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메이커-13화 (13/227)
  • < 제 4장 #2 >

    &

    마왕의 방 옥좌 뒤에는 숨겨진 문이 하나 있었다. 옥좌 뒤에 떡하니 걸려 있는 낡은 휘장을 걷어내자 작고 튼튼한 문이 드러났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던전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하나의 살아 있는 사역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던전의 심장은 이름 그대로 생물의 심장 역할을 하는 기관이죠.”

    “피 대신 마력을 보내주는?”

    용호가 덧붙이자 엘리고스는 웃으며 응답했다.

    “맞습니다.”

    던전의 심장이 들어있는 방은 여느 복도 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네모나고, 어둡고, 딱딱했다.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방 한가운데 설치된 투박한 제단 위에 커다란 원형 구슬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머리보다 조금 더 큰 녹색 구슬. 던전의 영혼과 영혼이 이어져 있는 용호는 구슬을 보는 순간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하군.”

    저것이 던전의 심장이었다.

    [안녕하세요, 주인님.]

    때를 맞추듯 던전의 영혼이 말을 걸어왔다. 다른 곳도 아닌 던전의 심장 앞이니 홀로그램 같은 형식으로라도 던전의 영혼의 모습이 보일 줄 알았는데, 여전히 목소리만이 들렸다.

    용호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 던전의 영혼에게 물었다.

    “저 구슬이 네 본체인 거니?”

    [네, 주인님. 아직 작지만 곧 더 많이 커질 거랍니다.]

    용호는 구슬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에메랄드 빛 구슬 안에서는 마치 불꽃같은 빛 무더기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가만히 뒤에서 지켜보던 엘리고스가 입을 열었다.

    “던전을 성장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결국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력을 주는 것’.”

    용호는 엘리고스를 돌아보았다. 엘리고스가 계속 설명했다.

    “마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저마다의 마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뿔이 없는 최하급 사역마들 또한 그러하지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뿔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지고 있는 마력 역시 많습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마력의 덩어리를 ‘정수’라고 부릅니다.”

    용호는 예속 사역마인 엘리고스의 많은 것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 엘리고스의 표면에 드러난 감정상태, 영혼, 마력의 흐름.

    엘리고스의 전신에서 요동치는 마력의 흐름은 가슴 한복판에서 시작되고 또 종결되었다.

    “마족이 죽으면 마력의 덩어리인 정수는 마치 물이나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흩어집니다. 하지만 죽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면 그 정수를 통으로 회수할 수 있죠.”

    “그 정수를 저 던전의 심장에 주입한다는 건가?”

    엘리고스가 미소지었다.

    “그렇습니다. 역시 이해가 빠르시군요.”

    어떤 개념인지 대충 이해가 갔다. 게임으로 치자면 몬스터를 잡아 모은 경험치를 던전의 심장에 투자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보다 극단적이고 단순한 방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엘리고스는 말했고, 용호는 이번에도 이해했다.

    “던전의 심장에서도 정수를 뽑아낼 수 있군.”

    “맞습니다. 그것이 ‘던전 사냥’ 혹은 ‘던전 전투’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엘리고스는 몇 번이나 던전 역시 일종의 사역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마족에게서 정수를 채취할 수 있다면 던전의 심장에서도 정수를 채취할 수 있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옳았다.

    “던전의 심장에서 추출할 수 있는 정수의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그 던전이 크고 역사가 오래될수록 던전의 정수 역시 대단해지죠.”

    이번에도 논리적으로는 어긋남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호는 지금의 이야기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엘리고스에게 물었다.

    “혹시 가주가 살아 있을 때만 정수를 채취할 수 있나?”

    한 단계를 건너뛴 물음이었지만 엘리고스 역시 바로 알아들었다. 무척이나 기분 좋은 얼굴로 대답했다.

    “역시 영민하시군요. 우선 답변부터 해드리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주가 죽으면 던전의 영혼 역시 그 생을 마감합니다만, 그렇다고 던전의 심장 자체가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대로라면 조금 이상한데?”

    마몬 가의 전대 가주가 자결한 지 1년이 넘었다.

    가주가 죽은 던전의 심장에서도 정수를 채취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사실을 결합하면 한 가지 의문점이 발생했다.

    마몬 가의 던전은 어떻게 지금까지 무사할 수 있었을까?

    “전대 가주님이 돌아가시고 1년 동안 마몬 가의 던전이 무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엘리고스는 용호에게 조금 더 다가섰다. 공손한 손길로 던전의 심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던전의 심장에는 정수를 수호하는 일종의 보호막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 보호막을 힘으로 부수는 것은 꽤나 마력을 소비하는 일이죠. 하지만 이 보호막 역시 가주가 죽고 던전의 심장이 휴면기에 들어가면 차차 약해져 갑니다.”

    “보호막이 약해질 때까지 다른 가주들- 그러니까 이 근방의 잔챙이들이 기다렸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마몬 가의 던전이 지금은… 죄송합니다. 몰락했습니다만 그 역사만은 드넓은 마계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 테니까요. 던전의 정수를 수호하는 보호막은 던전의 역사에 비례해 강력해지니 이 근방 잔챙이들로서는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당연합니다.”

    대강 이해가 갔다. 더욱이 엘리고스와 카타리나도 두 눈 뜨고 던전의 심장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잔챙이가 아닌 이들은?”

    엘리고스의 눈썹이 팔八자를 그렸다.

    “보호막은 강력하지만 던전이 몰락한 지 오래라 얻을 수 있는 정수가 별로 없습니다.”

    “그치들 입장에서는 계륵이라 이거군.”

    잔챙이들에게는 군침도는 먹이이지만 방어막이 너무 강하다.

    강력한 가주들에게는 들이는 수고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정수가 너무 적다.

    현 상황은 대충 이해가 갔다. 용호는 앞으로의 일에 대해 물었다.

    “그 보호막이라는 게 약화되는 데 대충 시간이 얼마나 걸리지?”

    “던전의 보호막에 따라 다릅니다만, 보통 1년 정도 지나면 보호막의 힘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야기대로 잔챙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엘리고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얼굴만 봐도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잔챙이들끼리도 서로 경쟁을 할 거란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이 바로 놈들에게 마몬 가 던전의 심장을 약탈할 최고의 시기였다.

    “방비를 조속히 강화해야겠군.”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마몬 가의 가주보다는 동네 치킨집 사장님이 전도유망했다.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 용호는 불평을 터트리는 대신 해야 할 일들을 점검했다.

    “함정 세 개 다 이번에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강해놔. 아까 이야기한 차후 건설 가능한 시설과 함정들에 대한 보고서도 부탁해.”

    “알겠습니다, 가주님.”

    엘리고스가 시원하게 답한 뒤 예를 표했다. 용호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른 뒤 던전의 심장이 있는 방을 둘러보았다.

    어찌되었든 머지않은 미래에 적은 올 터였다.

    바뀌지 않을 미래를 놓고 불평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던전의 주인이 해야 할 일이었다.

    “좋아. 이제 노다지를 캐러 가볼까?”

    짐짓 기운차게 말한 용호는 던전의 심장이 자리한 방을 나섰다.

    마몬 가의 던전을 탐사할 시간이었다.

    &

    용호는 팔짱을 꼈다. 약간은 삐딱하게 서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고, 그대로 천천히 위로 다시 올렸다. 눈앞의 상대를 시선으로 훑은 뒤 물었다.

    “저기, 그 차림에 후드는 뭐야?”

    용호의 호위기사 카타리나.

    카타리나는 평소의 정장 차림이 아니었다. 몸에 딱 달라붙어 매끈한 각선미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검정색 가죽 바지를 입었고, 신발 역시 탄탄한 종아리를 감싸는 장화를 신었다.

    상체에는 수영복을 연상시키는 검정 가죽 옷 하나만 입었는데, 애당초 상의가 배꼽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시작한 터라 골반과 허리가 절반가량 드러났다. 양 어깨는 훤히 드러낸 채 어깨 바로 직전까지 올라오는 검정 가죽 토시를 양팔에 꼈고, 왼팔에는 한 손으로도 발사가 가능한 작은 손 쇠뇌를 부착했다.

    여기까지는 제법 조화로웠다. 게임에 나오는 섹시한 여도적과 흡사한 복장이었으니 말이다.

    문제는 머리에 뒤집어 쓴 검정색 후드였다.

    제대로 된 후드라면 어깨 위를 덮거나 아니면 뒤로 망토처럼 이어지기라도 할 터인데 그냥 딱 목과 머리, 얼굴만 가리는 형태였다.

    용호의 지적에 카타리나는 소심한 어조로 대답했다. 후드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귀가 축 늘어져 있을 것 같았다.

    “어… 이게 제 전투 복장입니다.”

    “그래. 뭐, 어울리긴 하니까.”

    실제로 보기에 예뻤고, 민첩성을 중시한 카타리나의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제법 타당한 복장 선택이기도 했다.

    ‘후드가 도적 이미지에 어울리기도 하고.’

    혼자서 납득한 용호는 손을 놀려 빛의 창을 허공에 형성했다. 던전의 영혼과 제법 친밀해진 이후 부릴 수 있게 된 재주였다.

    빛의 창에 던전 전도가 펼쳐졌다.

    “일단은 전대 가주나 전전대 가주들이 활성화 하지 않은 부분들을 파고들 생각이야.”

    용호가 던전 조감도 밖의 검은 부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카타리나가 다시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가주님.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카타리나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았다. 하지만 용호의 생각은 확고했다.

    “전대 가주들이 활성화 했던 곳이 확실히 더 안전하긴 하겠지. 하지만 거긴 이미 전대, 전전대, 아무튼 과거의 가주들이 손에 넣었던 곳이니까. 남아 있는 것도 별로 없지 않을까?”

    타당한 이야기였기에 카타리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용호는 그런 카타리나를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위험하다는 건 어떤 의미지?”

    단순히 함정 같은 것을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카타리나는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듯 어깨와 가슴을 피고 숨을 골랐다. 용호를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마몬 가의 던전은 굉장히 넓고 깊습니다. 전대 가주님들 가운데 그 어떤 분도 마몬 님의 시절처럼 던전을 완전 가동시키지 못하셨죠. 당장 전대, 전전대 가주님 두 분 모두 지하 2층에는 접근하지 못하셨고요.”

    “잠깐, 지하층이 있다고? 던전의 영혼이 보여준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는데?”

    용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빛의 창을 두 배 크기로 키웠다. 던전 전도를 아무리 돌려봐도 지하층은 보이지 않았다.

    카타리나는 용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아직 가주님의 힘이 던전 전체를 장악하실 정도가 아니라 그렇습니다. 던전의 영혼의 힘은 던전의 주인인 가주님의 힘에 비례하니까요.”

    “한 마디로 아직 던전 전체를 살펴 볼 힘이 없다는 거군.”

    카타리나는 대답 대신 어색한 얼굴로 웃었고, 용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것을 물었다.

    “지하층은 몇 층까지 있지?”

    “죄송합니다. 정확한 층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카타리나 네 탓은 아니니까. 그렇게 죄송해 할 것 없어. 그냥 아는 대로만 이야기 해주면 돼.”

    매번 이렇게 조심스러워하면 상대하는 입장에서도 피곤했다. 다행히 카타리나는 더 움츠러드는 대신 바로 응답했다.

    “저도 전대 호위 기사에게 들은 이야기라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5층 이상인 모양입니다. 전대 호위 기사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역 삼각형 구조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고요.”

    “흐음.”

    1층만 해도 이미 방이 100개는 들어갈 정도로 컸다. 그런데 여기에 지하층이 더 있다면 정말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던전이었다.

    “카타리나, 위험하다고 한 이유는 단순히 함정 때문이 아니지?”

    “예, 가주님. 함정만이 아닙니다.”

    카타리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무척이나 중요한 말을 꺼내려는지 잠시 눈까지 감고 숨을 골랐다. 쳐다보는 용호가 절로 긴장이 될 정도였다.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것으로 준비를 끝마친 카타리나가 말했다.

    “이 던전 어딘가에는 아직도 ‘마몬의 사역마’들이 남아 있습니다.”

    &

    < 제 4장 #2 > 끝

    ⓒ 취룡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