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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42화 (42/227)
  • < 제 13장 - 격전 >

    제 13장 - 격전

    주먹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공기가 얼어붙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호는 한기를 느꼈다.

    눈이 마주쳤다.

    오랜 단련으로 다져진 것이 분명한 바위 같은 근육도, 분명 노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기 짝이 없는 인상도, 한기를 따라 솟구쳐 오른 것 같은 하얀 머리칼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 눈.

    살기로 가득 찬 청회색 눈동자가 시선을 빼앗았다. 짐승 같은 포효가 금방이라도 연이어질 것 같았다.

    “스컬컬!”

    소리가 정지한 시간을 깨트렸다. 카타리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용호를 끌어안은 채 몸을 몇 바퀴 굴렸다. 조금이지만 거리가 더 벌어졌을 때 용호와 카타리나는 거의 동시에 튕기듯 일어서서 저마다의 무기를 쥐었다.

    문에 붙어 있던 스컬이 포라스의 등을 노리고 망치를 휘둘렀다. 꽤나 빠르고 정확했지만 포라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른 것이 패착이었다.

    망치가 허공을 갈랐다.

    급박한 가운데도 침착하게 몸을 움직여 스컬의 망치를 피한 포라스가 바로 반격에 나섰다. 용호와 카타리나가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스컬의 품에 파고들며 갑옷 옆면을 강타했다.

    갑옷에 금이 갔다. 스컬의 육신 전체가 마치 차에 치인 것 마냥 벽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방을 뒤덮고 있던 불꽃이 사라졌다. 방안에 오크들 가운데 몇이나 살았는지, 그중 몇이 당장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지 헤아릴 시간이 없었다.

    살라멘더는 지친 가운데도 급히 꼬리를 휘둘러 포라스의 다리를 공격했다. 낮고 빠른 공격이었지만 이번에도 포라스는 마치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가볍게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그대로 살라멘더를 공격하는 대신 착지한 그 순간 지면을 박차 용호와 카타리나 쪽으로 돌진했다.

    카타리나가 급히 손쇠뇌를 발사했다. 화살 한 대가 포라스의 어깨에 박혔지만 돌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포라스와 용호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고, 포라스는 재차 주먹을 휘둘렀다.

    다시 한 번 허공을 꿰뚫었다. 주먹에 어린 차가운 한기가 주변을 휩쓸었다.

    측면으로 몸을 움직여 간신히 공격을 피한 용호는 반격을 생각하지 않았다. 공격이 빗나간 지금도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포라스의 두 눈을 마주한 채 탐욕의 불길을 일으켰다. 마구잡이로 일으킨 불꽃이 순식간에 용호를 뒤덮었다.

    정면에서 불길을 마주한 포라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한기를 보며 용호 역시 아몬을 내찌르는 대신 포라스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틈바구니 사이를 파고드는 것이 있었다. 전체적인 수에서는 포라스가 우위일지 몰라도 현재 이 방에서만큼은 용호 쪽이 수적 우위에 있었다.

    클레이 골렘이 거의 몸을 내던지다시피 하며 포라스를 덮쳤다. 엘리고스의 명을 받은 락 골렘과 고블린들은 불길이 걷힌 입구를 향해 달렸고, 카타리나는 용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벽에 처박혔다 바닥에 쓰러진 스컬은 고개를 들어 보았다.

    “크허어어어엉!”

    오크 하나가 괴성을 토하며 문을 통과했다. 포라스의 호위기사인 오크 버서커 고쿤이었다.

    다른 오크들도 일어서고 있었다. 저들 모두가 방안에 돌입하면 전투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컬컬!”

    스컬이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오크 버서커 고쿤의 주의를 끌기 위한 시도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때마침 도착한 락 골렘이 고쿤과 정면에서 충돌했다.

    난전이었다. 눈앞의 적에게만 집중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반사적으로 거리를 조금 더 벌린 용호는 아몬을 움켜쥐고 보았다. 푸른 마력의 흐름이 클레이 골렘을 에워쌌다. 전차처럼 돌진하던 클레이 골렘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새하얀 서리가 전신을 뒤덮었고, 어느 순간 그 몸이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용호는 더 생각하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모았다. 고쿤을 비롯한 오크들이 좁은 문에서 싸우는 소리는 용호의 집중을 해치지 못했다.

    푸른 마력이 보였다. 한기어린 주먹을 박아 넣음으로써 클레이 골렘의 수분을 냉각-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킨 포라스가 재차 괴성을 토하며 용호에게 돌진했다.

    용호가 아몬을 내찔렀다. 창끝에서 일어난 거대한 탐욕의 불길이 포라스를 향해 뻗어나갔다.

    포라스는 그런 녹염을 피하지 않았다. 권능으로 만들어낸 한기를 집중시킨 두 주먹을 앞으로 쭉 뻗더니 그대로 크게 벌려 녹염을 가르고자 했다.

    완전히 가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첫 난입 때와 마찬가지로 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두 팔로 녹염의 장막을 열어젖힌 포라스가 비상하듯 뛰어올랐다.

    맹수. 짐승.

    그 이상의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포라스는 살기 가득한 눈으로 용호를 노려보며 재차 포효했고, 용호는 마주 포효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트리엔트가 채 가시지 않은 녹염과 한기 사이로 덩굴을 내뻗었다.

    포라스의 육신을 휘감자마자 트리엔트의 덩굴이 얼어붙었다. 어떤 것은 닿기도 전에 뚝뚝 부러져 나가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녹염을 관통한 직후 용호를 치려고 했던 포라스는 시간을 지체할 수밖에 없었고, 용호와 카타리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허어어어엉!”

    오크족 특유의 전투함성이 그런 두 사람을 방해했다. 락 골렘을 밀어붙이던 오크 버서커 고쿤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들고 있던 도끼를 용호와 카타리나에게 집어던지고자 했다.

    “스컬컬!”

    스컬이 그런 고쿤에게 몸을 던졌다. 살라멘더 역시 기력을 쥐어 짜내 다시 한 번 오크들에게 불꽃을 토했다.

    그야말로 난전이었다. 용호가 아몬을 내찔렀고, 포라스가 용호의 팔 바깥쪽으로 몸을 날려 아몬을 피했다. 그대로 오른팔을 크게 휘둘러 용호를 후려쳤다.

    이번에는 피하거나 막을 수 없었다. 상상이상의 충격이 용호의 측면을 강타했고, 푸른 마력이 만들어낸 한기가 용호의 육신을 침식하고자 했다. 카타리나가 노성을 토하며 포라스에게 달려들었다.

    카타리나의 강점은 무지막지한 민첩성을 바탕으로 한 속도였다. 거의 바닥을 기듯 순간적으로 몸을 낮춘 카타리나는 그대로 포라스의 측방을 돌아 배후를 점하고자 했다.

    하지만 수가 얕았다.

    포라스는 카타리나의 움직임을 따라잡지 못했지만 카타리나가 어떤 식으로 공격할지를 예측했다. 등 뒤에서 벼락처럼 내리꽂히려는 단검에게 목 대신 등을 내주었고, 단검이 살을 파고드는 아릿함 속에서 거칠게 몸을 움직였다. 가볍기 짝이 없는 카타리나를 후려쳐 날려버리는 대신 급히 뻗은 왼팔로 몸의 일부를 붙잡았다. 그대로 몸을 마저 회전시키며 주먹을 내리꽂았다.

    포라스의 오른 주먹이 카타리나의 복부를 강타했다. 카타리나의 가냘픈 육신을 꿰뚫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격이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카타리나는 그대로 피를 왈칵 토했다. 팔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고, 주먹에서부터 뻗어나간 한기가 카타리나의 육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노오옴!”

    엘리고스가 질주했다. 하지만 충동적인, 그야말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직선 공격에 당할 포라스가 아니었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발을 놀려 공격을 피했고, 허공을 후려친 대가로 자세가 무너진 엘리고스의 측방을 후려쳤다.

    이번에도 한기가 일었다. 엘리고스는 신음을 토하며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불꽃이 일었다. 녹색의 불꽃이 다시 한 번 포라스와 카타리나, 엘리고스를 뒤덮었다.

    포라스는 급히 한기를 일으켰다. 녹염은 포라스를 침범하지 못했다. 하지만 용호는 상관하지 않았다. 애당초 공격이 아닌 시선을 가리기 위해 펼친 불꽃이었다.

    고작 일격을 허용했을 뿐임에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애당초 기량 차이가 컸다. 지금까지 상대해온 잔챙이들과는 달랐다.

    용호는 녹염 속으로 돌진했다. 포라스의 등을 노리고 짧게 쥔 아몬을 내뻗었다.

    이번에도 허공만을 관통했다. 용호는 녹염 속에서 포라스의 눈을 보았다. 한기를 일으킨 직후 뒤돌아선 포라스는 몸을 비트는 것만으로 용호의 일격을 피했다. 자연스럽게 거리가 좁혀진 용호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오른주먹을 당겼다.

    일촉즉발의 순간.

    카타리나가 필사적으로 쏜 손쇠뇌 화살이 포라스의 다리에 박혔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독이 묻은 화살이 포라스를 저지했다.

    용호는 그것을 보지 않았다. 애당초 창이 빗나간 그 순간 내뻗었던 왼손을 포라스의 목을 향해 뻗었다.

    제대로 닿지 않았다. 꿰뚫거나 후려치는 공격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이완의 반지가 마력을 내뿜었다. 왜곡의 권능이 공간을 비틀어 무형의 방패를 형성해냈다. 그 시발점과 맞닿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포라스의 목을 강타했다!

    목은 단련이 불가능한 급소 가운데 하나였다. 예기치 않은 일격에 포라스의 자세가 무너졌다. 용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짧게 쥔 아몬으로 포라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창끝을 통해 불꽃을 내뿜었다.

    “크앗!”

    포라스가 저항했다. 한기를 품은 마력이 아몬 주위로 몰려들었다. 용호는 그에 맞서 마력을 키우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느라 벌어진 포라스의 입 속에 왼손을 쑤셔 넣었다. 다시 한 번 왜곡의 권능을 발동시켰다!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용호의 왼손이 튕겨져 나왔고, 붉은 피가 용호의 얼굴을 뒤덮었다. 포라스와 용호가 함께 바닥에 나자빠졌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턱이 박살나고 입이 찢어진 와중에도 포라스는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용호는 온 신경을 아몬에 집중하였다. 상처를 쑤시듯 아몬을 비틀며 남은 마력 전부를 쏟아 부었다. 녹염이 마침내 한기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포라스가 용호의 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조르지도, 부러트리지도 못했다. 용호는 포라스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던전의 영혼에게 명령해 던전에 남은 마력까지 모두 아몬에 집중시켰다. 크고 화려한 불길 대신 작고 응집된 힘으로 포라스의 마력 그 자체를 불태웠다.

    “가주님!”

    오크 버서커 고쿤이 소리쳤다. 거대한 도끼에 골반이 박살난 스컬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런 고쿤을 붙잡았다. 살라멘더가 다시 불을 토했고, 고블린 욘이 포라스와 스컬에게 정신이 팔린 고쿤의 목을 창으로 찔렀다. 다른 오크가 급히 휘두른 칼이 그런 욘의 상반신을 갈랐다. 피가 솟구쳐 올랐다.

    난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용호는 포라스의 가슴 위에 왼손을 올려놓았다. 최후의 저주라도 되듯이 왼손을 타고 오르는 한기를 받아들였다. 차갑고 차가운 포라스의 정수를 탐욕의 불길로 집어삼켰다.

    정수 흡수.

    그로 인한 변화.

    쾌감을 능가하는 격통이 용호의 육신과 영혼을 난타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용호보다 더 약하거나 비슷한 수준의 상대의 마력을 흡수한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가주 포라스.

    냉기의 마왕.

    비록 그 세력이 강하지 않다고는 해도 칠십 년 세월동안 가문을 지켜온 던전의 주인.

    더 강한 자의 정수를 흡수했다.

    탐욕은 냉기를 버리지 않았고, 진화의 권능은 보다 효과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포라스의 마력을 게걸스레 먹어치웠다.

    마력은 마족의 본질 그 자체.

    용호는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새로이 돋아난 세 번째 뿔을 통해 전해지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홍련의 마창 아몬.

    그 끝에서부터 녹색의 불꽃이 솟구쳐 올랐다.

    &

    < 제 13장 - 격전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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