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37화 (37/227)
  • < 제 11장 #3 >

    “예리하시네요.”

    시트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눈으로, 마치 물건의 값을 매기는 것만 같은 눈으로 용호를 보았다. 혀를 살짝 내밀어 관능적인 아랫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조금만 더 말씀해 보시겠어요?”

    용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시트리의 미색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머릿속으로 카타리나를 떠올려 보았다.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졸고 있던 카타리나의 얼굴이 떠오르자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고, 어느 정도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용호는 한결 홀가분해진 얼굴로 자연스럽게 말했다.

    “전전대와 전대 가주 시절에 포라스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엘리고스 말에 따르면 공백지 내의 가주들끼리도 팽팽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더군요.”

    힘의 균형에 의해 만들어진 평화.

    서로가 서로를 적대하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어느 하나를 치는 사이에 다른 하나가 자신의 등을 칠 수도 있다.

    “망해간다고는 하나 그래도 하나의 던전. 공격해서 빼앗기 위해서는 시간과 병력이 소모됩니다. 그 사이에 다른 가주들에게 오히려 자신의 던전이 위험해질 수도 있고요.”

    “그리고 마몬 가의 던전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손에 넣을 가치는 없고요?”

    시트리가 약간 거들듯이 말했다.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마주하면 그저 아름답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카타리나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예. 3대 전 가주- 왜곡의 마왕 카이완 이후 마몬 가는 정말로 약해졌으니까요.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니 움직이지 않은 것이겠죠.”

    계륵.

    먹자니 귀찮고, 먹지 않고 버리자니 아깝다.

    하지만 결국 가주 포라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몬 가를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심지어는 전대 가주가 죽어 마몬 가의 던전이 역대 최약 수준으로 약해졌을 때조차 말이다.

    “그런데 지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도 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것 같더군요.”

    단순한 심경의 변화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엘리고스가 처음 말했던 것처럼 방어막이 약해지기를 기다렸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의문이라면 한 가지 더.”

    시트리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외라서 그런다기 보다는, 용호가 무슨 말을 할지, 자신이 생각하는 말을 꺼낼지를 궁금해 하는 얼굴이었다.

    용호는 왼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마몬 가의 던전을 탐사하며 새로운 시설들을 발굴할 때마다 든 생각입니다.”

    시트리는 다시 아랫입술을 핥았다.

    용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

    하지만 나날이 커져만 간 위화감.

    “마몬 가의 던전은 정말로 다른 공백지의 가주들에게 있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일까?”

    용호는 다시 눈을 떴다. 서두르지 않았다.

    “마몬 가의 선조… 거의 탐욕의 왕 마몬의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마몬 가의 던전에는 많은 시설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당장 3대 전 가주인 카이완이 남긴 무기고와 금광을 제가 발견했고요.”

    시설들만이 아니었다.

    마몬 가의 던전에는 홍련의 마창 아몬을 비롯해 수많은 비보들이 숨겨져 있었다.

    “처음에는 ‘마몬의 사역마’를 비롯한… 괜히 얌전한 벌집을 건드리는 상황을 피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더군요. 마몬 가의 던전은 굉장히 가치 있는 던전입니다. 강한 힘을 가진 가주라면, 강력한 사역마들을 거느린 가주라면 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마몬의 유산들을 확보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아무도 마몬 가를 탐하지 않는다?”

    시트리가 빙긋 웃으며 추임새를 넣었다. 용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방어막이 문제라면… 사실 그건 잔챙이들에게나 문제가 되는 것이겠죠."

    마계를 지배한다는 여섯 왕까지 갈 것도 없었다.

    어느 정도 세력을 가진 마왕이라면, 지금의 용호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마왕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아무도 마몬 가의 던전을 탐하지 않았다.

    마몬 가의 던전이 마계의 끝에 존재해서? 너무 구석진 곳에 자리한 던전이라?

    가당치 않았다. 마계의 반대쪽 끝에 자리한 가주들이라면 모를까, 공백지의 가주들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손이 닿는 거리에 불과했다.

    시트리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 허공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용호와 시트리 사이의 거리가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의자가 움직였다기 보다는 바닥이 좁아진 기분이었다.

    이제는 서로 무릎이 닿을 것 같은 거리.

    시트리가 상체를 살짝 숙이더니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소리죽여 물었다.

    “엘리고스와는 의논해 보셨나요?”

    “아직입니다.”

    시트리는 다시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자 아예 시트리의 의자가 빙글 회전하더니 용호가 앉아 있던 의자와 하나가 되었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팔걸이는 자연스럽게 사라졌고, 시트리는 용호에게 자연스럽게 몸을 기댔다. 상상을 초월한 부드러움과 향긋함에 용호가 순간 몸을 긴장시켰다.

    시트리는 그런 용호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 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시트리는 용호의 허벅지 위에 가볍게 손바닥을 올리며 속삭였다.

    “포라스부터 시작을 해보도록 하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적으로 거리를 벌리는 대신 다시 한 번 카타리나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냉정한 척 하며 귀를 펄럭이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나마 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시트리는 비어있는 오른손을 놀렸다. 용호와 자신 앞에 커다란 빛의 창을 만들었다.

    “마몬 가가 속해있는 남부 공백지입니다. 과거 탐욕의 왕 마몬의 시절에는 모두 마몬 가의 땅이었죠.”

    마계 전체로 따지자면 칠 분의 일은 될 정도로 큰 땅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가주들이 저마다의 던전을 가지고 있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공백지의 가주들은 나름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섣불리 전쟁을 벌여서 좋을 것이 하나 없는… 미묘한 균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죠.”

    과거형이었다. 용호가 반사적으로 반응했고, 시트리는 만족했다.

    “균형이 깨진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남부 공백지의 북서쪽 끝에 위치한 가주 하나가 갑자기 활발한 정복 전쟁을 시작했거든요. 그것도 파죽지세. 단 한 번도 지지 않고 그 세력을 넓히고 있답니다.”

    지도의 북서쪽 일대가 하나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용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맞아요, 고객님. 포라스는 살아남기 위해 강해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한 겁니다.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말이죠.”

    균형이 깨졌다. 도미노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팽팽한 균형 속에 유지되던 남부 공백지의 평화는 무너졌다. 바야흐로 난세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시트리는 숨을 골랐다. 용호를 돌아보았고, 그 귀에 속삭였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포라스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용호는 시트리가 무슨 말을 할 지 직감했다.

    용호 자신이 던졌던 두 번째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카이완뿐만 아니라 전대와 전전대 가주도, 탐욕의 왕 마몬 이래 역대 마몬 가의 가주들이 목숨을 걸고 지킨 비밀입니다.”

    의자가 다시 둘로 갈라졌다. 시트리는 용호의 정면에 자리했다.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대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용호의 눈을 마주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 탐욕의 왕 마몬은 마계의 4분의 1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몬의 본성- 가장 거대하고 강력한 던전은 ‘탐욕의 미궁’이라 불렸죠.”

    시트리의 등 뒤에 자리한 빛의 창에 새로운 그림들이 연이어졌지만 용호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시트리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주시하였다.

    “탐욕의 왕 마몬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 직후, 마몬에게 억눌려 있던 다른 왕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마몬 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마몬의 본성이었던 ‘탐욕의 미궁’은 완벽히 파괴되었죠.”

    시트리는 눈을 감았다. 한순간에 깊은 피로를 느낀 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목소리를 토했다.

    “마몬이 모아둔 수많은 보물들을 약탈하고, 탐욕의 미궁까지 파괴한 왕들은 만족했습니다. 마몬을 공격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인 ‘신기’까지 모두 약탈했으니 만족할 수밖에요.”

    ‘신기?’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용호는 시트리의 말을 끊지 않았다. 일단은 잠잠코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탐욕의 미궁은 파괴되었다. 마몬 가의 보물은 모두 다른 왕들에게 약탈당했고, 마몬 가를 수호하던 열두 사역마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이 마계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시트리는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끊었다. 천천히 눈을 떠 용호를 바라보았고, 그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용호는 이해했다.

    “탐욕의 미궁은 건재하군요.”

    “맞아요. 왕들의 공격에 무너진 것은 가짜 탐욕의 미궁이죠. 진정한 탐욕의 미궁은… 현재 마몬 가의 거점인 바로 그 던전이랍니다.”

    마몬의 사역마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탐욕의 미궁에 남아 있었다.

    일곱 개의 신기 가운데 넷이, 마몬이 모았던 칠대죄악의 힘 가운데 셋 모두가 사라졌기에 마계는 탐욕의 미궁이 파괴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무너진 것은 거짓된 본성.

    신기와 죄악을 잃은 것은 분명했지만 그 대신에 다른 모든 것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마몬 가를 치는 것은 남부 공백지의 뜨내기들 정도가 아닐 겁니다. 마계를 지배하는 여섯 왕들이 움직이겠죠.”

    탐욕의 왕 마몬의 모든 것을 앗아가기 위해.

    혹시 모를 위험요소를 이 세상에서 제거하기 위해.

    “전대와 전전대까지는 오히려 사실을 숨기기가 쉬웠습니다. 워낙에 몰락했고, 사역마들도 뭔가 새로운 게 발견되면 3대 전 가주인 카이완의 유산이라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천용호 님은 조금 다르시겠죠?”

    용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사실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용호는 시트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여자.

    마몬 가에 오랫동안 관여하였고, 용호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그녀.

    “시트리 씨. 당신은…….”

    “던전 상회의 거물이죠.”

    시트리가 용호의 말을 끊었다. 마치 용호가 미처 꺼내지 못한 말을 부정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마나 포션의 빚을 덜고 싶으신 것 같으니 이번 정보료는 조금 높게 잡도록 하죠.”

    용호는 더 이상 시트리의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빈틈없는 영업용 미소만을 만면에 띄운 시트리가 손가락을 놀리자 용호와 시트리 사이에 작은 빛의 창이 생겨났다.

    빛의 창에는 금광을 담보로 얻을 수 있는 돈과 용호가 주문했던 각종 자재들의 대금, 정보료 등이 표기되어 있었다.

    용호는 미련을 버렸다. 어찌되었든 당장에 중요한 것은 가주 포라스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남은 금액으로는 사역마를 구매하도록 하죠. 포라스에 관한 정보도 구매할 수 있을까요?”

    “2성 사역마와 3성 사역마를 하나씩 구매하시면 될 것 같네요. 그리고 포라스에 대한 정보라면… 비싼 정보를 사셨으니 제가 살짝 서비스 해드리도록 하죠.”

    시트리는 빛의 창을 치웠다. 다시금 용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던전 상회는 가주들의 정보를 거래하지 않습니다. 가주들도 자신들의 정보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고요. 포라스 역시 그 마왕명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희 던전 상회는 알고 있지만, 아무리 사랑하는 고객님께라도 누설할 수는 없네요.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마왕의 권능은 각각의 마왕들이 가진 비장의 카드였다. 비밀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제가 천용호 님께 드릴 수 있는 정보는… 포라스는 주로 오크들을 사역마로 부린다는 사실 정도겠네요. 대부분 근접전을 즐기는 무투파들이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포라스의 휘하에 오크들이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이긴 했지만, 시트리에게 더 이상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고객님, 즐거운 거래였습니다. 다음에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한 시트리는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

    혼자가 된 용호 앞에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사역마들의 카탈로그가 놓여 있었다. 남은 금액을 보아하니 2성 사역마와 3성 사역마를 각기 하나씩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용호는 당장의 일에 집중했다.

    던전 상회의 노예 사역마 카탈로그를 펼쳤다.

    &

    < 제 11장 #3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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