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장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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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온통 하얀 세상의 중심에는 붉은 머리칼의 미녀가 서 있었다.
혹여나 다른 직원이 서 있거나, 아예 대화가 불가능한 판매처가 있을까 걱정했던 용호는 속으로나마 안도의 한숨을 토했다.
지금 용호에게는 ‘교섭’이 가능한 대상이 필요했다.
던전 상회의 일원인 시트리는 싱그러운 미소를 그리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누가 봐도 아름다운 자태로 속삭이듯 말했다.
“이렇게 다시 뵈니 반갑네요, 고객님.”
“저도 반갑습니다.”
짐짓 여유롭게 답한 용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카타리나를 자주 봐서 그런지, 아니면 상황이 워낙 시급하기 때문인지 시트리와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이전처럼 버겁지는 않았다.
용호는 시트리에게 다가섰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춘 뒤 약간은 농담처럼 말했다.
“이쯤 되면 시트리 씨를 마몬 가 전담으로 생각해도 되겠죠?”
“우연찮게 방문하실 때마다 제가 여유 시간이 있네요. 용호님의 인계에서는 이런 걸 보고 연이 있다고 한다죠?”
시트리는 이번에도 여유 있게 답했다. 역시나 그녀는 위험했다. 작은 몸짓이나 목소리에도 사람을 현혹시키는 힘이 어려 있었다.
용호는 무리해서 농담을 건네는 대신 시트리의 두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저 눈을 마주한 것뿐인데도 매혹당할 것 같았다. 어쩌면 시트리야말로 서큐버스인 것이 아닐까?
시트리가 다시 웃었다.
“사랑하는 고객님. 오늘은 어떤 거래를 원하시나요? 새로운 사역마를 구매하러 오신 건가요? 아니면 식량 같은 생필품? 저희 던전 상회에서는 새로운 함정이나 시설을 위한 장비 역시 취급한답니다.”
하지만 어느 쪽도 아니었다. 용호는 약간의 시간을 두고 말했다.
“구매에 앞서 물건을 좀 팔고 싶습니다.”
“마몬 가의 물건들을 말씀이신가요?”
“예, 일반적인 병장기들입니다.”
대답한 용호는 허공에 손가락을 놀렸다. 던전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요령으로 의지를 전달하자 허공에 빛의 창이 형성되었다.
마치 쇼핑몰 카탈로그처럼 칸이 나눠진 빛의 창 안에는 무기들이 일렬로 쭉 나열되어 있었다.
옥좌 바로 옆, 던전 상회의 인식 마법진 위에 올려둔 무기고의 병장기들이었다.
“질이 좋은 병장기들이군요.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트리가 빛의 창 쪽으로 손을 뻗자 빛의 창 안에 나열되어 있던 병장기들 가운데 일부가 실체화 되었다. 시트리는 빛의 창밖으로 자루만 불룩 튀어나온 도끼를 부드럽게 움켜쥐었고, 마치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듯 빛의 창에서 도끼를 뽑아냈다.
시트리의 가느다란 팔로는 드는 것조차 힘겨워 보이는 거대한 전투도끼였다.
하지만 시트리는 마치 장난감 다루듯이 전투도끼를 빙글빙글 돌렸다. 얼굴 바로 앞까지 들어 올린 뒤 가늘게 뜬 눈으로 전투도끼를 살펴보았다. 약간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이완.”
시트리의 시선은 달을 문 늑대의 문장 위에 멎어 있었다.
용호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
“그녀를 아시나요?”
시트리는 바로 답하는 대신 잠시 시간을 두었다. 손에 들고 있던 전투도끼를 길게 늘어트린 뒤 기억을 더듬듯 약간은 먼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앙칼지고 귀여운 아이였죠.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고, 괜히 강한 척 하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그런 아이. 이번에도 용호님의 인계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그래요, 들고양이에 비유할 수 있겠네요.”
말을 마치며 시트리는 아주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온화했지만 약간의 슬픔이 어려 있었다.
들고양이.
잿빛 머리칼을 가진 표독스런 마녀.
시트리는 3대 전 가주인 카이완의 시대에도 마몬 가와 거래를 했던 것일까? 혹시 그때야말로 마몬 가의 전담 관리인이었던 것은 아닐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묻지는 않았다.
그보다 용호는 시트리가 카이완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단어들에 주목했다.
앙칼지고 귀여운 아이.
카이완은 수십 년 전에 마몬 가의 가주였었다. 그것은 곧 시트리 역시 못해도 수십 년 이상을 살아온 존재라는 뜻이었다.
더욱이 지금 시트리는 카이완을 어린 아이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고위 마족의 경우엔 불로장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새삼 카타리나의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역시 시트리는 본인 말마따나 ‘거물’인 것일까? 수십 년 세월의 흐름을 가볍게 비껴낼 정도로?
시트리가 다시 용호를 보았다. 감정을 모두 털어냈는지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전부 좋은 무기들입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마법이 걸려 있지는 않죠. 그리고…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던전 상회는 ‘한 번 팔았던 상품’을 중고로 재매입 하는 일에는 꽤나 인색한 편이랍니다. 용호님은 이것들을 팔아 얻은 돈으로 무얼 사고자 하시는 거죠?”
용호는 시트리의 말을 ‘간섭’이 아닌 ‘교섭’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마력을 단시간에 회복시킬 수 있는 물약 같은 것을 원합니다.”
RPG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마나 포션.
현재 마몬 가의 던전에서 가장 강력한 ‘화력’을 지닌 것은 역시 용호 자신이었다. 하지만 아몬의 녹염은 지나칠 정도로 마력 소모가 심했다. 수십, 어쩌면 수백 마리에 달할지 모를 크레이지 앤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쪽 역시 녹염의 사용 횟수를 늘려야만 했다.
“마나 포션 말씀이시군요.”
시트리는 가볍게 팔짱을 꼈다. 흥미가 동했는지 마치 탐색하듯 용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강력한 마족들에게는 마나 포션이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마나 포션으로 회복시킬 수 있는 마력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한창 성장 중이신 지금의 용호님에게는 딱 적절한 아이템일지도 모르겠군요.”
마나 포션의 존재 사실과 그 능력의 한계는 이미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를 통해 확인한 용호였다.
지금 중요한 것은 병장기를 팔아 번 돈으로 과연 몇 개나 되는 마나 포션을 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시트리는 늘 그러했던 것처럼 가슴골 사이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들었다. 새끼손가락 하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유리병 안에는 파란 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알고 계실 것 같지만… 마나 포션은 무척이나 비쌉니다. 마력은 우리 마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요. 아무리 최고위 마족들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라지만… 마계의 모든 마족들이 최고위 마족인 것은 아니죠. 남부 공백지의 가주들이라면 다들 마나 포션을 하나라도 더 구하고 싶어서 안달을 부릴 겁니다. 공급보다 수요가 월등히 많으니까요.”
어째 전조가 좋지 못했다. 시트리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이 병 하나면 용호님의 마력을 단번에 최대치까지 회복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가지고 오신 일반 병장기 스무 개로는 이 병 하나도 제대로 구매하실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말하며 시트리는 용호의 눈을 보았다. 용호 역시 시트리의 눈을 보았다.
그냥 돈이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거면 구태여 저렇게 말을 끌 이유가 없었다. 용호가 처음 간파했던 것처럼 시트리는 ‘교섭’의 여지를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저와 고객님 사이니까요. 약간의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하죠.”
용호가 기다리고 있던 반응이었다. 그런데 바로 연이어진 말은 용호의 예상을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러니 이야기를 해주세요.”
“이야기요?”
“예, 어째서 마나 포션을 필요로 하시는지. 마몬 가가 지금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솔직하게만 말씀해 주신다면 마나 포션 세 병- 아니, 네 병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무척이나 정당한 거래겠죠?”
시트리는 생글 거리며 웃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미녀인 시트리의 미소는 맑고 투명했고, 그 안에 어떤 사심이 깃들어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랬기에 용호는 시트리를 경계했다.
그녀는 분명 용호 자신과 마몬 가에 ‘호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녀의 호의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녀는 왜 마몬 가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그녀가 마몬 가의 ‘후견인’은 아닐까 생각했다. 카이완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무엇 하나 명확하지 않았다. 섣부른 추측과 괜한 기대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용호는 시트리와의 이 미묘한 관계를 이용해야만 했다.
애당초 금광을 탈환해 급전을 마련한다는 계획 역시 시트리의 호의를 어느 정도는 전제로 하고 있었다. 금광이 제대로 된 수익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용호는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골랐다. 마음을 정했다. 시트리가 놀랄 정도로 짧고, 경쾌하게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 하였다.
어설픈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용호가 반인반마라는 사실도, 칠대죄악 가운데 하나인 탐욕을 이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는 시트리였다. 그녀에게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것은 역효과만 부를 뿐이었다.
용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시트리는 용호만큼이나 단순하게 자신의 감상을 표현했다.
“신기하네요.”
시트리는 웃었다. 정말로 신기하다는 듯 작게 감탄하며 용호를 보았다. 붉은 색 두 눈동자에 어린 감정은 분명 이전에 한 번 마주한 적이 있는 것이었다.
“용호님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보통은 항복하거나 도망칠 생각을 먼저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용호는 그러지 않았다. 통상적인 방비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때야말로 금광을 탈환해야 한다며 시트리 자신을 찾아왔다.
시트리의 말에 용호 역시 약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트리가 말하기 전까지는 아예 ‘도망친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트리는 그런 용호의 표정을 읽었다. 조금 전보다도 더 많은 감정을 담은 미소를 지었다. 약간이지만 아예 소리 내어 웃기까지 했다.
“정말이지. 참으로 ‘탐욕’의 주인다우시네요. 노파심에 말하지만 이건 지금 칭찬하고 있는 거랍니다.”
용호는 무어라 응대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시트리는 그런 용호의 당혹스러움을 금방 해소해주었다. 연달아 가슴골에서 마나 포션을 세 병 더 꺼내 들었다.
“거래는 언제나 정직하게 지켜져야겠죠. 오늘 내로 병장기를 회수하고 포션을 전달하기 위한 인원을 마몬 가의 던전에 파견하겠습니다. 멀리서나마 천용호님의 건투와 승리를 기원할게요.”
말을 마친 시트리는 용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용호가 시트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녹아내리는 것이 아닐까 두려울 정도로 부드러운 시트리의 손을 가볍게 흔든 뒤 짧게나마 감사를 표했다. 괜한 말을 더 늘어놓는 대신 던전 상회 가상공간과의 연결을 끊었다.
마치 온라인 게임에서 캐릭터가 로그아웃 한 것처럼 온통 하얀 가상공간에서 용호의 존재가 사라졌다. 이제 하얀 하늘과 땅 사이에는 오직 시트리만이 존재했다.
시트리는 용호가 사라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에 보이는 지면 대신 다른 것을 보았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몬. 가끔은 저보다도 엉덩이가 더 무거운 것 같은 당신인데… 당신이 그를 찾아낸 건가요? 아니면 그가 당신을 부른 걸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시트리는 만족했다. 느긋한 얼굴로 바람 한 점 없는 하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시트리의 두 눈은 하늘이 아닌 다른 것을 비추었다.
저 너머에 자리한 무언가.
시트리의 기억 속에 자리한 어떤 한 사람.
시트리는 그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만들어진 새하얀 침대 위에 몸을 묻었다.
< 제 9장 #3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