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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7화 (17/227)
  • < 제 5장 #2 >

    &

    “운이 좋았어.”

    용호는 그렇게 자평했다.

    첫 전투로부터 만 하루가 지난 오후.

    코볼트들의 항복을 받아낸 직후 졸도한 용호는 필사적인 수면 끝에 겨우 깨어날 수 있었다.몸을 막 굴린 대가인지 누운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전투 직전에 아몬을 얻지 못했다면? 이길 수 없었다.

    스켈레톤이 끼어드는 것이 조금만 늦었다면? 역시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미쳤지.’

    그 망치에 달려들 생각을 하다니.

    용호 자신에게 이렇게 호전적인 면이 있었던 걸까? 혹시라도 마왕으로 각성하면서 생긴 변화는 아닐까?

    하지만 어찌되었든 이겼다. 살아남았다.

    실감하니 생각의 갈래가 절로 넓어졌다.

    일단 마창 아몬. 여전히 검붉은 쇠꼬챙이 같은 모양새였지만 분명히 용호 자신의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가주님!”

    “오오, 깨어나셨습니까.”

    깨어난 직후에는 안 보였는데 어떻게 알고 달려왔는지 지금은 눈앞에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표정이 비슷했다.

    어미 새를 바라보는 아기 새 같다고 해야 할까?

    ‘카타리나는 귀엽지만 엘리고스는 좀.’

    저도 모르게 떠올린 망상에 용호가 키득 웃자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다시 그 웃음에 반응했다. 아무래도 용호의 상태가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용호가 카타리나에게 손을 뻗었다.

    “어제는 수고했어. 그리고 미안하지만 물 좀 가져다주지 않겠어?”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재빨린 답한 카타리나가 물 주전자와 잔을 가지러 떠났다. 용호는 엘리고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얼마나 뻗어 있었지?”

    “만 하루 동안 누워 계셨습니다.”

    “어쩐지 허리가 아프더라.”

    약간은 허탈하게 답한 용호는 어깨를 조금 늘어트렸다. 어느새 돌아온 카타리나가 용호에게 물 잔을 내밀었다.

    “가주님, 여기.”

    “그래.”

    식도를 통해 물을 넘기고 나니 이제야 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숨에 잔을 비운 용호는 약간의 여운을 즐기듯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뜬 뒤 물었다.

    “전투 후 뒷정리는 어떻게 되었지?”

    “살아남은 코볼트 네 마리는 감옥에 가뒀습니다. 잔챙이 마족의 시체는 현재 빈 방에 보관 중이고요. 아, 그리고 잔챙이 놈이 가지고 있던 장비들도 챙겨두었습니다.”

    엘리고스의 대답에 용호가 눈을 번쩍 떴다.

    “보관 중이라고? 시체를?”

    아니 시체를 대체 왜 보관한단 말인가. 설마 마계에서는 시체를 가만히 놔두면 좀비나 스켈레톤으로라도 변한단 말인가?

    ‘어, 그럼 공짜 병력이니까 좋은… 건가?’

    용호의 엉뚱한 망상을 엘리고스가 끊었다.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이었다.

    “정수를 채취했다고는 하나 아직 그 육체에는 마력이 꽤 남아 있습니다. 현재 던전에는 시설이 없습니다만… 나중에 ‘마력로’를 건설하시면 시체에서 마력을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엄격하고 진지한 엘리고스의 태도였다. 그야말로 적의 마지막 털 한 올까지 벗겨 먹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어… 그래.”

    하지만 시체에서 마력을 뽑아낸다니.

    꺼림칙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용호는 참기로 했다. 그런 것을 따질 정도로 던전 상황이 풍족한 것도 아니었고, 어쩌면 마계에선 이런 것이 ‘당연한 일’일 지도 몰랐다.

    더욱이 아직 엘리고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좀 많이 고급 시설이긴 합니다만… 나중에 따로 마법 시설을 건설하시면 적들의 시체를 좀비나 스켈레톤으로 재활용하실 수도 있으실 겁니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용호는 잠시 적들의 시체로 아군 병력을 늘리는 일을 인도주의적 관점과, 자신의 인간성 유지 측면에서 바라보다가 때려 쳤다.

    어차피 아직은 지을 수 없는 시설이었다. 나중 가서 고민할 문제였다.

    “그 마족한테 챙겼다는 장비는?”

    “망토와 망치가 제법 질이 좋습니다. 망토에는 체온 유지 마법이 걸려 있고, 망치에는 간단한 강화 마법이 걸려 있어서 무척이나 단단합니다.”

    “그 외에는?”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챙겨두었습니다. 잘하면 2성 사역마를 하나 정도 더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엘리고스가 약간은 음흉하게 웃었다.

    마찬가지로 음흉하게 웃어준 용호가 다시 물었다.

    “이쪽 피해는?”

    “사역마들은 모두 무사합니다. 이렇게 깔끔하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가주님 덕분입니다.”

    [이번 전투로 사역마들의 충성심과 존경심이 무척이나 높아졌습니다.]

    엘리고스의 말이 끝나자마자 던전의 영혼이 살갑게 말했다. 사역마들 뿐만 아니라 던전의 영혼의 호감도 역시 이번 전투로 무척이나 높아진 것 같았다.

    ‘뭐, 얼굴만 봐도 알겠지만.’

    이제는 쿨 한 척을 완전히 포기한 것 같은 카타리나와 언제나처럼 그렁그렁한 엘리고스를 번갈아 본 용호는 새삼 심호흡을 한 뒤 눈을 감았다. 마력을 순환시켜 보았다.

    본래 가지고 있던 마력이 워낙 적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마력이 눈에 띄게 증가되었다. 체내에 흐르는 마력량이 거의 두 배로 커진 기분이었다.

    ‘이것이 정수 흡수의 결과.’

    증가한 힘에 희열을 느끼던 용호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이, 어쩌면 일부로 무시하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마족이라고는 하나 사람을 죽였다. 그런데 이렇다 할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살기 위해서였으니까. 날 죽이려고 했던 놈이니까.’

    용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마음을 정리했다. 무의미한 살육자만 되지 않으면 되는 일이었다. 일단은 그 정도 선을 견지하기로 했다.

    마력 순환을 끝마친 용호는 눈을 떴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입을 꾹 다문 채 용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무래도 집중할 수 있도록 침묵을 고수한 모양이었다.

    용호는 이번에도 행동으로 뜻을 보였다. 용호의 두 눈에서 녹색 귀화가 피어올랐다.

    [이름 : 천용호 (남)]

    [종족 : 반인반마 - 마왕]

    [주속성 : 불꽃 / 어둠]

    [진화 숙련치 : 50/100]

    [힘 특화 0레벨 | ★☆ (1.5)]

    [체력 특화 0레벨 | ★★ (2)]

    [마력 특화 0레벨 | ★★ (2)]

    [매력 특화 0레벨 | ★☆ (1.5)]

    [민첩 특화 0레벨 | ★ (1)]

    [기량 특화 0레벨 | ★★ (2)]

    [7대 죄악 | 탐욕]

    용호 자신의 진화 루트의 별 개수가 아주 약간이지만 상향되었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던 7대 죄악 역시 탐욕이란 이름이 드러났다.

    ‘정수 흡수의 효과인가?’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각 특화에 붙어 있는 ‘레벨’ 역시 그러했다.

    용호는 이번엔 카타리나를 보았다.

    [이름 : 카타리나 (여)]

    [종족 : 하프 서큐버스 / 하프 다크 엘프]

    [주속성 : 바람 / 어둠 | 부가속성 : 번개 / 물 / 대지]

    [주요 종족치 : 서큐버스 - 매력 / 마력 | 다크 엘프 - 민첩성 / 기량]

    [진화 숙련치 : 25/100]

    [서큐버스 : 매력 특화 0레벨 | ★★★ (3)]

    [다크 엘프 : 민첩 특화 2레벨 | ★★★☆ (3.5)]

    [하이브리드 0레벨 | ★★★☆ (3.5)]

    [서큐버스 : 마력 특화 0레벨 | ★★★☆ (3.5)]

    [다크 엘프 : 기량 특화 1레벨 | ★★★ (3)]

    용호 자신보다 변한 것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민첩 특화에 ‘2레벨’이란 수치가 붙은 것이었다.

    ‘진화를 한 번만 시켰으니까… 본래 1레벨이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기량에 1레벨이 붙어 있는 것도 이해가 갔다. 카타리나는 빠른 몸놀림을 활용한 단검 전투가 특기였으니 말이다.

    ‘별의 개수도 조금씩 달라졌어. 민첩을 특화시킨 만큼 민첩을 비롯한 다른 능력들의 진화 포텐셜이 조금씩 변화한 건가?’

    나름 납득이 가는 변화였기에 고개를 끄덕인 용호는 시선을 살짝 위로 했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빛의 상자 두 개에 쓴웃음을 지었다.

    [쉐도우 엘프]

    [서큐버스]

    하프 다크 엘프이자 하프 서큐버스인 카타리나가 선택할 수 있는 ‘승급’ 루트.

    섣불리 결정할 수 없었다. 어차피 다음 진화 후에나 선택할 수 있는 승급이긴 했지만 그 전에 각 승급 종족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야 할 터였다.

    진화의 권능을 해제한 용호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은 뒤 다시 엘리고스를 마주했다.

    “내가 강해지면 그에 비례해서 던전의 심장 역시 강해진다고 했었지?”

    “네,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나 카타리나 같은 예속 사역마들 역시 가주님의 성장에 영향을 받습니다.”

    “과연.”

    가주와 예속 사역마의 관계는 일반적인 주종관계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고 밀접한 관계였다. 가주가 머리라면 예속 사역마는 그 머리의 지휘를 받는 손과 발이었다.

    “코볼트들에게 뭔가 알아낸 건 없고?”

    용호의 물음에 기다렸다는 듯이 엘리고스가 답했다.

    “겁이 많고 비겁한 놈들이라 자기들 우두머리가 죽자마자 이것저것 털어놓기는 했지만 온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감옥 다음으로 고문실을 건설하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고문실?”

    “예, 사역마들을 벌주기 위한 용도이기도 합니다만 포로들을 심문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감옥 바로 옆에 건설하면 효과가 무척이나 좋지요.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고문 받는 모습을 생생히 지켜볼 수 있으니까요.”

    참으로 멋지지 않느냐는 듯 엘리고스가 눈을 빛냈다.

    지난 번 감옥 이야기 할 때도 그랬지만 어쩐지 이쪽 화제를 꺼낼 때마다 묘하게 활기가 도는 엘리고스였다.

    용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엘리고스에게 엉엉 울면서 고문 받고 있는 카타리나를 떠올려 보았다.

    ‘아니, 이건 너무 위험하고.’

    고문 받는 대상을 카타리나에서 스켈레톤으로 바꾸니 정서적으로 훨씬 더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감옥과 고문실.

    끔찍한 시설들이었지만 감옥은 이미 지었고, 앞으로도 전투가 계속된다면 고문실 역시 필요해질 터였다.

    용호는 건설에 대한 결정을 일단 잠시 미룬 뒤 이번에는 카타리나에게 물었다.

    “이번에 쳐들어 온 녀석, 솔직히 말해서 어느 정도 수준이지?”

    “가주님의 승리를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카타리나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렸다. 사실상의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강한 녀석은 아니군. 하긴 그러니까 그렇게 서둘렀겠지.”

    싸움에는 제법 익숙한 놈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포식자 같은 눈빛이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마몬 가의 던전을 노리는 잔챙이들 가운데서는 꽤 약한 놈일 터였다.

    마몬 가 던전의 방어막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며 치킨 레이스를 하는 잔챙이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공격에 나섰으니 말이다.

    “이제부터 시작될 잔챙이 러쉬의 선봉인 셈인가.”

    작게 중얼거린 용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전투 직후 졸도했다가 이제 막 깨어난 셈이었지만 시간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앞으로 있을 적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비할 지를 결정해야만 했다.

    ‘크게 보면 결국 두 가지 가운데 하나겠군.’

    하나. 사역마들을 진화시킨다.

    둘. 사역마들의 진화는 잠시 미뤄두고 그 마력으로 던전 시설을 보강한다.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는 선택이었다.

    사역마들을 진화시키면 병력의 양질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직선으로 달리기만 해도 돌파가 가능한 지금의 던전 구조는 너무나 불안했다.

    던전 시설을 보강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좋았다. 당장의 전력을 끌어올릴 순 없었지만, 생각해보면 애당초 사역마들을 한 번에 여러 단계 진화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에는 두 가지 모두 해야만 할 일.

    하지만 지금은 우선순위를 결정해야만 했다.

    용호는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를 번갈아 보았다. 짧지만 깊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제 5장 - 던전 디펜스 끝, 제 6장 - 가주의 무기고로 이어집니다.

    < 제 5장 #2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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