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5화 (15/227)
  • < 제 4장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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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척이나 화려한 제단이었다. 어두워서 명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었지만 불꽃을 비롯한 각종 문양이 제단 표면에 양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제단 한 가운데 꽂혀 있는 창.

    붉은 색이었다. 창대와 창 사이에 구분이 없는 일체화된 금속 창이었다.

    용호는 홀린 듯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 움직임에 퍼뜩 놀란 카타리나가 소리쳤다.

    “가주님!”

    “잡았다.”

    말릴 새도 없이 용호가 창을 붙잡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대로 뽑아들었다.

    카타리나는 숨을 멈췄다. 벽에서 화살이 쏟아진다면 몸을 날려 막을 생각이었다. 불꽃이 용호를 뒤덮는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몸을 날려 방패가 될 터였다. 이도저도 안 된다면 적어도 함께 죽는 길을 택할 각오였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뽑고 나서야 자신이 창을 뽑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용호는 한 발 늦게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손에 든 창을 던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창과 제단을 번갈아 보던 용호는 미묘한 얼굴로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카타리나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마몬의 사역마!”

    날카로움 외침에 용호는 하마터면 창을 놓칠 뻔 했다. 금방이라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헐떡이는 카타리나 대신 손에 든 창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역마? 창인데?”

    “아, 아닙니다. 창날과 창대가 일체화 된 선홍빛 창… 분명 ‘홍련의 마창 아몬’이 분명합니다.”

    카타리나는 용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섰다. 긴장된 눈으로 용호가 손에 든 붉은 창을 주시하며 말했다.

    “홍련의 마창 아몬은 마몬님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무구입니다. 마창 자체가 한 명의 마족… 그것도 굉장한 고위 마족입니다.”

    카타리나는 진지했다. 용호는 다시 손에 쥔 창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창 형태의 마족이라는 건가?”

    “예. 그, 그리고…….”

    “그리고?”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카타리나는 거기서 잠시 말을 끊었다. 용호의 손에 들린 아몬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마몬님 외에 다른 이가 아몬에 손을 대면 지옥의 겁화가… 가주님!”

    카타리나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이었다. 돌연 창끝에서 일어난 붉고 거대한 화마가 용호를 집어삼켰다.

    용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사방천지가 어느새 불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화마가 용호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를 집어삼킨 것 같았다.

    몸부림쳤다. 어디서 본 것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몇 초. 용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뜨겁지 않았다. 분명 몸이 불꽃에 뒤덮여 있는데도 아프지 않았다.

    용호는 몸부림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넘실거리는 불꽃 속에 자리한 용호의 팔과 다리는 제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고 주변이 모두 불타는 지금 카타리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용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카타리나를 찾지 못했다. 무지막지한 압박감에 몸이 얼어붙었다.

    바로 등 뒤. 용호 자신을 주시하는 자.

    거대한 눈이었다. 붉고 붉은 그것은 불타고 있었다. 지옥의 겁화 한 가운데 자리한 그것이 용호를 내려다 보았다.

    [어째서 불타지 않는 것이지?]

    머릿속에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굵고 거칠었고, 세상 전체를 짓누를 것만 같은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눈동자가 용호에게 다가왔다. 용호는 여전히 움직일 수 없었다. 거친 숨을 토하며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하였다. 눈동자는 그런 용호를 주시했다. 마치 시선으로 용호의 전신을 핥는 것만 같았다.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

    용호는 직감했다. 저 눈동자야말로 홍염의 마창 아몬이었다. 어쩌면 이 공간 자체가 아몬이 만들어낸 것일지 몰랐다.

    아몬이 용호를 관찰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웃었다. 눈동자가 웃는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용호는 그렇게 느꼈다. 머릿속에 남자의 광소가 울려 퍼졌다.

    [그런가. 그런 것인가. 7대 죄악의 힘을 품고 있는 것인가. 마침내, 마침내 ‘탐욕’의 힘을 이어받은 자가 나타난 것인가!]

    그것은 희열이었다. 열광이었다. 또한 동시에 지독하기 짝이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아직 애송이군. 너무 오래 잠든 탓에 내 인내심도 바닥이 난 모양이야.]

    남자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눈동자는 용호에게 조금 더 다가왔다. 붉고 거대한 눈동자가 용호의 시야 전체를 가득 채웠다.

    용호는 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숨을 이으며 목소리를 쥐어짜내고자 했다. 아몬은 다시 웃었다. 아까 전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웃음과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은 네게 맞춰주도록 하마, 애송이.]

    눈동자가 불꽃으로 화했다. 다시 한 번 용호를 집어삼켰다. 세상 전체와 함께 불타올랐다.

    “가주님!”

    “컥!”

    용호는 숨을 토했다. 동시에 눈을 떴고, 자신에게 다가오려는 카타리나를 보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아직 불타고 있었다. 홍련의 불꽃이 용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가주님!”

    카타리나가 다시 소리쳤다. 용호는 손을 앞으로 내뻗어 카타리나를 제지했다. 그리고 숨을 골랐다. 불꽃이 잦아들었다. 전신에서 일었던 불꽃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사그라들었다.

    “하아… 하… 하…….”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용호는 카타리나가 제자리에 멈춰 선 채 안절부절 못하는 것을 확인한 뒤 시선을 돌렸다. 오른손에 움켜쥐고 있는 창을 보았다.

    ‘변했어.’

    화려하기 짝이 없던 선홍빛 창이 아무런 모양 없는 투박한 금속 창으로 변했다. 색 역시 이전과 달리 검붉었고 길이도 짧아져 있었다.

    용호의 두 눈동자가 에메랄드빛으로 물들었다. 진화의 권능으로 창을 살펴보았다.

    [이름 : 아몬]

    [종족 : ???]

    [주속성 : 불꽃 / ???]

    [진화 숙련치 : 0/100]

    [??? 특화 | ★★★★★★ (6)]

    [??? 특화 | ★★★★★★ (6)]

    [??? 특화 | ★★★★★☆ (5.5)]

    물음표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없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했다.

    창 형태를 한 사역마 아몬. 과거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이자 마계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탐욕의 왕 마몬의 애창.

    “퇴화했군. 현재 내 수준에 맞춰줬다 이건가?”

    진화의 권능을 거두며 용호는 작게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쓴웃음이 지어졌다. 분함과 호승심, 말로 다 표현 못할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가슴 속에서 들끓었다.

    “가주…님?”

    앞에서 들려온 소심한 부름에 용호는 비로소 카타리나를 돌아보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거의 울기직전이 된 카타리나가 보였다. 잠시 어정쩡하게 선 그녀를 보다가 용호가 말했다.

    “이제 다가와도 돼. 그리고… 네 말마따나 아몬이 맞는 것 같아. 지금은 잠들어 버린 것 같지만.”

    용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급히 다가서려던 카타리나는 마지막 말에 얼어붙었다. 놀람과 감격이 뒤섞인 눈으로 용호의 손에 들린 아몬을 보았다.

    “역시! 역시 우리 가주님!”

    엄청나게 함축되었지만 대충 무슨 뜻으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랬기에 용호는 키득 웃으며 약간이지만 잰 척을 해보였다.

    비록 퇴화했다고는 하지만 ‘마몬의 사역마’ 가운데 하나가 스스로 용호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용호가 강해지면 다시 본래의 힘을 되찾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애당초 아몬 역시 그런 의도로 퇴화를 선택한 것 같았고 말이다.

    ‘그럼 역시 그 느낌은 이 창 때문이었나?’

    7대 죄악 가운데 하나인 ‘탐욕’의 부가효과.

    단순한 금전 운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어쩌면 아몬이 용호 자신을 부른 것일지도 몰랐다.

    ‘어찌되었든.’

    아몬을 손에 넣었다. 그러니 이제는 이 방을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할 때였다.

    용호는 다시 카타리나를 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아아, 가주님. 역시 우리 가주님. 아몬을 손에 넣으시다니. 세상에나. 그 지옥의 겁화를 이겨내셨어.”

    카타리나가 아니라 엘리고스를 보는 것 같았다. 무슨 약에 취한 사람처럼 흐물흐물 거리는데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감동의 눈물이 뚝뚝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카타리나.”

    “진짜 최고에요. 우리 가주님 만세. 마몬 가 만세. 우리 가주님 최고.”

    정말로 어지간히 감동한 모양이었다. 용호는 다시 한 번 카타리나를 불렀다.

    “카타리나.”

    제법 힘주어 부른 효과가 있었는지 카타리나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용호는 카타리나를 위해 명령했다.

    “냉정한 척 해봐.”

    그 명령에 카타리나는 더 큰 패닉에 빠졌지만 이내 어떻게든 차가워 보이는 표정을 해내는데 성공했다. ‘이, 이렇게요?’하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을 마주한 용호는 카타리나가 진정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1미터가 조금 넘을 것 같은 아몬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좋아. 이제 빠져나갈 방법을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용호가 딱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바닥과 벽, 천장이 동시에 뒤흔들렸다. 순간 비틀한 용호는 급히 자세를 낮추며 카타리나와 서로를 쳐다보았다.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천장에서 무언가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몬님을, 아니 아몬을 빼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카타리나가 불안한 얼굴로 말했고 용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진동이 점점 더 강해졌다. 조금 있으면 이 방 자체가 무너질 것 같았다.

    용호는 급한 김에 아몬을 다시 제단 위에 꽂아 보았지만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전점 더 거세져만 갔다.

    용호는 손전등으로 주변을 비췄다. 입구 같은 것이 하나 보이긴 했지만 단단히 봉해져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용호는 비어있는 손으로 카타리나의 손목을 낚아챈 뒤 처음 쓰러졌던 곳으로 달려갔다. 손전등으로 다시 자신과 카타리나가 떨어진 구멍을 보았다. 대충 2~3미터 사이로 보이는 구멍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파편의 크기가 조금씩 커졌다. 이제는 금방이라도 벽이 무너지거나 바닥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과연 지금 떠올린 방법이 가능할 것인가.

    용호는 재지 않았다. 카타리나의 팔을 잡아당겨 얼굴을 가까이 한 뒤 소리쳤다.

    “카타리나! 나 믿지?!”

    “믿습니다!”

    카타리나가 즉답했다. 위급한 와중에도 카타리나의 두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용호는 씩 웃었다. 한 차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자유로워진 두 손을 카타리나의 양 허벅지 위에 올렸다. 힘을 주어 붙잡았다.

    카타리나가 순간 움찔했다. 용호의 두 눈에 녹색의 귀화가 피어올랐다.

    진화의 권능.

    용호의 마력이 카타리나의 육신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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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이 무너짐과 동시에 벽과 바닥이 붕괴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카타리나가 지면을 박차 올랐다. 마치 비상하는 매와 같은 날렵한 몸놀림이었다.

    카타리나의 등 뒤에는 마력을 모두 소진해 온 몸을 축 늘어트린 용호가 업혀 있었다. 용호의 상의로 대충 만든 밧줄이 용호와 카타리나를 하나로 묶는 유일한 연결고리였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두 다리를 단단히 붙잡은 상태로 벽을 박찼다. 대각선으로 뛰어올라 반대쪽 벽을 박차 다시 한 번 도약했다.

    민첩 특화 진화.

    트리엔트와의 반복된 대련으로 카타리나의 진화 숙련치가 차 있었기에 가능했던 선택.

    도박이었다. 홀몸도 아니고 용호를 등에 업은 상태로 수십 미터나 되는 벽을 연달아 차오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용호는 카타리나에게 걸었다.

    카타리나는 멈추지 않았다. 마치 새매와 같이 움직였다. 진화 전의 그녀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중력을 거슬렀다. 벽을 차고 올랐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카타리나가 신음을 삼켰다. 연속된 동작으로 인해 다리와 발목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카타리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벽을 박찼다. 그리고 이번에는 반대쪽 벽을 차지 못했다. 힘이 부족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우오오!”

    그 순간을 용호가 파고들었다. 축 늘어져 있던 것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전력을 다해 아몬을 벽에 박아 넣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강화된 용호의 육신이라고는 하나 도약 도중에, 그것도 지친 상태로 아몬을 벽에 깊이 박아 넣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타리나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용호가 만들어낸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발을 놀렸다. 있는 힘을 다해 벽을 박차 도약했다.

    가주와 예속 사역마는 평범한 주종관계가 아니었다. 용호는 카타리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때맞춰 아몬을 뽑았다.

    “으아아!”

    카타리나가 소리쳤다. 허공에서 몸을 비튼 그녀는 마지막 힘을 모두 모아 반대쪽 벽을 박찼다.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닥’을 나뒹굴었다. 용호와 카타리나는 한데 얽혀 바닥을 굴렀고, 비밀통로 입구에 부딪히고 나서야 구르기를 멈추었다. 이번에도 카타리나가 밑이었고, 용호가 위였다.

    “하아, 하아.”

    “하악, 하…….”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숨만 쉬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었다.

    살았다. 탈출했다. 무사히 빠져나왔다!

    “카타리나.”

    용호가 축 늘어지며 카타리나를 불렀고, 카타리나는 무겁다고 끙끙 앓는 대신에 나지막하게나마 대답했다.

    둘 다 온 몸에 힘이 없었다. 잠시나마 이대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용호가 1층- ‘통제 범위’에 당도한 그 순간 던전의 영혼과 용호가 연결이 복구되었다. 가주의 부재 상황에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던전의 영혼은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던전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용호는 눈을 크게 떴다. 카타리나와 더불어 다급히 일어섰다.

    제 4장 - 던전의 심장 끝, 제 5장 - 던전 디펜스로 이어집니다.

    < 제 4장 #4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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