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40화 (40/227)
  • < 제 12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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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계의 하늘은 붉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색이 아니었다.

    보랏빛이 뒤섞인 황혼의 빛이 서쪽 하늘에서 이어졌다. 마치 수채화 물감이 서로 섞이듯 검정과 빨강과 보라가 어울렸고, 그 너머에는 다시 빨강과 노랑이 함께 춤추었다. 흡사 하늘이 불타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것 역시 하늘을 모두 채우지는 못했다. 조용하고 은은한 붉은 빛이 하늘의 여백을  뒤덮었다. 마치 노을과도 같았다.

    메마른 바람에 흙먼지가 흩날렸다. 땅은 건조했지만 하늘이 그러했던 것처럼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었다. 제법 비옥한 땅도 있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키가 큰 나무들이 가득한 숲도 있었다. 인계의 숲과 마찬가지로 푸른 잎을 가진 나무들이었다.

    숲을 따라 강이 흘렀다. 멀리서 본 것이 다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제법 맑은 물이었다. 강에서 파생된 여러 물줄기 가운데 하나가 던전 근처로 흘렀고, 용호는 엘리고스가 이른 아침마다 사역마들과 함께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카타리나는 지금이 겨울과 봄의 사이라고 말했다.

    마계의 존재들은 모두가 마력에 그 근본을 두었다. 하늘을 나는 작은 새도,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카타리나와 더불어 던전 밖으로 나온 용호는 한참이나 밖에 머물렀다. 딱히 주변을 크게 돌아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던전 입구 근처를 둘러본 것이 전부였다.

    마몬 가 던전의 입구는 무척이나 거대한 산의 초입에 자리했다.

    산의 이름은 ‘엔카트로 패그니움’. 오랜 고어로 ‘세계의 끝’을 의미했다.

    용호가 혹여 산에 올라가보겠다고 할까봐 노심초사하던 카타리나는 밖에 나온 지 두 시간이 넘도록 주변만 서성이는 용호의 모습에 살짝이나마 안도의 숨을 토했다.

    엔카트로 패그니움은 괜히 세계의 끝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거대한 바위산에는 마력의 폭풍이 끝없이 몰아쳤다. 속된 말처럼 한 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필멸의 땅이었다.

    한숨에 이어 하품을 토한 카타리나는 몰래 기지개를 펴며 눈동자를 굴렸다. 차라리 사냥이라도 하자고 하셨다면 좋았을 텐데-

    용호는 그저 가만히 서서 하늘과 땅을 바라볼 뿐이었다. 명색이 호위기사인 카타리나 자신이 주인만 내버려두고 사냥을 다녀올 수도 없으니 꼼짝없이 옆에 붙어있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카타리나가 지루함에 지쳐갈 때, 용호는 마력의 흐름을 보았다.

    하늘과 땅이 아닌, 이 세상을 구성하는 위대한 흐름에 흠뻑 빠져들었다.

    마력에는 색과 속성이 있었다. 진화의 권능을 다루는 용호는 그 색과 속성을 볼 수 있었다.

    경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것이 마계.

    이것이 마력.

    겨우 한두 시간 바라본 것으로는 싫증이 나지 않았다. 용호는 새삼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한 번 작은 탄성을 토했다. 잠깐 보고 들어가서 엘리고스를 도울 생각이었지만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용호가 돌연 시선을 돌렸다. 발끝으로 흙을 차며 지루함과 싸우던 카타리나 역시 귀를 쫑긋 세우며 눈매를 날카로이 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낮은 울음이 두 사람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마치 벙커처럼 불룩 솟아 있는 마몬 가 던전 입구 위에 발딱 서 있던 던전 미어캣이 울음을 멈추었다.

    용호는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고, 카타리나가 어느새 그런 용호의 옆에 바짝 붙듯이 자리했다.

    던전 미어캣의 시력은 엘프와 호각을 이뤘다. 그렇기에 카타리나 역시 던전 미어캣이 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투마차가 옵니다.”

    어차피 한쪽에 자리한 숲을 제외한다면 허허벌판인 황무지였다. 용호 역시 정확히 무엇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먼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가 계속 말했다.

    “마차의 숫자는 다섯. 규모로 보아 못해도 마흔 마리 이상의 사역마들이 동원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포라스의 문장이 보입니다. 가주 포라스 본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온 것 같습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며 카타리나가 이를 악물었다. 용호는 당황해서 던전으로 뛰어드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도 꽤나 먼 거리를 남겨두고서 마차들이 돌연 운행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뭘 하려는 거지?”

    “돌입 전에 휴식을 가지려는 것 같습니다.”

    카타리나가 약간은 자신 없다는 투로 답했다.

    던전 전투는 거의 대부분이 던전 내에서 진행이 되었다. 간혹 던전 밖에 주둔한 던전 공격자를 역습하는 수비자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경우는 드물었다. 던전 내에서 싸우는 것이 던전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용호는 포라스의 심리를 짐작해 보았다.

    오크 정찰 부대를 잃기는 했지만 포라스는 전대와 전전대 시절의 마몬 가를 잘 알았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사역마들을 잔뜩 끌고 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이쪽을 얕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역습은 없다. 공격 사실 자체를 알려도 던전의 방비가 딱히 나아질 것은 없다.

    용호는 노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워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생긴다면 이쪽으로서는 환영이었다.

    “얼마나 휴식을 취할 것 같지?”

    용호가 낮게 물었다. 카타리나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 오래 쉬지는 않을 겁니다.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 남짓 정도일 겁니다.”

    부족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저쪽도 아마 이쪽을 보았다. 어쩌면 저 휴식은 제법 우아한 선전포고일지도 몰랐다.

    용호는 더 지체하지 않고 돌아섰다. 카타리나와 더불어 던전 입구로 향했다.

    천천히 흥분으로 차오른 숨을 골랐다.

    가주 포라스.

    이제는 싸워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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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던전 사역마들에게 경보를 울리겠습니다!]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가 사역마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있습니다.]

    용호가 던전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연결된 던전의 영혼이 빠르고 정확하게 말했다. 용호는 동의의 뜻을 보낸 뒤 카타리나와 함께 달렸다. 마왕의 방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던전 미어캣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오크 전사 삼십여 마리 확인]

    [임프 십여 마리 확인]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사역마들은 파악 불가!]

    전투마차가 여섯.

    카타리나는 포라스가 끌고 온 사역마의 숫자가 최소 사십 마리는 될 것이라 말했다. 단순 숫자로만 비교하자면 마몬 가 던전 사역마들의 네 배에 달하는 물량이었다.

    정면대결로는 승산이 없었다.

    마치 성곽을 끼고 수성전을 하듯 철저하게 던전 시설들을 이용해야만 했다.

    [던전 미어캣의 보고입니다!]

    [가주 포라스의 전투 마차들이 다시 기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주님!”

    마왕의 방 바로 앞이라 할 수 있을 사거리에 도달한 순간 던전의 영혼과 엘리고스가 동시에 외쳤다.

    용호는 손가락을 놀려 던전의 영혼에게 응답했다. 숨을 고르며 엘리고스에게 다가섰다.

    엘리고스가 다급함을 모두 억누르지 못한 얼굴로 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마왕님의 방에 사역마들을 모두 집합시켰습니다.”

    “함정들은?”

    연이어 물었다. 엘리고스가 힘겹게나마 미소지었다.

    “설치 자체는 모두 끝났습니다.”

    일부러 값비싼 완전품 함정들을 사들인 보람이 있었다. 조립형 함정들을 샀다면 제 시간 내에 함정 설치를 끝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던전 미어캣들이 숨고 싶어 합니다.]

    던전의 영혼이 연이어 말했다. 전투 마차와 던전 사이의 거리가 좁혀졌다는 단적인 증거였다.

    용호는 이번에도 수락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를 데리고 마왕의 방으로 돌아갔다. 한 자리에 모여 있던 사역마들이 모두 용호에게 예를 표했다.

    초조함을 다시 한 번 억눌렀다. 비단 사역마들 앞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급하면 다급할수록 차가워져야 했다.

    옥좌에 앉은 용호는 두 손을 크게 펼쳐 거대한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사역마들 모두가 약식화 된 던전 현황도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분위기에 짓눌린 코볼트가 낮게 끙끙거렸고, 카타리나는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용호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던전의 영혼이 말했다.

    [가주 포라스와 휘하 사역마들이 던전에 침입했습니다.]

    용호는 눈을 떴다. 던전 현황도에 표시된 포라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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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종의 사역마- 거대한 마수라 할 수 있을 던전은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이 아니었다.

    외형과 구조가 저마다 달랐고, 고유한 개성을 가진 개체도 존재했다.

    일반적인 던전들은 대부분 지하로 파고드는 형태였지만 저 오만의 왕의 미궁처럼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 형태인 것도 있었고, 아예 수상에 자리하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던전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일반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던전이었다.

    대부분의 던전들은 공유하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

    던전 출입구 방은 안전하다.

    마몬 가의 출입구 방에 들어선 포라스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 작은 방이 아니었지만 근 사십여 마리에 달하는 오크들과 임프 열 마리가 들어서니 비좁게만 느껴졌다.

    ‘새로운 가주가 들어섰군.’

    가주를 잃고 죽어가는 던전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활성화 된 방에 공급되는 마력으로부터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

    포라스는 오른손을 살며시 들어올렸다. 그러자 호위기사인 오크 버서커 고쿤이 낮은 목소리로 사역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크 중 한 마리가 다음 방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고, 벌벌 떠는 임프들 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 앞장서게 했다.

    포라스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열린 문을 통해 다음 방을 예의주시했다.

    방이 어둡지 않았다.

    여전히 마력으로 만들어진 조명이 공급되고 있었다.

    던전을 공격할 때 반드시 챙겨야 할 것들 가운데 하나가 조명수단이었다. 던전을 침공한 적들에게 친절하게도 조명을 제공해줄 던전 수비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지금 출입구 방과 바로 그 다음 방에도 조명이 존재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하나, 던전의 영혼이 아직 미숙하여 던전 내의 마력 공급을 세밀하게 컨트롤하지 못한다.

    조명을 끄기 위해 마력을 끊었다가 함정에 공급되는 마력까지 함께 끊어버리는 경우였다.

    각각의 기능에 공급되는 마력을 던전의 영혼이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발생하는 사고였다.

    둘, 새로 즉위한 가주가 던전 수비의 기초조차 모르는 애송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일부러 무시했다. 적을 얕보는 것은 패배의 지름길일 뿐이었다.

    포라스는 차분히 지켜보았다. 홀로 보낸 임프가 추락함정에 빠져 죽은 뒤에야 병력을 다음 방으로 진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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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라스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나아갔다. 추락함정이 설치된 함정 방 네 개를 최소한의 피해로 돌파했다.

    추락함정은 가장 기초적인 함정이었다. 노동력만 있다면 만들기 쉬웠고, 운용에도 큰 마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연달아 네 개의 추락함정 방을 지난 포라스는 다시 한 번 스스로의 생각을 확신했다.

    새로운 가주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던전의 영혼은 어렸고, 함정들의 수준 역시 높지 못했다.

    다섯 번째 방에 들어선 임프 한 마리가 벌벌 떨며 발걸음을 내딛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방을 완전히 가로질렀음에도 추락 함정이 발동하지 않았다.

    어찌보면 이것도 당연했다. 모든 통로를 함정으로 가득 채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물며 이제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가주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미숙한 조바심을 표현하듯 출입구 방 바로 앞에 연달아 설치한 네 개의 함정 방.

    포라스는 아주 약간이지만 긴장을 풀었다. 앞의 방들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사역마들을 진군시켰다.

    둘로 나눈 사역마들의 무리 가운데 첫 번째 무리인 오크 전사 스무 마리가 임프를 따라 다섯 번째 방에 들어갔다. 포라스는 나머지 스무 마리와 함께 사역마들이 여섯 번째 방을 개척하기를 기다렸다.

    그리하여 임프가 여섯 번째 방문을 연 순간.

    천장과 바닥에서 솟구친 불꽃이 다섯 번째 함정 방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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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된 패턴은 사람의 마음을 느슨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적이 습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발하는 조명 역시 그러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불꽃은 강렬했다.

    타고난 전사 종족이라 불리는 오크들답게 불꽃 함정이 발동한 순간 저마다 머리와 가슴 등을 보호하며 회피동작을 펼쳤지만 방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던 오크들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마력을 한껏 머금은 불길이 오크들을 불태웠다. 순식간에 여섯 마리나 되는 오크 전사들이 죽거나 다쳐 전투 불능에 빠졌다.

    포라스가 욕지거리를 토한 그 순간 마왕의 방에 모여 있던 마몬 가의 사역마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역시 주먹을 꽉 쥐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용호는 오히려 마른 침을 삼켰다. 던전 현황도에 펼쳐져 있는 ‘수십 칸’에 달하는 이동 경로를 보았다.

    마왕의 방과 던전 출입구 방 사이의 ‘직선거리’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출입구 방에서 마왕의 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마몬 가의 던전이 현재 가진 강점은 무엇인가.

    쓸데없을 정도로 넓은 공간.

    어마어마하게 많은 비활성화 방.

    용호는 기존 함정 방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위치한 비활성화 방들을 활성화 시켰다. 그리하여 단순히 일직선을 그렸던 함정 방들을 수십 칸에 달하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로 변모 시켰다.

    그 다음에는 그저 새로이 길을 이으면 되는 것이었다.

    거대한 직사각형 안에 든 수십 개의 정사각형 방들을 한 붓 그리기로 모두 통과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출입구 방을 시작으로 위로 쭉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한 칸 꺾은 뒤 다시 아래도 쭉 내려간다.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 칸 꺾은 뒤 이번에는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왼쪽으로 한 칸 꺾은 뒤 아래도, 그리고 다시 오른쪽으로 한 칸 꺾은 뒤 위로.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길고 긴 통로 사이사이에는 당연히 함정들이 설치 되어 있었다.

    출입구 방에서 마지막 함정 방 사이에 존재하는 방의 개수는 오십여 개 남짓.

    그중 함정이 설치 된 방은 스무 개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함정의 밀집도.

    어디에 어떤 함정을 설치해야 하는가.

    급히 병력을 수습한 포라스가 주의 깊은 조사 끝에 여섯 번째 방에 진입했다.

    용호는 개의치 않았다.

    여섯 번째 방에는 함정이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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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방에 함정을 설치할 필요는 없었다.

    어떤 방이든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적의 머릿속에 심어두면 충분했다.

    함정이 없는 방.

    사소한 함정이 있는 방.

    던전 상회에서 구매한 강력한 함정이 있는 방.

    완급 조절이 중요했다.

    안심한 순간에 강력한 한 방을.

    더 이상 함정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야말로 새로운 함정을.

    강력한 함정에 당해 주의 깊게 함정을 검토한 방에는 아무런 함정도 설치하지 않아 상대에게 허무함과 분노를.

    포라스와 그 사역마들은 첫 번째 ‘코너’를 돌아 기동을 계속했다. 지금까지 위로 올라갔다 친다면 이제는 내려가는 구간이었다.

    이십여 개에 달하는 방을 통과하는 사이에 조금씩 누적된 피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는 사역마들도 상상 이상으로 큰 피로함을 느꼈다.

    그리고 나타난 두 번째 코너.

    다시 방향을 바꿔 위로 이동하게 된 포라스는 어느 순간 멈춰 섰다.

    피로와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포라스는 늙은 가주였고, 그만큼 노련한 가주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던전을 자그마치 칠십여 년 동안이나 운영해온 던전의 주인이었다.

    코너 하나였다면 무리였겠지만 코너 두 개를 돌았다. 위 아래로 반복되는 구간들을 통과하며 머릿속에 던전의 구조를 그려보았다.

    그리하여 내리게 된 확신.

    포라스는 사역마들을 모두 멈춰 세웠다. 그리고 다음 방으로 이어진 문을 기준으로 하여 왼쪽으로 돌아섰다.

    입구 하나 없는 벽.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약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면 이 너머에는 통로가 존재했다.

    새로 즉위한 가주는 생각 이상으로 만만치 않은 적수였지만 그렇다 해도 가주에 즉위한 기간이 짧은 것만은 분명했다. 이 정도로 무리하게 많은 방들을 활성화 시켰다면 방과 방 사이에 놓인 ‘벽의 강화’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지금 같이 빙빙 도는 구조라면 방과 방 사이의 벽이 얇을 가능성이 높았다.

    포라스는 벽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

    던전 공격자의 필수 아이템 가운데 하나인 ‘벽 파괴’의 마법이 담긴 스크롤을 발동시켰다.

    진동에 연이은 굉음.

    커다랗게 뚫린 구멍 너머로 새로운 방이 드러났다.

    포라스는 미소지었다.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손을 들어올렸다.

    사역마들과 함께 ‘지름길’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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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2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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