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장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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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곧 변화를 의미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더 적합하게 변하는 것.
조금 달랐다.
용호 자신의 능력은 그런 사전적인 의미의 진화와 완전히 같지 않았다.
한 단계 나아가는 것.
육체와 영혼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존재가 가진 잠재력을 열어주는 것. 그를 통한 발전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유도하는 힘.
더 빨라지길 원한다면 더 빠르게.
더 단단해지길 원한다면 더 단단하게.
더 강해지길 원한다면 더 강하게.
길을 인도한다.
존재가 갖춘 잠재력을 이끌어준다. 새로운 존재로 각성시킨다.
그것이 진화의 힘.
마왕으로 각성함에 따라 손에 넣은 막강한 권능!
용호는 눈을 떴다. 스스로의 영혼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의식을 부상시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뭔 소리야?’
진화의 권능.
대충 감이 오긴 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능력인지,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 지가 불분명 했다. 이게 게임이라면 어디서 설명 문구 같은 게 뿅 하고 튀어나와 능력을 설명해줄 터였지만 아쉽게도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용호는 스스로 생각해보았다.
‘그러니까, 클레스 체인지… 아니, 클레스 업 같은 걸 시켜줄 수 있는 능력이라는 건가?’
게임으로 치자면 고블린을 홉 고블린으로 승급시킨다든가, 전사를 상급 전사로 업그레이드 시킨다든가.
조금 전보다는 더 느낌이 오긴 했지만 제대로 맞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진화의 마왕이라기보다는 승급의 마왕일 테니까.
그리고 게임이라면 모를까, 현실의 존재들에게 ‘상위 클레스’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정해져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 이거지.’
용호는 예전에 했던 게임들을 떠올려 보았다.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임에도 특이하게 각 유닛마다 레벨이 존재하는 게임이었다.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아 경험치를 쌓으면 레벨 업이 가능했는데, 그렇게 레벨이 높아진 유닛은 당연하게도 똑같은 직군의 다른 레벨 낮은 유닛들보다 더 강하고 유용했다.
물론 그 게임과 아주 같지는 않을 터였다. 아니, 애당초 용호의 능력은 그렇게 단순히 레벨 업을 시키는 것과는 다소 다른, 보다 나은 존재로 ‘발전’ 시키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미지를 잡기에는 충분했다.
공대생인 용호에게는 딱딱 맞아 떨어지는 명쾌한 프로세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은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첫 술부터 배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권능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니었으니 조금씩 실험을 통해 능력을 파악하면 될 터였다.
용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여전히 망토에 파묻혀 방바닥을 뒹굴고 있는 카타리나를 보았다.
“어?”
카타리나의 몸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 연기가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일단 연기의 색이 다섯 가지나 되었다.
빨강, 파랑, 검정, 노랑, 보라.
서로 다른 다섯 색의 연기가 각기 비슷한 규모로 천장을 향해 피어올랐다.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고, 다섯 색중 어떤 색도 섞이지 않았다.
용호는 눈을 깜박였다.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연기의 색이 연해졌고, 오래지 않아 방금 연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용호는 당황하는 대신 생각했다.
어째서 갑자기 이상한 연기가 보였는가.
이 변화의 원인은 용호 자신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카타리나에게 있는 것인가.
용호는 옥좌에서 일어나 카타리나에게 다가갔다. 아침잠이 많은 이 예속 사역마는 여전히 망토 속에서 꿈틀거릴 뿐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용호는 기현상의 원인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가정했다.
그렇다면 평소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간단했다. 진화의 권능이었다.
카타리나 앞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용호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았고, 진화의 권능을 일깨워 보았다.
생각대로였다. 카타리나의 몸에서 다시 한 번 다섯 색깔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연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게 아니야.’
너무 모호했다. 용호에게는 조금 더 직관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원하는 것은 보다 익숙한 것. 보다 이해하기 쉬운 것.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정보.
용호의 바람에 권능이 반응했다.
용호의 영혼으로부터 발현된 힘이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고, 다섯 색깔의 연기 위로 빛의 문자들이 나타났다.
[이름 : 카타리나 (여)]
[종족 : 하프 서큐버스 / 하프 다크 엘프]
[주속성 : 바람 / 어둠 부가속성 : 번개 / 물 / 대지]
[주요 종족치 : 서큐버스 - 매력 / 마력 | 다크 엘프 - 민첩성 / 기량]
[진화 숙련치 : 31/100]
용호는 눈동자를 굴렸다. 빛의 문자들 위로 몇 개인가 되는 네모난 빛의 상자가 보였다. 각각의 상자에는 서로 다른 문자가 나열되어 있었다.
[서큐버스 : 매력 특화 | ★★★ (3)]
[다크 엘프 : 민첩 특화 | ★★★ (3)]
[하이브리드 | ★★★☆ (3.5)]
[서큐버스 : 마력 특화 | ★★★☆ (3.5)]
[다크 엘프 : 기량 특화 | ★★★ (3)]
직감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은 진화를 위한 기본 정보들이었다.
현재 어떤 재능을 갖추고 있는지, 어떤 쪽에 잠재력을 품고 있는지.
색은 속성을 의미했다. 네모난 상자는 진화의 방향- 일종의 테크트리의 형상화라 할 수 있었다.
어느 쪽으로 진화를 시킬 것인가. 어떤 특성을 살려줄 것인가.
용호는 군침을 삼켰다.
지금 진화의 권능을 발동시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 다섯 개의 빛의 상자 가운데 하나를 고르면 카타리나는 어떤 변화를 보여줄 것인가.
알고 싶었다.
실험해 보고 싶었다.
권능을 사용하고 싶었다.
“헉.”
용호는 저도 모르게 카타리나를 향해 뻗고 있던 손을 급히 거두었다. 의식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빼 거리를 벌렸다.
‘안 돼.’
함부로 할 일이 아니었다. 아직 이 권능을 사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진화의 권능의 프로세스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지금 섣불리 카타리나에게 실험을 하는 것은 무모하고 광오하고, 하여간 미친 짓 정도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더욱이.’
권능이 ‘공짜’로 발동할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무 안일한 예상일지 몰랐지만 이제까지의 흐름대로라면 권능 발동에는 마력이 필요할 가능성이 높았다. 어제의 일로 용호 자신의 마력은 꽤나 소진된 상태였다. 무리한 권능의 운용은 삼가는 게 맞았다.
“가주… 님?”
용호가 낸 소리를 듣고 깼는지 돌돌말린 망토 밖으로 카타리나가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눈이 반쯤 감긴 상태였다.
카타리나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점차 흐려졌다. 용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깼냐?”
카타리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 상태로 눈동자만 굴리다가 다시 망토 속으로 쏙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 안에서 한참 꿈틀꿈틀 거리더니 - 아마도 옷차림을 정돈하는 것 같았다. -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고, 흠흠 괜한 헛기침을 토했다. 워낙 길어서 그런지 귓불이 거의 없는 귀였지만 붉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계속 쳐다보고 있다가는 미녀를 마주한 공대생의 특성이 발휘될 것 같았기에 용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옥좌로 향했다.
엘리고스가 돌아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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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나랑은 다르네.”
“가주님?”
엘리고스의 조심스런 물음에 용호는 바로 답하는 대신 눈을 한 번 가늘게 떴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는 달랐다.
다섯 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던 카타리나와 달리 엘리고스의 몸에서는 빨강과 검정 두 가지 색의 연기만이 피어올랐다.
[이름 : 엘리고스 (남)]
[종족 : 레드 데몬]
[주속성 : 불꽃 / 어둠]
[주요 종족치 : 레드 데몬 - 힘 / 체력]
[진화 숙련치 : 62/100]
[힘 특화 | ★★ (2)]
[체력 특화 | ★★ (2)]
[마력 특화 | ★ (1)]
종족이 다르고 속성이 달랐다. 진화할 수 있는 테크 트리 역시 카타리나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띠는 점은 ‘진화 숙련치’였다. 아무래도 진화를 위해서는 진화 숙련치를 채울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문제는 저걸 어떻게 채우느냐는 건데.’
아직 표본이 부족했다. ‘보는 방식’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게임처럼 능력에 관한 설명서가 생긴 것은 아니었다.
카타리나나 엘리고스는 마왕의 권능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마왕의 권능은 마왕들만이 가진 힘.
마왕과 일반적인 마족 사이를 구분 짓는 가장 강렬한 개성.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자신의 가장 강한 무기를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자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
전대 가주 또한 능력을 사용하는 모습을 종종 보이긴 했어도 그 능력이 어떤 원리에 의해 발동하는지, 어떤 부가기능과 약점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비밀을 유지했다고 한다.
마력의 마왕은 마력이 강하다. 불꽃의 마왕은 불꽃을 다룬다- 이 정도가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알고 있는 마왕의 권능의 전부였다.
‘뭐,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적당히 생각을 갈무리한 용호는 고개를 내저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했다.
“아니, 아무 것도. 그보다 마계에서도 밥을 먹긴 먹어야 하네.”
세 사람은 지금 방 한 가운데에 동그랗게 모여 앉아 팬케이크와 야채 스프를 먹고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엘리고스가 요리한 음식들이었다.
용호의 말에 순간 움찔한 카타리나는 처음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냉정한 여기사의 얼굴로 말했다.
“아침 식사 후에는 제가 사냥을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이 한 몸 바쳐 반드시 고기를 구해오도록 하겠습니다.”
비장미가 넘쳐흘렀지만 이미 카타리나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용호에게는 전혀 다른 얼굴로만 보일 뿐이었다. 사냥감을 못 구하면 어쩌지…하고 끙끙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호위 기사가 아니라 호구 기사냐…….’
입 밖으로 냈다가는 카타리나가 울상을 지을 것이 뻔했기에 용호는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 뒤 엘리고스를 돌아보았다.
“상황이 이런데 식구를 늘려도 되겠어?”
전대 가주가 남긴 재산을 완전히 다 털린 것은 아니었다. 카타리나와 엘리고스가 새로운 가주를 맞이했을 때를 대비해서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쓰지 않은 ‘마지막 유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물론 애당초 ‘몰락’이란 수식어를 붙여야 했던 마몬 가인 만큼 그 마지막 유산도 초라하긴 했지만, 어찌되었든 돈은 돈이었다. 그런데 엘리고스는 그 돈을 과감하게 투자할 것을 요구했다.
“던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사역마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일꾼’이 없는 던전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엘리고스가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하기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자원을 모으고 던전에 각종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서도 노동력은 반드시 필요했다.
“마계 인력 시장이라.”
용호는 가주의 옥좌 쪽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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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2장 #2 > 끝
ⓒ 취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