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장 - 카이완 >
제 9장 - 카이완
이미 몇 번이나 사용해본 진화의 권능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진화에 필요한 시간도, 마력도 예상을 뛰어넘었다.
0레벨인 능력을 1레벨로 진화시키는 데는 그리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용호가 던전의 영혼에게 남은 마력 전부의 양도를 요청한 것은 어디까지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마력이 순식간에 소진되었다.
던전의 영혼에게 양도받은 마력은 물론이고 그나마 남아 있던 잔여마력까지 동이 났다.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용호는 이를 악물고 생명력을 쥐어짜냈다. 오크 리더에게서 흡수한 정수가 없었다면 그나마도 충당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리고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카타리나의 하이브리드 진화가 끝났다. 용호와 카타리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의 동시에 제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서로에게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카타리나의 몸이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용호는 지친 가운데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다. 던전의 영혼이 머릿속에 대고 무어라 말을 쏟아냈지만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상체를 움직여보았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이미 의식을 잃었는지 힘없이 늘어져 있던 카타리나가 용호의 몸을 눌렀고, 그런 카타리나의 무게조차 감당할 힘이 없던 용호는 결국 뒤로 나자빠지고 말았다.
여전히 카타리나는 뜨거웠다. 용호도 더는 의식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마력과 체력의 소모가 너무 심했다.
[예속- 역- 엘-고스가- 올 - 니다!]
던전의 영혼이 다시 말했다. 용호는 띄엄띄엄 들린 말에 대답하는 대신 마지막으로 의식을 집중해 카타리나를 보았다.
바로 눈앞, 이전의 것보다 조금 더 크고 우람해진 카타리나의 뿔이 보였다.
어찌되었든 잘 된 거겠지.
용호는 결론을 내렸다. 그대로 눈을 감았고, 마음 편히 졸도했다.
&
마족이란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에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다.
뼈와 살을 비롯한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의 통화이기도 한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기에 마족은 마력에 자신을 남길 수 있었다. 의식이나 영혼의 일부는 물론이고 기억이나 권능의 일부까지도 가능했다.
검고 검은 어둠이었다. 빛 한 점 없는 완전한 어둠.
그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었다. 그저 막연히 걸었고,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다.
“나는 몰락하지 않겠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울렸다. 온통 어둠뿐이던 세상에 흐릿한 빛이 생겨났다. 빛은 작고 어린, 눈매가 다소 고약한 소녀의 형상을 이루었다.
빛이 이어졌다. 어둠 속에서 새로운 영상들이 피어났다.
잿빛 머리칼을 산발한 여인. 아름답지만 표독스런 눈빛의 그녀는 현실에 굴복하지 않았다. 굴욕을 씹어 삼키며 발버둥 쳤고, 마침내는 작은 성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갔다.
던전의 비활성화 구역들을 하나하나 활성화 하였다. 던전을 발전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한 자루 검으로 생각했다. 굴욕과 모욕, 온갖 시련 속에서 그녀는 무릎 꿇고 슬피 우는 대신 억척스럽게 싸워나갔다.
마몬 가는 본래 멸망했어야 했다. 그녀의 대에 그리되는 것이 순리였다. 그런데 그녀가 순리를 어그러트렸다. 멸망 대신 부활을 이끌어냈다.
금광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다른 사역마들 앞에서 환한 미소를 보였다.
재투성이 가주.
왜곡의 마왕 카이완.
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에서 이어지던 흐릿한 빛은 마지막 영상을 끝으로 사라졌다.
용호는 그 영상을 명확히 해석할 수 없었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위치를 알고 있었던 마몬 가의 투기장.
그곳에서 그녀는 돌아오지 못했고, 겨우 부활의 싹을 피우던 마몬 가는 다시금 멸망의 바람에 노출되었다.
빛이 사라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었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
머리가 아팠다. 정확히는 전날 술을 잔뜩 마신 것처럼 지끈거렸다.
“아.”
멍한 목소리를 내본 용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목이 말랐다. 엘리고스가 급히 만들어준 작고 아늑한 마왕의 침실이었다. 천장은 여느 방들과 다름이 없었지만 짚단을 깔아 만든 급조 침대에서 나는 향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용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을 자기 위함이 아니었다.
떠올려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잿빛 머리칼과 표독스런 눈빛만이 기억날 뿐이었다.
‘3대 전 가주.’
용호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왼손에 낀 카이완의 반지를 새삼스럽게 살펴보았다.
더 이상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물.”
다행히 침대 바로 옆에는 물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연달아 몇 모금이나 마시고 난 뒤에야 용호는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섰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지?”
[10시간 만에 깨어나셨습니다.]
던전의 영혼이 즉각 대답했다. 용호는 다시 묻는 대신 손가락을 놀려 던전 현황도를 허공에 펼쳤다.
엘리고스는 고블린들과 함께 작업 중이었고, 카타리나는 용호 자신과 마찬가지고 자기 침실에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 같았다.
[예속 사역마 카타리나는 현재 건강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호의 의중을 읽기라도 했는지 던전의 영혼이 속삭였다. 용호는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느낌을 전달한 뒤 던전의 영혼과의 연결을 끊었다. 10시간이나 잔 보람이 있는지 몸 안에 마력이 충만했다.
‘늘었어.’
마력이 강해졌다. 오크 리더의 정수를 취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카타리나가 강해졌다. 그 영향이 용호 자신에게도 미친 것이었다.
가주가 강해지면 던전이 강해진다.
던전이 성장하면 가주 역시 성장한다.
예속 사역마는 던전에 속한 존재들이었다. 그 몸도 마음도 영혼도 모두 던전과 가주에게 예속된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던전과 같았다.
가주가 강해지면 예속 사역마 역시 강해진다.
예속 사역마가 강해지면 가주 역시 강해진다.
던전과 가주의 관계만큼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용호는 마른 침을 삼켰다. 카타리나의 진화 결과를 명확히 확인하지 못했다.
얼마나 강해졌을까.
어떤 승급 루트가 개방되었을까.
용호는 더 기다리지 않았다. 바로 침실을 나섰다. 마왕의 방을 가로질러 카타리나의 침실로 향했다.
“카타리나, 들어간다.”
대답은 당연히 돌아오지 않았다. 용호는 아주 잠깐 망설인 뒤 침실 문을 열었다. 용호의 침실마냥 카타리나의 침실도 작았고, 문을 열자마자 짚단 침대 위에 망토를 덮고 누워 있는 카타리나가 보였다.
용호는 침실에 들어서는 대신 진화의 권능으로 카타리나를 살펴보았다.
[이름 : 카타리나 (여)]
[종족/직위 : 혼성마 (서큐버스 + 다크 엘프)]
[분류 : 마인 (중급)]
[속성]
[바람 1레벨 / 어둠 1레벨]
[주요 종족치 : 매력 / 마력 / 민첩성 / 기량]
[진화 숙련치 : 0/100]
[매력 특화 1레벨 | ★★★☆ (3.5)]
[민첩 특화 3레벨 | ★★★★ (4)]
[마력 특화 1레벨 | ★★★☆ (3.5)]
[기량 특화 2레벨 | ★★★☆ (3.5)]
[속성 강화 0레벨 | ★★★☆ (3.5)]
[현재 승급 가능 종족/직위]
[쉐도우 엘프] / [다크 서큐버스] / [쉐도우 러너]
많은 것들이 변했다.
카타리나가 서큐버스와 다크 엘프의 혼혈임을 알려주던 단어들이 대거 사라졌다.
속성 역시 레벨이 생긴 것과 더불어 간결해졌고, 진화 가능 루트에서 하이브리드가 아예 사라졌다.
‘혼성마.’
카타리나는 여전히 승급을 통해 엘프나 서큐버스의 길을 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엘프도 서큐버스도 아닌 제 3의 종족인 상태였다. 아마 새로 개방된 ‘쉐도우 러너’라는 승급이 그것을 의미할 터였다.
용호는 급히 카타리나에게 다가가 망토를 벗겨냈다. 쓰러지기 직전에 입었던 전투복 그대로였고, 딱히 눈에 띄는 신체의 변화는 없었다.
‘몸…매가 조금 더 좋아졌나?’
저도 모르게 카타리나의 특정 부위를 빤히 바라보던 용호는 다시 망토를 덮어준 뒤 카타리나의 머리 쪽을 보았다. 확실히 뿔이 커졌다. 예전 것보다 조금 더 길고 두꺼웠다.
‘진화시키지 않은 서큐버스 쪽 능력들도 레벨이 올랐어.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만… 결과가 좋아.’
안도의 숨을 토한 용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카타리나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다시 일어서서 카타리나의 침실을 나섰다.
“깨어나시길 기다렸습니다, 가주님.”
문을 나서자마자 엘리고스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 했던 용호는 간신히 스스로를 억누른 뒤 침실 문을 닫았다. 아마 던전의 영혼이 엘리고스에게 용호 자신이 깨어났음을 알렸을 터였다.
카타리나에 대한 고민은 해결되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다음 고민을 해결할 차례였다.
“엘리고스, 사역마들을 집합시켜라. 모두에게 전파할 것이 있다.”
며칠 내로 가해질 것이 거의 분명한 가주 ‘포라스’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엘리고스는 용호가 함정 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용호는 그러지 않았다. 엘리고스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가능한 빠른 시간 내에 금광 탈환을 시도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자원만으로는 충분한 방비를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박수를 둔다. 금광을 탈환해서 얻은 자금으로 돌파구를 찾아낸다.
엘리고스는 멍한 얼굴로 용호를 보았다. 용호는 그런 엘리고스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사역마들을 모아 오겠습니다.”
엄숙히 답한 엘리고스가 마왕의 방을 나섰다. 다시 혼자가 된 용호는 왼손에 낀 3대 전 가주- 카이완의 반지를 보았다.
‘쉽게 포기하지 않아.’
용호는 마몬 가의 가주임을 증명하는 자리인 옥좌에 앉았다. 사역마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
< 제 9장 - 카이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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