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28살, 재석의 학교생활
“장모님이 그러셨다고?”
“말도 마. 엄청 보채. 이것 봐봐.”
윤희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시간 질질 끌지 말고, 바로 실행해. 관장이란 지지배가 어떻게 그리 보는 눈이 없니? 옆에 보물이 있음에도......』
아주 긴 장모의 글이 폰에 담겨 있었다. 대단한 패기가 메시지에서 느껴졌다.
“하하......”
“아주 딸을 잡아먹지 못해선...... 내가 이러고 살아. 불쌍하지 않아?”
윤희가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 똘망똘망한 두 눈에 서러움이 담겨 있었다.
“하하, 그럴 리가, 다 자기를 위해서일 거야.”
“하여튼 남자는 아무것도 몰라. 그냥 내 편이 되어 달란 말을 어쩜 저리 모를 수 있냐.”
“......”
섭섭함이 물든 눈에 한강의 입이 얼었다. 대체 무슨 편이 되어 달란 소리인지.
“화 풀어. 장모님의 농도 섞여 있는 걸 아는데...... 미안.”
“흥.”
“미안.”
“봐준다.”
남편의 쩔쩔매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저 살짝 장난을 쳐봤을 뿐인데.
참으로 화를 낼 줄 모르는 자상한 남자다.
“끙.”
한강은 앓는 소리를 냈다. 지금까지 장난이었음을 깨달아 현자 타임을 살짝 가지는 시간을 가졌다.
갸악!
외치고 싶었다.
“이거 할인가로 받을 수 있는 거지? 그래도 남편이 운영하는 곳인데...?”
이거였나?
이러려고 선수를 쳤나 보다.
한강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윤희를 응시했다.
“할인이야 해주겠지만, 법에서 너무 벗어난 금액은 힘들어.”
자칫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
정치권이란 것이 불리할 때면 하는 것이 재벌을 까 국민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다.
여론을 집중해 지지율을 올렸다. 아주 양아치처럼......
그들의 타깃이 되어 놀잇감이 될 생각은 절대 없었다.
“하여튼 그런 건 따박따박 지킨다니까.”
육성과 여타 다른 기업과 달리 한리버는 매우 투명한 회사이다.
다른 재벌 기업들이 언론의 먹이가 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에도 한리버 그룹만큼은 사람들의 후한 평을 받았다.
한강이 얼마나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보여주는 모습들이었다.
“그게 내 기업이야. 그래서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고.”
진지함이 묻어난 목소리는 방 안에 무게감을 실었다.
“알겠어. 15%면 되지?”
“걱정하지 마. VVIP 거래처로 지정되면 최대 20% 할인 혜택을 볼 수 있어. 이건 아직 외부로 노출이 되지 않았지만. 규정도 그렇게 만들어 놔서 충분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오, 진짜?!”
한강의 말에 윤희는 크게 기뻐했다. 어쨌거나 윤희도 경영자 입장.
이익률을 높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것도 없었다.
“대신 회사 규정대로 따라야 돼. 혜택을 준다 해도 3% 수준이야.”
“치,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방침이 그런데. 그걸 알아야 돼. 가족으로 묶일수록 더 조심해야 된다는 걸.”
한강은 경고를 주었다. 더는 안 된다며 선을 그었다.
“알았어. 그렇게 하자.”
흔들리지 않는 눈빛에 윤희는 백기를 들었다. 여기서 더 억지를 부려봐야 좋을 건 없었다.
“잘했어.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이 대표님.”
“저야말로요.”
속옷 차림으로 할 법한 대화는 아니었지만, 거리를 벌려 앉아 있던 둘은 손을 맞잡는 대신 입을 맞추는 걸로 대신 도장을 찍었다.
***
2011년 여름.
서울 외곽에 자리한 화랑 초등학교.
“야 뒈질래?”
옷을 멋들어진 게 입은 체격이 좋은 아이가 꾀죄죄한 아이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힘껏 밀었다.
“미, 미안해. 일부러 그러려던 게 아니었어......정말이야.”
멱살을 잡힌 채 오들오들 떠는 아이는 덩치 큰 아이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다.
사자에게 목을 물린 사슴의 심정이 이럴까.
제대로 힘조차 쓰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약자의 모습이었다.
“X발아, 이게 얼마짜린 줄 알아? 거지새끼가 입고 다닐 수 있는 옷으로 보이냐고.”
초등학교 1학년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믿을 수 없는 질 나쁜 목소리.
하지만, 어떤 누구도 아이에게 반항을 하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벽에 박힌 아이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덩치 큰 아이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덩치 큰 아이의 집안은 동네에서 비싼 아파트에 살고 있는 반면, 겁에 질린 아이는 하루 근근이 먹고 사는 집안의 아이였다.
집은 반지하 1층.
옷은 매일 같은 옷만 입고 다닌다.
머리는 매일 떡진 모습에 제대로 씻고 다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얼굴은 까무잡잡하기까지.
입학하자마자 따돌림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야. 하성태. 그만 못하냐?”
그때 뒤에서 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먹을 휘두르려던 덩치 큰 아이의 행동이 멈췄다.
덩치 큰 아이의 이름이 하성태인 듯싶었다. 아이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아, 시X.”
주인공을 보자 성태의 입에서 또다시 욕설을 뱉었다.
“뭐라 했냐?”
“그만하라 했다.”
성태의 덩치보다 작음에도 아이는 물러서지 않고 발을 앞으로 내뻗었다.
“하...... 여자애들에게 인기 좀 있다고 개기냐? 십X야?! 눈 깔아라.”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말이 술술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성태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아이에게 이를 갈았다.
“재석아, 그만해.”
놀랍게도 앞으로 나선 아이는 재석이었다.
“그래, 그러지 마. 재석아. 다칠지 몰라.”
여자애들이 재석의 주변으로 모여들어 재석을 말렸다. 그러고선 성태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장벽을 쳤다. 절대 재석을 건들 수 없다는 항의의 뜻이 담겼다.
“말리지 마. 그리고 비켜.”
반에서 분위기 메이커를 맡으며 광대로 지내온 재석의 모습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재석은 뜸 들이지 않고 발을 뻗어 여자아이들의 장벽을 뚫고 성태에게 다가갔다.
“하...... 이젠 별별 새끼들이 존나 개기네.”
성태는 어이없단 눈으로 다가오는 재석을 노려봤다.
“그 옷 얼마냐? 십만 원?! 이십만 원? 친구를 거지 취급할 정도로 대단한 옷이야?”
재석은 눈에 들어오는 브랜드 로고를 쳐다봤다. 처음 보는 브랜드였다.
돈의 가치는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재석은 성태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한 가치를 따졌다.
“이래서 거지 새끼들이랑 어울리면 안 된다고 한 거네.”
엄마에게서 매일 듣는 이야기 중 하나.
‘친구들은 도움이 되는 애들만 만나. 못 사는 집 애들과는 거리를 멀리하고’
기억을 떠올려 재석까지 거지로 내몰았다.
“거......지? 내가?!”
재석은 태어나 처음으로 들어보는 ‘거지’ 소리에 작게 충격을 받았다.
‘집이 작아지긴 했지만, 엄마는 3년만 살면 다시 살던 집으로 가겠다 했는데... 그게 거지라고?!’
외할아버지는 육성그룹의 오너.
친할아버지는 육성과 한리버와 관계된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 오너.
아빠는 아이들도 모를 수 없는 한리버 그룹의 총수였다. 그런 자신에게 거지라 말할 수 있는 이가 마냥 신기했다.
실소마저 터졌다.
집이 작아졌다 해서 재석도 알 건 알고, 눈치도 제법 있었다. 항시 따라다니는 아저씨들만 보더라도 거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젠 귀까지 먹었네.”
여자들 앞에서 개쪽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간 손을 봐주고 싶던 차였다. 얼굴 하나 믿고 까부는 새X들도 재수 없긴 마찬가지였다.
“개 짖는 소리 말고 내 말에 답해라. 친구에게 상처를 줄 만큼 그 옷이 중요하냐 물었다.”
재석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어느새 성태의 앞에 서 있었다.
5cm는 더 큰 성태를 살짝 올려봤다. 재석도 결코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성태의 체격은 또래 아이들 중 최고였다.
“여자들 앞이라고 기어오르냐?”
“물었다. 말해.”
재석의 귀엔 성태의 말 따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로지 듣고 싶은 말만을 기다렸다.
“하, 시X. 그래. 이딴 새끼보다 이 옷이 더......”
퍼억!
그 순간이었다. 재석은 말아쥔 주먹을 강하게 휘둘러 성태의 열린 턱을 정확하게 가격을 하였다.
꺄아!
헉.
아이들의 외침과 탄성이 교실을 채웠다.
생각도 못한 전개에 매우 놀란 모습이었다.
“이까짓 옷이 친구보다 중요하다고 했지. 그럼 이딴 옷은 입고 다니지 않게 해줄게.”
재석의 눈빛이 매섭다.
입을 벌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성태의 손을 발로 밟고 옷에 손을 가져갔다.
“친구를 거지로 만드는 옷 따위......”
재석은 성태의 상의를 벗겨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 없어지는 게 나아.”
헐.
아이들은 저마다 놀란 눈을 재석에게 던졌다. 온순하고 착하던 재석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다.
화를 내는 것조차 몰라 늘 바보처럼 행동해 왔다. 잘생긴 아이가 그러니 귀엽기도 하고 더욱 큰 매력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보는 재석의 모습은 여자들에게 있어서도, 남자들에게 있어서도 강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성태가 입고 있는 옷은 난닝구 하나였다.
“너에게 어울리는 건 이런 모습일지도......”
재석은 더 볼 거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도영아 괜찮아?”
맹수의 기운을 풍기던 재석은 부위기가 확 바뀌었다.
“이런 애 신경 쓰지 말고 가자.”
친구를 거지라 칭하며 무시하는 놈 따위 신경 쓸 가치도 없었다.
[재석아, 분명 학교를 다니다 보면 친구와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거나,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가 있을 거야. 절대 물러서지 말고 지켜주거라.]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건 좋지만, 네가 이용당해서는 안 돼.]
늘 아빠에게서 듣던 소리였다. 늘 겸손할 것이며 강자에겐 더 강하게 약자에겐 한 없이 약해지고 선해지라 하였다.
재석은 그걸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아, 응.”
도영은 어벙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다 재석의 손에 잡혀 구석진 벽에서 빠져나왔다. 주변에 모여 있던 아이들은 잔뜩 쫄아 굳은 얼굴로 길을 비켜 주었다.
***
하교를 마치고 시간이 조금 흐른 저녁 시간.
“엄마, 아빠...... 용서를 빌 게 있어요.”
식사를 마친 재석은 한강과 윤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
갑작스러운 아들의 이상행동에 윤희는 눈을 깜박거리다 걱정이 물든 눈으로 바라봤다.
“......말해 보거라.”
한강은 자세를 잡고 아들의 눈을 주시했다. 무언가 있음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한강의 눈이 붉게 부어 있는 아들의 오른쪽 주먹으로 향했다.
살짝 까진 정도이지만 쉽게 넘기지 않았다.
‘저건 필시 누군가 때린 흔적이야.’
이제 재석도 여덟 살.
싸움도 하고 아이들만의 정치적인 세상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
아들을 믿지만, 조금은 불안한 감정이 심장을 타고 머리로 흘러갔다.
“오늘 반 친구를 때렸어요.”
“뭐, 뭐...... 다친 데는......”
도리도리.
한강은 아내의 팔을 잡아 나서지 말아 달라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재석이 말을 끝까지 들어보자. 보아하니, 다친 곳도 없고. 남자라면 그런 작은 상처는 훈장이야.”
“......”
윤희의 눈에 불만이 어렸지만, 더는 뭐라 하지 않았다.
‘우리가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불편한 일이 있더라도 아이 앞에서는 보이지 말자.’
육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때를 떠올렸다. 애써 꾹 눌러 참았다.
“재석아.”
상황이 정리되자 한강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네.”
“말해 보거라.”
“제가 때린 친구는 성태이고요, 맞은 애는 도영이에요. 도영이가 실수로 성태의 옷에......”
재석은 오늘 어떤 이유로 성태를 때리게 되었고, 어떻게 조치를 취했는지 상세하게 말을 하였다.
어떤 과장도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밝혔다. 재석의 이야기를 입을 다물고 듣던 한강은 아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곁에 있던 윤희는 충격에 빠져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재석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