판단입니다. 오크들에게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게 하는 것은 예기치 않은 반발심을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연 엘리고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사려 깊은 일처리였다.

    던전의 영혼- 루시아가 계속 말했다.

    [엘리고스는 회식을 위한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코볼트와 공주개미는 구경 중입니다.]

    급한 일도 거의 처리가 되었으니 공주개미의 사역마 등록을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지금도 딱히 감시가 필요한가 싶지만.’

    “리쿰을 비롯한 오크들을 집합시킬까요?”

    카타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용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직 저녁 식사 때까지는 시간이 좀 있으니까. 그리고 감옥이랑 생활관은 아무래도 느낌이 다르지 않겠어? 괜히 가서 불편하게 하지 말고 좀 더 쉬게 두자고.”

    “알겠습니다, 가주님.”

    단순히 장소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포로 신세였으니 마음이 불편해도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을 터였다. 식사 전에 긴장을 풀 시간을 주는 편이 여러모로 나았다.

    “좋아, 그럼 우린 엘리고스나 도와주러 가자.”

    “네, 가주님.”

    이번에는 어쩐지 모르게 앞의 것보다 대답이 더 활기찼다.

    용호는 카타리나와 함께 마왕의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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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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