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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6화 (16/227)
  • < 제 5장 - 던전 디펜스 >

    제 5장 - 던전 디펜스

    차오른 숨을 가라앉힐 새도 없었다.

    용호와 카타리나는 땀투성이인 상태로 숨을 헐떡이며 달렸다. 텅 빈 마왕의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빈 방이었다.

    하지만 던전의 영혼을 통해 이미 던전 내부를 살펴본 용호는 당황하는 대신 바로 다음 방문을 열어젖혔다.

    “가주님!”

    자원창고와 이제 막 건설을 진행 중인 감옥과 맞닿아 있는 방.

    마지막 함정 방과 문을 맞대고 있는 방 안에는 엘리고스를 비롯한 사역마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용호는 엘리고스에게 대답하는 대신 바쁘게 눈동자를 굴려 사역마들과 방의 현황을 확인했다.

    고블린들은 빗장 걸린 문 앞에 되는 대로 무거운 것들을 쌓고 있었고, 트리엔트는 문 정면에 버티고 서서 덩굴들을 늘어트렸다. 스켈레톤은 멍한 얼굴로 - 사실 해골인 터라 표정이란 것 자체가 없었지만 - 구석에서 흐느적거렸다.

    “어디 계셨습니까?! 더욱이 이렇게 땀투성이시라니…….”

    말꼬리를 흐리던 엘리고스는 용호뿐만 아니라 카타리나 역시 땀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엘리고스의 눈매가 순간 가늘어지자 용호는 손을 크게 휘두르며 말을 쏟아냈다.

    “지금 뭘 상상하든 무조건 틀렸어. 아무튼 잘 들어. 지금 저 문 너머에는 코볼트 여덟 마리와 엄청 큰 망치로 무장한 정체불명의 마족이 있어. 본래 던전에 침입한 놈들은 더 많았던 것 같지만 함정에 몇 놈이 당한 모양이야. 혹시 뭔가 아는 것 있어?”

    던전의 영혼을 통해 확인한 정보들이었다. 이 와중에도 빗장 걸린 문이 크게 뒤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반사적으로 문 쪽을 돌아본 엘리고스가 빠르게 답했다.

    “근방의 떠돌이 마족이 분명합니다. 던전을 소유한 가주라면 아무리 마몬 가가 망했다고 착각하고 있더라도 겨우 저 정도 규모의 사역마들을 이끌고 던전을 공격할 리 없습니다.”

    엘리고스가 말했던 ‘때를 기다리던 잔챙이들’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아마도 던전 내부에 있는 건 카타리나와 엘리고스 뿐이라 착각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놈들은 이미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함정 방을 세 개나 거쳤다. 용호는 눈을 감았다.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놈은 여전히 이 던전에 ‘가주가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아.”

    누구에게라기보다는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은 말이었다.

    다시 한 번 문이 크게 흔들렸다. 죽창으로 무장한 고블린들이 흠칫흠칫 놀라며 문을 주시했다.

    엘리고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가주님. 지금 손에 들고 계신 것은…….”

    “아몬이에요! 홍련의 마창 아몬!”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카타리나가 흥분해서 외쳤다. 아몬이란 말에 엘리고스 역시 흥분했다.

    “헉! 설마 한 번 휘두르면 천지가 불타오르고 바다가 증발한다는 그 홍련의 마창 아몬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진짜 유명한 무기인 모양이었다. 용호의 얼굴에 수긍의 빛이 어리자 엘리고스는 문자 그대로 환희에 젖었다. 그대로 놔두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 것 같은 얼굴이었기에 용호는 다시 한 번 빠르게 말했다.

    “아몬이 맞지만 지금은 제대로 쓸 수 없어. 일단은 없는 셈 쳐야 해.”

    설사 제대로 쓸 수 있다 해도 마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문이 다시 덜컹거렸다. 빗장이 반쯤은 부서진 것만 같았다.

    “놈들은 던전의 현재 전력을 몰라. 그러니 방심하고 있겠지. 우리는 그 점을 이용한다.”

    목소리가 다급하고 빨랐다. 절로 긴장한 엘리고스가 되물었다.

    “뭔가 작전이라도 있으십니까?”

    용호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었다. 박살나기 직전인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혼란을 일으키고 대가리를 딴다.”

    말을 마친 용호는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

    마른 침을 삼켰다.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힘들었다.

    이야기는 몇 번이나 들었다.

    던전을 노리는 이들. 앞으로 대적하게 될 다른 마족들.

    하지만 처음이었다.

    저 문 너머에 용호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다. 승패가 결정되면 이기든 지든 다음을 기약하면 되는 게임이 아니었다.

    어느 하나는 죽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

    쾅!

    굉음과 동시에 빗장이 박살났다. 마치 폭발하듯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코볼트들이 돌진해왔다. 고블린보다 약간 더 큰 체구에 개머리를 가진 괴물들이었다. 손에는 저마다 조잡한 칼이나 창을 꼬나쥐고 있었다.

    용호는 놈들을 보았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쏟아지듯 질주하는 그것들을 보며 소리쳤다.

    “당겨!”

    고블린 존과 론이 반응했다.

    문을 중심으로 양쪽 벽에 서있던 두 고블린은 동시에 손에 쥐고 있던 밧줄을 당겼고, 질주하던 코볼트들은 갑자기 솟아오른 밧줄에 걸려 나자빠졌다. 하지만 혼란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코볼트들이 밧줄을 보지 못하고 나자빠진 것은 흥분해서 돌진한 것 때문만이 아니었다.

    “구오오오오오오-!”

    문의 정면. 방 한가운데 버티고 선 트리엔트가 낮고도 중후한 고함을 내지르며 덩굴을 휘둘렀다. 나자빠진 코볼트들의 몸통이나 다리를 붙잡아 문 너머로 집어던졌다.

    남은 고블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나자빠진 코볼트들에게 죽창을 찔러 넣으며 괴성을 토했다.

    문이 열리고 겨우 몇 초. 흐름이 좋았다. 코볼트들이 넘어지고 날아가는 와중에 용호는 정면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혼란에 빠진 코볼트들 너머에 서 있을 자를 찾았다.

    녹색 망토를 두른 거한이었다.

    구릿빛 투박한 얼굴에는 용호가 기대한 당황 대신 노여움이 어려 있었다.

    트리엔트가 다시 코볼트 하나를 집어던졌다. 코볼트들과 거한 너머 ‘배경’에 새로 활성화시킨 방을 통해 우회 기동한 카타리나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거한이 지면을 박찼다.

    물러서는 대신 돌진했다. 코볼트들 사이를 가로질러 용호에게 똑바로 달려들었다.

    예상 밖의 상황에 엘리고스가 거친 목소리를 토했다. 카타리나가 거한을 따라잡기 위해 코볼트들 사이로 몸을 던졌다.

    용호는 거한을 보았다. 거한이 손에 쥔 거대한 전투 망치를 거칠게 휘둘렀다. 트리엔트가 내뻗은 덩굴이 망치에 맞아 폭발하듯 끊어졌다. 거한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용호와 거한과의 거리는 기껏해야 몇 미터.

    거한이 파고들었다. 머리를 바싹 낮추고 트리엔트의 옆을 지났다. 머리 위로 뻗어오는 덩굴을 다시 한 번 피한 그는 맹수처럼 뛰어올라 용호의 정수리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쾅!

    수직으로 내리꽂힌 망치가 땅을 찍었다. 무지막지한 박력이었다. 용호가 일격을 피한 것도, 피한 직후 긴장과 두려움에 얼어붙지 않은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가주님!”

    카타리나가 소리쳤다. 트리엔트가 굼뜬 몸을 반전시켰다. 엘리고스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거한이 전투 망치를 회수하며 용케 일격을 피한 용호를 노려보았다.

    마치 개구리를 집어삼키려는 뱀과 같았다. 포식자가 피식자를 바라보는 눈이었다.

    거한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용호와의 거리를 좁히며 망치를 휘둘렀다.

    질식할 것만 같았다. 망치가 닿기도 전에 압도되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용호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물러서는 대신 고함을 지르며 아몬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머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본능을 좇았다. 쏟아지는 망치의 궤적을 피하는 대신 그 안으로 파고들고자 몸을 날렸다.

    무모했다. 엘리고스가 비명을 질렀다. 카타리나가 필사적으로 지면을 박찼다.

    순간 용호와 거한의 시선이 교차했다.

    거한이 웃었다. 용호가 이를 악물었다.

    ‘당겨!’

    찰나였다. 그랬기에 소리치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했고, 그 믿음은 보답받았다. 용호의 곁에 마치 길가의 돌멩이 마냥 쓰러져있던 스켈레톤이 팔을 쑥 뻗어 거한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아주 잠깐이었다. 거한의 움직임을 고작해야 1초 남짓 늦췄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용호의 왼쪽 어깨가 거한의 상체를 들이박았다. 동시에 마창 아몬이 거한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우오오오오오!”

    용호가 포효하며 마력을 쥐어짜냈다. 생명력 그 자체를 불태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어난 마력 모두가 한 점에 집중되었다.

    이제 막 손에 넣은 무기의 사용법 따위는 몰랐다. 용호는 그저 소망했다. 마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무식할 정도의 요구에 아몬이 응답했다.

    녹색의 불꽃이 폭발하듯 피어올랐다. 진홍의 창에서부터 일어난 힘이 거한을 내부에서부터 집어삼켰다.

    거한이 급히 마력을 끌어 모았지만 소용없었다. 아몬의 불길이 모든 것을 불살랐다. 거한의 마력은 물론이고 그 내장과 영혼까지 게걸스레 집어삼켰다.

    “크아아악!”

    내장이 산채로 불타는 고통에 거한이 비명을 질렀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되듯 마구잡이로 휘두른 두 팔로 용호를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스켈레톤이 다시 한 번 거한의 팔을 붙들었다. 용호가 다시 한 번 포효하며 거한의 복부에 꽂힌 아몬을 비틀었다. 아몬으로부터 새로운 불길이 치솟았다.

    “크어어…….”

    거한이 더 버티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거한의 내부를 먹어치운 진녹의 불꽃이 이제는 거한의 피부 밖으로까지 피어올랐다.

    용호가 다시 한 번 아몬을 비틀었다. 이번엔 아몬을 놈에게서 빼내기 위함이었다.

    육신은 물론이고 영혼까지 불태울 진녹의 불꽃 덕분인지 피는 조금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용호는 아몬을 거칠게 뽑아냄과 동시에 왼팔을 휘둘렀다. 비틀거리는 놈을 쓰러트리고 거친 숨을 토했다. 정면을 향해 소리쳤다.

    “카타리나!”

    대답은 행동으로 돌아왔다. 전투 시작 직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그녀는 바닥에 나자빠진 거한의 목을 단검으로 갈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놈의 심장이 있을 곳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문이 열리고 고작해야 일분에서 이분 남짓.

    피아를 가리지 않고 방안에 있던 모두가 용호와 카타리나를 보았다.

    용호는 불꽃이 사그라든 아몬을 늘어트린 채 왼손을 앞으로 뻗었다. 이번에도 본능에 의한 행동이었다.

    죽은 거한의 가슴 위로 마력이 집중되었다. 고블린들과 코볼트들은 그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는 소리죽여 감탄했다.

    탁한 빛을 내는 검붉은 마력의 덩어리.

    마족의 정수.

    그것이 가슴 위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천천히 부유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날아올라 용호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정수의 흡수. 마력을 탐하는 것. 마계가 약육강식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

    용호는 마력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주머니가 넓어지듯 용호 자신의 마력 자체가 한 단계 성장했다.

    더욱이 성장한 것은 용호만이 아니었다.

    [던전의 일일 마력 생산량이 30에서 50으로 증가합니다.]

    [최대 마력 저장량 역시 300에서 400으로 증가했어요!]

    가주가 강해지면 던전 역시 강해진다.

    던전이 성장하면 가주 역시 성장한다.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아몬을 얻는 과정에서 얻은 부상도 여전했다. 하지만 짜릿한 쾌감이 용호는 등줄기를 꿰뚫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극상의 쾌감이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 하지만 여운을 누리기에는 충분한 몇 초.

    마침내 정수의 마력을 모두 흡수한 용호가 숨을 길게 토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여전히 넋 나간 표정을 한 코볼트들이 보였다. 한 쪽 무릎을 꿇은 채 밝은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타리나가 보였다. 멍청한 얼굴로 흐느적거리는 스켈레톤 또한 놓치지 않았다.

    ‘내가 넌 꼭 데스 나이트까지 진화시켜준다.’

    스켈레톤에게 마음속으로 약속한 용호는 짐짓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오글거렸지만 지친 머리로는 이 이상으로 좋은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계속할까?”

    코볼트들은 용호의 생각보다 머리가 좋았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향해 무기를 집어던졌다.

    &

    < 제 5장 - 던전 디펜스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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