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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메이커-12화 (12/227)
  • < 제 4장 - 던전의 심장 >

    제 4장 - 던전의 심장

    마계에도 분명 법은 존재했다. 하지만 문명화된 법칙국가의 제대로 된 치안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당초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자비한 폭력이 법을 대신하지 않던가.

    약육강식.

    강자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수준을 넘어, 주먹이 곧 법인 세상이 바로 마계였다.

    고블린 같은 최하위 사역마라면 차라리 상관없었다. 힘의 피라미드 최하위에서 그저 살아가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하나의 던전과 던전에 복속된 사역마들을 거느린 가주, 마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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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우… 후…….”

    용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거친 숨을 토했다. 마왕으로 각성한 이후 육체 자체가 강화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무결한 초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마왕의 방 바로 앞에 위치한 방안.

    용호는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카타리나에게 배운 요령대로 마력을 체내에서 부드럽게 순환시켰다.

    마왕의 육신은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라 해도 좋았다.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는 것만으로도 육체의 피로가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쟤들은 지치지도 않나.’

    다시 눈을 뜬 용호는 쓰게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용호의 호위기사인 동시에 전투 교관인 카타리나와 던전 방어의 핵심으로 부상한 2성급 사역마 ‘트리엔트’ 사이의 대련이 한창이었다.

    “그런 식으로는 평생을 가도 잡지 못할 걸?”

    카타리나가 한껏 여유를 부리며 놀리듯이 말했다. 당연히 그 대상은 방 한가운데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트리엔트였다.

    카타리나의 도발에 - 평소 호구 같은 모습과의 간극 때문에 그 효과가 특히 강렬했다. - 화가 났는지 트리엔트가 더더욱 격하게 가지를 흔들며 덩굴들을 내뿜었다.

    제법 빠르고 날카로웠다. 솔직히 말해서 용호로서는 피할 자신이 없는 공격이었다. 더욱이 덩굴의 숫자는 하나도 아니고 자그마치 넷이나 되었다.

    하지만 카타리나는 이번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덩굴을 피해 뒤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덩굴들을 향해 돌진했다. 물 흐르듯이 덩굴들을 피하며 돌진하는데 그 움직임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깃털을 보는 것 같았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트리엔트는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어느 순간 지면을 박찬 카타리나가 사라졌다. 적어도 용호와 트리엔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한 호흡.

    카타리나가 다시 나타났다. 트리엔트의 코앞도 아닌 등 뒤에서 불쑥 나타난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칼집 씌운 단검으로 트리엔트의 몸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걸로 10전 10승 0패.”

    트리엔트가 덩굴로 카타리나를 건드리거나 붙잡으면 트리엔트가 승리.

    카타리나가 덩굴을 피해 트리엔트의 본체를 건드리면 카타리나의 승리.

    아주 단순한 규칙의 대련이었고, 카타리나는 방금 스스로의 말마따나 10승째를 거두었다.

    분한 듯 가지를 떠는 트리엔트를 웃으며 바라보던 카타리나는 빙글 돌아섰다. 구석에서 구경중인 용호에게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마치 마술공연을 끝내고 관객에게 인산하는 마술사 같은 모습이었다.

    호구 끼가 충만한 카타리나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격의 영역에 국한되었다.

    몰락한 가문이라 해도 마몬 가는 하나의 가문이었다. 카타리나는 가문의 가주를 호위하는 호위 기사였고, 그에 걸맞는 실력 역시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왜지. 왜 묘하게 기분이 나쁘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기분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카타리나보다 트리엔트에게 심적으로 동질감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칭찬해달라는 듯 애써 침착한 얼굴로 귀를 팔락거리는 카타리나 등 뒤로 가지를 축 늘어트리는 트리엔트를 바라본 용호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꼭 촉… 아니, 덩굴 진화 시켜준다. 힘내라, 트리엔트. 다음엔 꼭 카타리나를 붙잡는 거야!’

    그전에 용호 자신부터 진화를 해야 할 판이었지만 말이다.

    가주 자리에 오른 지 육일 째.

    용호는 요 삼일 동안 카타리나에게 ‘전투의 기본’을 배웠다. 이십 평생 동안 싸움과는 무관한 삶을 살아온 용호였기에 무엇 하나 쉽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게을리 할 수는 없었다.

    “훈련은 익숙해지셨는지요.”

    미리 받아둔 물로 대충이나마 땀을 씻고 나오자 엘리고스가 웃는 얼굴로 용호를 맞이했다. 엘리고스가 가져온 갈아입을 옷 - 던전 상회에서 대량으로 사들인 인간형 사역마들을 위한 평상복으로 그냥 회색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모양 하나 없었다. - 을 받아든 용호는 옷을 갈아입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그럭저럭. 몸 움직이는 게 살짝 재미도 있고.”

    “카타리나의 강습법에 걱정이 많았는데… 가주님께서 워낙 영민하셔서 다행입니다. 실로 마몬 님의 축복이십니다.”

    카타리나가 못 미덥기는 엘리고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용호는 쓰게 웃은 뒤 엘리고스를 따라 마왕의 방을 나섰다.

    고블린들의 작업을 돌아보기 위함이었다.

    현재 마몬 가의 던전에는 고블린이 총 네 마리 있었다.

    힘 특화로 진화 시킨 고블린 존과 체력 특화로 진화시킨 고블린 론.

    추가로 구매한 고블린 두 마리는 마력을 아끼느라 아직 진화시키지 않은 상태였지만 각각 민첩과 지력 특화에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블린의 경우 어떤 진화가 가장 효율적인지 아직 알 수가 없었기에 데이터 수집을 목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일단은 역시 자원창고구나.”

    고블린들이 제일 먼저 착수한 작업은 자원창고의 건설이었다. 사실 말이 자원창고지 방 하나를 새로 활성화 시킨 뒤 이런저런 자원들을 쌓아둔 것이 전부이긴 했다.

    엘리고스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각종 목재와 돌들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굳이 따진다면 던전도 하나의 사역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력만으로 모든 시설을 설치할 수는 없습니다. 나무나 돌, 금속 등 여러 재료들이 필요합니다. 던전 상회에서 이런 재료들을 판매하긴 합니다만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은 직접 구하는 편이 좋겠지요.”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니 맞는 말이었다.

    다시 한 번 자재들을 돌아본 용호가 물었다.

    “자원창고 다음에는 뭘 지을 생각이지?”

    “결정하시는 것은 가주님이십니다만, 개인적으로는 감옥을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감옥?”

    생각지도 못한 시설이었기에 용호는 저도 모르게 조금은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엘리고스가 침착하게 답했다.

    “예, 감옥이 없는 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확실히 용호가 했던 게임 속 던전들도 대부분 감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애당초 ‘던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감옥이 없는 게 이상하긴 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감옥은 포로들을 가둬두기 위한 곳 같은데… 딱히 그럴 여유가 없지 않을까?”

    당장에 포로를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고, 지금 있는 식구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살림이었다.

    엘리고스가 환하게 웃었다.

    “오오… 포로 따윈 남기지 않는다는 말씀이시군요. 무척이나 마왕다운 말씀이신 터라 이 늙은 엘리고스, 감동했습니다.”

    용호는 마왕다움에 대해 고찰하는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엘리고스가 말을 이었다.

    “감옥의 역할은 적을 가두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역마를 벌주기 위한 용도이기도 하죠. 고블린 같이 저능한 사역마들을 다루기 위해서는 당근뿐만 아니라 채찍이 필요합니다.”

    잠시 감옥에 궁상맞게 갇혀서 울상을 짓고 있는 고블린들과 카타리나를 떠올린 용호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필요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지만 던전과 마계에 대해서는 용호 자신보다 엘리고스의 판단이 옳을 가능성이 높았다.

    “알았어, 그럼 작업을 착수하도록 해. 그리고 현 상황에서 만들 수 있는 함정 종류와 던전 시설에 대한 자료를 모아줘. 다녀와서 확인할 테니까.”

    ‘다녀온다’는 표현에 엘리고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벅였지만 잠깐 뿐이었다. 이내 밝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늘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신지요?”

    “서둘러서 나쁠 건 없겠지. 카타리나에게도 준비해두라고 해놨어. 이제 시작하는 단계라 딱히 위험할 것도 없을 것 같지만.”

    마몬 가의 던전은 현재 대부분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다. 활성화된 부분이 비활성화 된 부분의 10%도 채 되지 못했고, ‘지하층’들까지 고려한다면 지금의 던전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던전 탐사. 마몬 가의 숨은 유산들의 획득이었다.

    ‘뭔가 자기 집 탐사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게 우습기는 하지만.’

    역대 가주들 가운데 그 누구도 마몬 가 던전의 완벽한 재가동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던전이 너무 넓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던전 탐사는 위험했다. 마몬 가 던전에는 탐욕의 마왕 마몬의 숨은 유산도 많았지만, 동시에 알려지지 않은 함정들 역시 존재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용호는 마몬 가의 힘을 회복할 생각이었다.

    ‘물론 시작부터 무리할 생각은 없어.’

    일단은 전대 가주나 전전대 가주들이 발견했던 곳들을 우선적으로 재가동 시키며 마력을 기르고 진화 숙련치를 모을 요량이었다. 진짜 모험에 나서는 것은 강해진 이후에 해도 충분했다.

    “그렇다면 먼저 방문하셨으면 하는 곳이 있습니다. 던전이 다시 재가동되기 시작한 지 이제 육일이 지났으니 형태도 갖추어졌을 것 같군요.”

    엘리고스의 말에 용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형태가 갖추어졌다? 어딜 말하는 거지?”

    엘리고스는 부드럽게 웃었다. 용호가 마몬 가의 가주로 즉위한 첫날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작 육일 째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방문하지 못한 곳을 언급했다.

    “마몬 가 던전의 핵심. ‘던전의 심장’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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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4장 - 던전의 심장 > 끝

    ⓒ 취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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