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31화 (31/227)
  • < 제 9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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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호는 눈을 떴다. 온통 하얗기만 한 던전 상회의 가상공간 대신 돌로 된 천장과 벽이 보였다. 마왕의 방이었다.

    거래는 무사히 끝났다. 더욱이 무척이나 성공적인 거래였다.

    ‘사실상 거래가 아니라 빚을 진 셈이지만.’

    하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지금 당장은 결과를 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가상공간에 다녀올 때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피로감 속에서도 용호는 기분 좋게 웃었다. 빠르게 손가락을 놀려 던전 현황도를 담은 빛의 창을 만들어냈다.

    [예속 사역마 엘리고스가 고블린들과 함께 함정 설치 작업 중입니다.]

    [예속 사역마 카타리나가 코볼트를 데리고 사냥에 나갔습니다.]

    [살라멘더와 트리엔트가 입구 경비를 맡고 있습니다.]

    던전의 영혼이 현재 사역마들의 상황을 하나하나 나열해주었다.

    용호는 다시 손가락을 놀려 던전 현황도를 해제했다. 그러자 저만치 바닥에서 언제나처럼 나뒹굴고 있는 스컬이 보였다.

    [예속 사역마 카타리나가 던전 상회 가상공간에 접속 중이신 주인님의 호위를 위해 남기고 갔습니다.]

    ‘호위라는 게 저렇게 하는 게 아닐 텐데.’

    하지만 길가의 돌멩이처럼 저렇게 굴러 다니는 것이 스컬에게는 참 어울리기도 했다.

    “스컬컬.”

    용호의 시선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스컬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화 마법이 걸려 있는 갑주 상의와 전투 망치, 불꽃과 번개에 내성을 가진 징 박힌 둥근 방패. 허리춤에 예비용으로 찬 화속성 검 한 자루.

    여기에 매직 아이템은 아니지만 튼튼한 투구까지.

    어떤 의미로 보면 현재 마몬가의 그 누구보다도 견고한 무장을 하고 있는 스컬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긴 했지만 스컬은 딱히 용호에게 다가서지는 않았다. 그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멍한 얼굴로 서 있기만 했다.

    ‘언데드 몬스터들에게는 모두 전생이 있습니다. 소체가 되는 ‘시체’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들이니까요.’

    새삼 엘리고스의 설명을 떠올린 용호는 턱을 어루만지며 스컬을 관찰했다.

    스컬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

    일단 뼈대가 인간의 것과 동일한 것을 보면 인간형 마족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고블린이나 코볼트 같은 소형 몬스터도 아니었을 테고 말이다.

    ‘혹시 전생에 장군이나 유명한 전사는 아니었을까?’

    사역마들 사이에서는 바닥 중의 바닥이라 할 수 있을 스켈레톤 일꾼일 때부터 혁혁한 공을 세운 스컬이었다. 당장 이번에 오크들과의 전투에서도 탁월한 무기 투척으로 용호 자신의 생명을 구하지 않았던가.

    스켈레톤 워리어로 승급한 이후 움직임에 묘하게 절도가 묻어나는 걸 보면 전생에 제대로 된 무술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었다.

    ‘에이, 설마.’

    용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꽤나 기분 좋은 망상이었지만 아무래도 현실성이 없었다.

    언데드 몬스터는 ‘고정’된 존재들이었다. 한 번 만들어지면 그것으로 끝. 더 이상의 약화도, 성장도 존재하지 않았다.

    똑같은 종류의 언데드 몬스터라도 재료가 된 소체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강약이 갈렸다.

    만약 스컬이 정말로 유명한 장군이나 뛰어난 전사였다면 던전 상회가 머리에 총이라도 맞지 않는 한 스컬을 고작 ‘일꾼’으로 재탄생 시켰을 리가 없었다.

    데스나이트- 아니, 못해도 스켈레톤 나이트 같은 제대로 된 언데드 전사로 만드는 쪽이 훨씬 더 수지맞는 장사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름 없는 병사. 그것도 아니면 그냥 일반인.

    아무래도 좋았다. 어찌되었든 지금 눈앞의 스컬은 마몬 가 던전의 에이스 가운데 하나였고, 다른 언데드들과 다르게 계속 성장해나갈 존재였다.

    “너는 나랑 끝까지 가는 거다. 스컬.”

    용호가 씩 웃으며 말하자 스컬이 고개를 돌려 용호를 보았다. 하지만 무어라 호응하는 대신 그저 멍한 얼굴로 용호를 쳐다보기만 하였다.

    “흠흠.”

    어째 민망해진 용호는 헛기침을 토한 뒤 자세를 바로 했다. 다른 가주들이었다면 무엄하다며 스컬에게 호통을 쳤을 상황이었지만 용호는 그러지 않았다. 저런 멍한 모습이야말로 스컬다운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용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다시 스컬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끝까지 함께 갈 거라면. 그리고 계속해서 성장시킬 것이라면.

    ‘아예 예속 사역마로 삼는 게 낫지 않을까?’

    가주와 예속 사역마는 하나로 이어진 존재였다.

    가주가 강해지면 예속 사역마가 강해졌고, 예속 사역마가 성장하면 가주 역시 성장했다.

    카타리나의 경우만 생각해보아도 효과는 분명했다. 카타리나가 단시간내에 지금만큼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진화의 권능도 권능이었지만, 가주인 용호 자신도 카타리나 못잖게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용호가 다시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다. 던전의 영혼에게 물었다.

    “예속 사역마를 늘리는 데 제한 같은 것이 있나?”

    [예속 사역마는 던전을 소유한 가주와 이어진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주가 강하면 강할수록 많은 예속 사역마를 수하에 둘 수 있습니다.]

    [던전 상회에서 주입한 정보에 따르면 남부 공백지의 일반적인 가주들은 일반적으로 세 명에서 다섯 명 정도의 예속 사역마를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예속 사역마의 선택은 무척이나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한 번 예속 사역마로 결정된 존재를 일반 사역마로 전환시키는 것은 무척이나 큰 대가를 치러야만 합니다.]

    “큰 대가?”

    [마력의 일부를 통째로 상실하는 것이 가장 흔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 때 잃는 마력은 때로는 예속 사역마를 통해 얻은 마력보다도 클 수 있습니다.]

    얻은 것 이상의 마력을 잃는다면 확실히 큰 대가라 할 수 있었다.

    용호가 턱을 쓰다듬으며 재차 물었다.

    “가주나 예속 사역마 한 쪽이 죽으면 어떻게 되지? 다른 한 쪽에 영향을 끼치나?”

    [마찬 가지로 마력의 일부를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예속 사역마는 가주에게 있어 수족과 같은 존재입니다. 아무리 사이가 나쁜 가주와 예속 사역마라 해도 서로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는 용호가 가주가 되기 전부터 마몬 가의 예속 사역마였다. 그렇다면 둘 역시 전대 가주의 죽음에서 깊은 상실감을 느꼈을 터였다.

    ‘대략 1년 이라고 했지.’

    용호는 잠시 카타리나와 엘리고스의 죽음을 생각해보았다. 상상이었음에도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그만큼 끔찍한 일이었다.

    고개를 내젓는 것으로 불쾌한 상상을 몰아낸 용호는 다시 스컬에게 집중했다. 던전의 영혼에게 물었다.

    “스컬을 내 예속 사역마로 삼는 것이 가능할까?”

    [주인님께서는 현재 최대 네 마리까지 예속 사역마를 휘하에 두실 수 있습니다. 때문에 던전 사역마 스컬을 예속 사역마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를, 그것도 스켈레톤 워리어 수준의 사역마를 예속 사역마로 삼는 경우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한 명의 가주가 거둘 수 있는 예속 사역마의 숫자는 한정적이었다.

    진화의 권능을 거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사역마들은 ‘성장’할 수 있었다. 수련을 통해 강해지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언데드 몬스터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고정된 존재들이었다.

    성장할 수 없는 예속 사역마와 성장할 수 있는 예속 사역마가 있다면 둘 중에 어느 쪽이 효율적이겠는가?

    더욱이 스켈레톤 워리어는 그리 고급 언데드가 아니었다. 살짝 자학하는 느낌도 들었지만 잡병보다 약간 나은 수준에 불과했다.

    아마 마계 전체를 뒤져봐도 스켈레톤 워리어를 예속 사역마로 둔 가주는 찾아보기 힘들 터였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용호 자신에게는 진화의 권능이 있었으니까.

    스컬이 지금은 비록 스켈레톤 워리어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미래에는 그보다 훨씬 더 상위의 존재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

    “스컬컬.”

    이제까지 침묵하던 스컬이 목소리를 냈다. 마치 용호의 속내를 읽은 것 같은 그 반응에 용호는 마음을 결정했다. 던전의 영혼에게 말했다.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지. 스컬의 예속 사역마화를 진행해줘.”

    [주인님의 잔여 마력을 거의 전부 다 소진해야 합니다.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던전 상회에서 택배 기사가 오는 건 내일이야.”

    물론 그 사이에 적이 쳐들어온다면 낭패였지만 그럴 가능성은 꽤 낮았다.

    [알겠습니다. 던전 사역마 스컬의 예속 사역마 등록을 시작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몸의 긴장을 풀어주세요.]

    용호는 던전의 영혼의 말을 따라 옥좌에 몸을 묻었다. 눈을 감기 전에 마지막으로 스컬을 쳐다보았다.

    “스컬컬.”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스컬의 예속 사역마 등록을 시작했다.

    &

    하루가 지났다.

    언제나 신속 정확한 던전 상회답게 정오가 되기 이전에 던전 상회의 택배 기사가 던전을 방문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를 비롯한 사역마들과 더불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용호는 바로 무기를 넘기고 마나 포션 네 병을 수령했다.

    마나 포션이 들어있는 작은 함에는 편지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시트리의 손 글씨 편지였다.

    안녕하세요, 사랑하는 고객님.

    이 포션 한 병으로 회복할 수 있는 마력량은 천용호 님의 현재 마력량보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병만 마시는 일은 삼가주세요.

    이 한 병이 통째로 정량이기 때문에 반병만 마시면 제대로 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답니다.

    포션에 약간의 부가효과도 첨가했습니다. 어떤 효과인지는 비밀이지만 분명 도움이 될 거랍니다.

    깜짝 선물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설명서가 너무 길었네요.

    사랑하는 고객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마몬 가와 사랑하는 고객님의 신실한 벗 시트리 올림.

    추신 :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저 마몬 가 전담 아닙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에서 시트리의 농염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랬기에 용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자 노력했다.

    ‘현혹 되지 말자.’

    무척이나 큰 호의를 보여주고 있는 대상에게 이런 생각을 품는 것은 미안했지만 역시 시트리는 너무 위험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웠고, 또한 매력적이었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빠져드는 사태는 피하는 게 좋았다.

    ‘그래도.’

    묘하게 귀여운 추신에 용호는 결국 작게나마 웃고 말았다. 편지를 읽는 자신을 힐끔거리는 카타리나에게 말했다.

    “컨디션은 괜찮아?”

    갑작스런 물음에 놀랐는지 잠깐 허둥거렸지만 이내 카타리나는 이제는 포기한 줄 알았던 냉정한 여기사의 모습으로 대답했다.

    “최고입니다.”

    꼬리가 등 뒤에서 파닥파닥 거리는 거 보니 진짜인 모양이었다. 연이어 다른 곳에서도 대답이 돌아왔다.

    “스컬컬.”

    예속 사역마가 됨에 따라 한층 더 강해진 스컬이 카타리나의 곁에서 고개를 달그락 거렸다. 이전보다 조금 더 움직임이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그런 스컬의 난입에 카타리나는 살짝이지만 입술을 움츠렸다. 스컬이 자신과 똑같은 예속 사역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묘하게 토라진 카타리나였다.

    ‘질투하나.’

    그러고 보면 무기고 때도 스컬을 라이벌(?)처럼 생각하던 카타리나였으니까.

    하지만 걱정할 수준도 아니었고, 오히려 저 정도 질투심은 카타리나의 향상심을 자극하기에 딱 좋았다.

    용호는 마지막으로 고블린 레인저들과 함께 선 엘리고스를 돌아보았다.

    “엘리고스, 뒷일을 부탁할게.”

    “승리하고 돌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엘리고스와 고블린 레인저, 트리엔트는 금광 탈환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데려가면 분명 크든 작든 도움이 될 터였지만, 그들에게는 따로 수행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용호가 다시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녀오면 이번에야말로 진화하는 거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엘리고스가 다시 즐겁게 답했다. 고블린 레인저와 트리엔트도 저마다 예를 표하며 용호의 건승을 기원하였다.

    아직 조금은 이른 시간.

    용호는 의식적으로 몸을 풀었다. 시트리의 선물인 마나 포션을 미리 준비해둔 허리띠에 하나씩 꽂아 넣은 뒤 던전 안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카타리나와 스컬, 살라멘더가 그런 용호의 뒤를 따랐다.

    가주 포라스의 공격 예상일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

    용호는 금광 탈환을 개시하였다.

    제 9장 - 카이완 끝, 제 10장 - 금광 탈환전으로 이어집니다.

    < 제 9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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