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41화 (41/227)
  • < 제 12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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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역시 눈을 부릅뜨고 순간이지만 숨을 멈췄다.

    벽을 부숴 길을 만든다.

    생각해보면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달걀. 일어난 뒤에 보면 너무나 뻔한 것이지만 막상 떠올리기는 힘든 것.

    사실 벽 파괴 자체는 던전 전투에서 꽤나 흔히 사용하는 마법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마왕들은 벽 파괴에 대비해 벽 자체를 강화하거나, 벽 파괴로도 큰 이득을 볼 수 없도록 던전을 구성했다.

    하지만 용호에게는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 던전 전투와는 담을 쌓았다고 해도 좋을 전전대와 전대 가주였기에 엘리고스와 카타리나 역시 그러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포라스는 벽을 하나 부숨으로써 십여 개가 넘는 방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 사이에 놓여 있는 함정들 역시 무용지물이 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포라스가 움직였다. 그리고 하필이면 벽 너머의 방은 함정이 존재하지 않는 방이었다.

    용호는 포라스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역시 그러했기에 다급한 얼굴로 용호를 돌아보았다.

    포라스가 두 번째 벽을 파괴한다. 다시 한 번 여러 방들과 함정들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마왕의 방으로 다가온다.

    크림슨 오우거 때처럼 어설프게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이용해 다른 길로 유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새로운 던전의 영혼이 막 태어났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던전의 영혼의 통제력이 높아진 만큼 던전은 고정되었다. 아무리 방의 활성화와 비활성화가 용이한 마몬 가의 던전이었지만 하나에서 두 개 정도라면 모를까 여러 개의 방을 순간적으로 바꿔놓을 순 없었다.

    마왕의 방으로 이어지는 길을 크게 늘리느라 만든 비비꼬인 직사각형 구도 역시 그런 작전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다른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무언가 비책을 짜내야만 했다.

    [가주 포라스가 다시 한 번 벽을 파괴했습니다!]

    던전의 영혼이 소리쳤다. 마몬 가의 사역마들 역시 던전 현황도에 표시된 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고블린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겁에 질린 목소리를 토했고, 바닥을 굴러다니던 스컬은 자리에서 일어나 망치를 움켜쥐었다.

    시간이 없었다.

    카타리나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당장이라도 가주님이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용호를 믿어야 했다. 괜한 조급함으로 용호의 정신을 어지럽히면 안 되었다.

    스컬조차도 불필요한 목소리를 내는 대신 그저 용호의 명을 기다렸다.

    그렇게 몇 초.

    마침내 용호가 말했다.

    “자원 창고로 이동한다.”

    작은 목소리였다. 용호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고 바로 떠오른 것을 입에 담았음에 분명했다.

    용호의 시선이 던전 현황도로 향했다. 오감을 모두 용호에게 집중하고 있던 카타리나 역시 던전 현황도를 보았다.

    자원 창고의 위치.

    사거리 아래쪽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나아간 곳에 자리한 방. 던전 현황도를 기준으로 한다면 자원창고는 중앙통로의 아래쪽에 위치했다.

    카타리나는 이전 녹색 망토의 거한과 싸웠을 때를 기억했다. 그랬기에 용호가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순간적으로 이해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카타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원 창고로 가!”

    용호가 소리쳤다. 고블린들은 다급히 무기를 챙겨들고 달렸다. 트리엔트와 살라멘더 역시 발걸음을 서둘렀다. 낑낑 거리던 코볼트 역시 그런 사역마들의 뒤를 따랐다.

    스컬이 앞장섰다. 엘리고스가 멀뚱히 선 클레이 골렘과 락 골렘에게 자원 창고로 향할 것을 명령했다.

    두 번째로 파괴된 벽 너머에는 함정이 존재했다. 벽 파괴 마법으로 용호에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 때문에 흥분했는지 이번에는 포라스도 너무 쉽게 방에 발을 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덕분에 용호는 화살 함정으로 오크 몇 마리를 사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포라스의 사역마들이 너무 많았다.

    이대로 전면전을 펼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자원창고를 향해 달리며 용호는 손가락을 놀렸다. 던전의 영혼이 즉답했다.

    [현재 던전 내의 위치한 적의 숫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주 포라스. 오크 28마리. 임프 4마리.]

    역시 너무 많았다.

    가장 강력한 위력의 함정인 불꽃 함정은 이제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본래 던전 상회에서 구매한 완성형 함정의 숫자는 더 많았지만 거의 대부분이 후반부 길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것이 패착이었다. 포라스가 지름길을 만든 그 순간 던전 상회에서 구매한 값비싼 함정들의 반 수 이상이 무력화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불꽃 함정 두 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는 지름길과 무관한, 반드시 지나야만 하는 중앙 통로에 놓여 있었다.

    용호의 머릿속에 또 다른 변수들이 떠올랐다.

    비활성화 되어 있는 방도 일단 공간은 공간이었다. 던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을 뿐 그 안에서 활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 벽 파괴 마법으로 비활성화 된 방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강제로 만들 수 있을까? 그리하여 비활성화 방들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것도 가능할까?

    방대한 공간과 수많은 비활성화 방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마몬 가의 강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양날의 칼이 되어 용호의 목을 죄어 왔다.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에 답을 구할 시간이 없었다. 해답 없는 문제는 미로와 같았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용호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엘리고스나 던전의 영혼에게 묻는 대신 달렸다. 머리 근처에 활성화 된 작은 빛의 창에 펼쳐진 던전 현황도로 포라스의 움직임을 살폈다.

    포라스는 다시 벽 파괴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치 이제 더 이상 지름길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처럼 중앙로로 이어진 외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함정이 없는 방이었다. 하지만 포라스는 함부로 그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바로 직전에 화살 함정으로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포라스는 다시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이제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방 하나를 이동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용호와 사역마들은 멈추지 않았다. 포라스가 함정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역마들을 전진시킨 바로 그 때 자원 창고에 도달하였다.

    짧은 다리로 전력 질주하느라 완전히 지친 고블린들이 숨을 헐떡였다. 발이 느린 트리엔트와 골렘들은 아직 자원 창고에 도달하지 못했다.

    용호는 차오른 숨을 토했다. 던전 현황도에 나타난 포라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했다. 수에서 크게 밀리는 지금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예속 사역마인 카타리나와 스컬은 용호의 의중을 읽었다.

    던전 현황도 상으로 보자면 자원 창고와 비비 꼬인 길 사이에 놓인 비활성화 된 방은 하나였다.

    즉, 그 하나의 방을 활성화 시키면 포라스의 뒤를 칠 수 있는 우회로를 만들 수 있다는 소리였다.

    모든 던전이 마몬 가의 던전처럼 이렇게 급히 방의 활성화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러한 빠른 활성화에는 용호가 모르는 문제점들이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최적의 순간은 포라스와 그 사역마들이 중앙로에 남은 불꽃 함정 방에 돌입했을 때.

    바로 그 순간 뒤를 점해 함정과 더불어 앞뒤에서 포라스와 사역마들을 공격한다.

    포라스는 무척이나 신중하게 다음 방을 살폈다. 아마도 포라스의 사역마들 가운데 좀 더 제대로 된 마법사가 있었다면 불꽃 함정을 아예 해체해버리는 것도 가능했을 터였다.

    포라스가 무투파이고, 그 휘하 사역마들이 대부분 근접전에 특화된 존재들이라는 것이 용호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포라스의 사역마들 가운데 일부가 불꽃 함정 방에 돌입했다.

    엘리고스와 골렘들, 트리엔트가 자원창고에 도착했다.

    용호는 손가락을 놀렸다.

    던전의 영혼이 방을 활성화 시켰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문을 열었고, 용호와 살라멘더가 달렸다. 나머지 사역마들이 그런 용호의 뒤를 따랐다.

    비활성화 되어 있던 방이 활성화 된 그 때 포라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마력의 변화를 감지했다. 아니, 그보다는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급히 사역마들을 멈춰 세웠고,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명확했다. 포라스는 소리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카타리나와 스컬이 동시에 문을 열었다.

    포라스와 용호가 서로를 보았다. 한 눈에 서로가 누구인지를 간파했다.

    포라스가 소리쳤다. 용호가 포효했다.

    소리가 한 데 엉켰고, 서로가 서로의 의미를 분쇄했다. 살라멘더가 전력을 다한 불꽃을 토했다. 바로 곁에 선 용호가 두 손에 쥔 아몬으로 허공을 찔렀다. 가지고 있는 마력 전부를 쏟아 부어 거대한 녹염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불기둥과 녹염.

    거기에 더해지는 하나.

    [함정을 발동합니다!]

    던전의 영혼이 소리쳤다. 바닥과 천장에서 솟구친 불길이 앞의 방에 진출해 있던 포라스의 사역마들을 덮쳤다. 용호와 살라멘더가 내뿜은 불꽃이 포라스가 자리한 방을 휩쓸었다.

    진퇴양난. 외길의 앞뒤에서 모두 발생한 불꽃의 세례!

    “카타리나!”

    용호가 소리쳤다. 시야를 가득 채운 녹염 너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용호도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최선의 대비를 해두는 것이 맞았다.

    아몬을 양 손으로 쥐고 있었다. 전력을 쏟아내 순간적이지만 두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뜻을 바로 이해했고, 용호의 허리춤에 손을 뻗었다. 남아있던 마지막 마나 포션의 봉인을 뜯어 용호의 입 안에 푸른 액체를 흘려보냈다.

    그 모든 과정에 필요한 불과 몇 초의 시간.

    한 번에 마력을 모두 쏟아냈기에 아몬의 녹염은 오래 이어질 수 없었다. 살라멘더의 불기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몇 초.

    짧지만 긴 그 시간.

    포라스와 휘하 사역마들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엘리고스와 골렘들이 다시 한 번 뒤늦게나마 용호가 있는 방에 도착했다.

    용호는 마나 포션을 삼켰고, 급격히 회복되는 마력을 느꼈다.

    전력을 쏟아낸 살라멘더가 헐떡이며 불꽃을 거두고자 했다.

    스컬이 멍한 얼굴로 눈앞을 가득 채운 불꽃을 보았다.

    그리고 카타리나가 돌연 용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대로 몸을 던지다시피 해 용호를 밀쳐냈다.

    갑작스런 행동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밀려나는 와중에 용호는 보았다.

    쪼개지고 쪼개진 시간 속에서 거짓말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불꽃이 갈라졌다.

    용호의 녹염과 살라멘더의 홍염 사이로 구멍이 뚫렸다. 무언가가 화염을 먹어치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빈 공간을 거대한 무언가가 가로질렀다.

    불꽃 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눈앞에서 얼어붙는 공기.

    불의 장막을 찢어발기며 돌진하는 자.

    용호는 차갑고 푸른 마력을 보았다.

    푸르고 푸른 그것이 화염 속을 누비는 것을, 마침내 불꽃의 장벽을 가르고 비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마왕의 권능.

    던전의 주인인 가주들이 가진 또 하나의 이름. 마왕으로 각성함에 따라 손에 넣는 고유한 능력.

    냉기의 마왕 포라스.

    그가 주먹을 내뻗었다. 방금까지 용호의 머리가 자리했던 허공을 꿰뚫었다.

    제 12장 - 던전 방어전 끝, 제 13장 - 격전으로 이어집니다.

    < 제 12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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