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26살, 임시 정부일 흙을 들어 예술을 펼치다
차르르르.
천이 놓인 장소로 포대에 들어 있던 가루들이 아래로 쏟아졌다.
황토와 연한 갈색 흙도 섞여 포대 위 한자리를 차지했다.
“느낌이 좋은데.”
준비된 재료를 보자 흡족함이 위로 올라왔다. 좋은 예감이 세포 단위로 퍼졌다.
“흙냄새도 좋고.”
흙을 가져와 코에 가져가 조심히 맡았다.
일반인들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먼지와 같지만, 한강의 손을 거치면 예술의 일부분이 되리라.
“가볼까.”
가루들로 색을 입힐 것처럼 행동을 하던 한강은 손에 묻은 가루를 털고 조각칼을 들었다.
“생각대로 잘됐으면 좋겠는데......”
오늘부터 철야를 각오하였다. 익숙하지 않은 자동기기들을 뒤로하고 조각칼과 망치를 이용해 밑그림을 그린 선을 따라 석고를 조심히 깼다.
일정한 힘을 사용해 배경이 될 면의 층을 깎아갔다.
탁! 탁!
석고판이 머리부터 시작해 천천히 떨어져 나가며 백범 김구 선생의 모습이 앞으로 튀어나온 듯한 효과를 보이게 만들었다.
한강의 손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으아, 허리야.”
장시간 허리를 굽혀 작업을 했더니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뿌드득 소리가 귓가로 들려왔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생각보다 작업 속도가 나쁘지 않아 일정에 맞게 완성할 수 있겠어.”
현생에서 처음으로 든 조각칼이라 전생의 미세한 감각을 살릴 수 있을지 조금은 걱정이 되었는데, 제법 괜찮았다.
“역시 젊음이 좋아. 허허.”
저도 모르게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20대 모습을 가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한강에게서 비쳤다.
“가자.”
본인 스스로는 느끼지 못하고, 소등하고 작업실에서 벗어났다.
한강이 떠난 작업실엔 어둠이 내렸다.
***
딩동!
퇴근하고 집에 도착한 시간.
퇴근한 한강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 왔어.”
안으로 들어서자 현관문 앞에 윤희가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든 가방을 윤희가 받았다.
“오늘도 고생했어. 어서 씻고 와. 맛있는 거 해놨어.”
일과 작업에 몰두하고 들어온 남편을 위해 간단한 보양식을 준비해 두었다.
남편을 욕실로 보내고 손에 든 짐을 옷걸이에 걸어 두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은 음식을 전자레인지 안에 넣어 데웠다.
촤아아아아아.
욕실에선 샤워기에서 물이 뿜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물어봐도 되려나?!”
욕실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윤희의 얼굴에 고민이 깃들었다.
최근 핫하게 이슈로 떠오른 기사를 떠올렸다.
“물어보자. 물어보는 게 좋겠어.”
그러다 스스로 답을 정했다.
윤희의 얼굴에 굳은 결심이 맺혔다.
“크아, 시원타. 살 거 같다.”
탁탁탁탁탁.
물기가 덜 말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나왔다. 팬티 차림으로 나온 한강의 몸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큰 근육은 없지만, 적당히 나온 가슴과 연하게 보이는 복근에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치골이 참으로 섹시했다.
“남자는 꼭 그러더라. 오줌싸면 흔적을 남기고, 수건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고.”
그런 한강의 모습을 본 윤희의 볼살이 살짝 붉어지나 싶다가, 공기가 잔뜩 들어간 개구리 볼로 변해갔다.
이해를 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눈에 힘이 들어갔다.
“응? 왜?!”
“그렇게 하면 기껏 청소한 바닥에 물기 묻잖아.”
“에이, 티도 안 나.”
“에휴...... 그래도 남자란 건가?!”
천진난만한 웃음을 흘리는 남편의 모습에 불만을 얘기하려던 게 바보처럼 느껴져 말하기를 포기했다.
“자기가 해주는 요리를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서둘러 나왔지 뭐야. 내일부턴 그러지 않을게.”
“말은...... 어서 먹어.”
준비된 건 삼계탕이었다. 푹 삶은 영계가 뚝배기에 담겨 있었다.
“이야, 내가 좋아하는 거네. 잘 먹을게.”
수건을 의자에 내려 두고 숟가락을 들었다. 파와 소급, 후추를 넣어 잘 섞은 후 한 숟가락을 떠 입안에 넣었다.
“크으, 바로 이 맛이지.”
후추와 파가 어우러진 깊은 맛이 해일이 되어 혀를 휩쓸고 지나갔다.
미미(美味)!!
“당장이라도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올 천상의 맛이야!”
“......한강이 아빠?!”
갑자기 오글거리게 헛소리를 하는 남편의 모습에 경기를 일으켰다.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기분에 빠졌다.
“하하하, 그냥 나도 이런 말을 해보고 싶었지 뭐야. 그만큼 맛있었다 뭐 그런 거지.”
아이들 만화로 유명한 요리왕 비룡의 폐해.
모든 대사들이 하나같이 손가락과 발가락을 오글거리게 만들었다.
“하여간, 정말 가끔씩 참 뜬금없는 농담이나 하고 말이야. 나니까 참는 거다? 그거 알아야 해.”
“하하, 알았어.”
확실히 집만큼 편한 곳도 없었다.
피로가 싹 풀렸다.
“저기 근데 말이야......”
영계 한 마리가 뼈로 남는 시각, 윤희의 표정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이제 라움에 작품을 전시 안 하는 거야?!”
어쩌면 부부끼리라 하더라도 민감해질 질문을 던졌다. 남편의 작품을 직접 받아 전시하는 기분은 윤희에게 있어 낙 그 자체였다.
남편의 작품을 보고 칭찬을 하는 모습만 보고 들어도 밥을 먹지 않아도 늘 배불렀다.
그러던 걸 이제는 못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무슨 소리야. 그럴 리가 있어. 내가 그럴 리 없잖아.”
한강은 어이없단 얼굴로 아내를 바라봤다. 걱정과 수심이 서린 얼굴에 황당함마저 생겼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전시관을 차린 거야? 그것도 당신의 시간을 투자하면서까지?”
윤희는 남편을 궁금한 눈으로 바라봤다.
“제목 그대로야. 4.11 기념. 그리고 이쪽 전시관은 1년에 두 번,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기념일과 광복절에 공모전을 활용해 전시를 할 거야. 그 외 다른 주제로는 다루지 않을 거고.”
“딱 두 번?”
“응, 한리버의 이미지가 엔터로 인해 썩 좋지 않잖아. 그래서 다른 수단을 활용해 이미지를 개선할 겸 사업을 시작한 거야.”
그뿐만 아니라 부족한 취업 시장에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아...... 난 또.”
“요근래 고민하던 눈치더니, 그것 때문이었구나.”
윤희의 얼굴이 확 펴지니, 그간 있었던 아내의 어색한 표정들이 전부 이해가 되었다.
“뭐 그랬지.”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진작 상의를 했겠지. 걱정하지 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설사 생긴다 하더라도 그건 너에게 줄 거야.”
다른 형제자매와 달리 윤희는 어떤 계열사도 맡지 못하고 미술관 하나만을 물려받았다.
한편의 마음으로 윤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한강이었다.
고작 미술관 관장을 시키고 있으니.
그래서 대부분의 작품을 라움에 맡겨 영향력을 키워주고자 노력을 하였다.
“삼계탕 부족하지? 더 줄까. 많은데.”
“하하. 됐네요. 배불러 다 먹었어. 그리고 오늘......”
힘껏 웃은 한강의 눈동자에 기묘한 기운이 흘렀다.
“......침대에서 쉬고 있어. 씻고 올게.”
“큼, 그래.”
한강의 한마디가 윤희의 기분을 들뜨게 만들었다. 진한 기운이 두 사람의 주변에 맺히는 순간, 둘의 눈동자에 야릇함이 맺혔다.
새벽의 축제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
이태원 육성 저택.
[한리버 그룹 유한강 회장 전시관 설립, 4.11 기념 공모전 개최.]
“윤희야, 사위도 미술관을 오픈하는 거니?”
한리버 그룹의 소식을 접한 홍라혜는 딸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물었다.
---아냐. 회사 이미지 개선을 위한 사업으로 전시관을 설립하게 된 거래. 그리고 거기에는 공모전 작품만 둘 거고, 그이가 그린 작품은 라움에 전시하기로 했어.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요즘 막냇사위가 작품활동에 들어갔다 해서 걱정했지 뭐야.”
---걱정할 거 없어. 막내 사위를 가장 믿는 게 나보다 엄마면서.
“그래, 호호. 그렇지. 아참! 좀 있음 재석이 운동회 하지 않니?!”
---아! 맞다. 5월 2일이야. 엄마 올 거지?
“가긴 갈 건데, 네 아빠가 아주 기대하고 있지 뭐니.”
---호호, 그동안 가지도 않았으면서 그런다고?
이건호는 아들과 딸을 제외한 손주, 손녀들의 행사는 참여를 하지 않았다.
그러던 분이 재석의 유치원에서 하는 운동회에 기대를 가지고 있다 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 그런지, 성격이 변했어.”
---하여튼, 우리 아빠 완전 츤데레야.
“호호, 얘는. 알았어. 네 아빠에겐 그리 전할게. 사위에게도 안부 전해줘.”
---응.
전화가 끊겼다.
“2일이란 말이지.”
수화기를 내려놓는 홍라혜의 입가에 진한 호선이 그려졌다.
***
“으어, 다 됐다.”
허리를 쭉 펴 뒤꿈치를 올렸다 내렸다.
전신에 마비가 온 기분.
하지만, 그만큼 뿌듯함이 몸을 타고 어깨에 자리했다.
“이제 모래와 가루들을 입히면 모든 게 끝난다.”
무려 4일이란 시간을 투자해 만족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하체를 제외한 얼굴과 몸통 주변을 불규칙하게 파낸 석고판을 바라봤다.
한복이 바람에 펄럭이는 착각이 일게 만드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사람의 표정을 조각으로 살리는 건 정말 어려운 작업이었어.”
지금껏 걸어온 길 중 가장 힘든 길이었다. 손가락에 돌돌 말린 데일밴드가 그 증거였다.
거기에 더하여 손목과 목 주변에 파스가 듬성듬성 부착되어 있는 게, 한강의 몸 상태를 알려주었다.
“이것만 마무리하면 하루 휴가 쓰고 푹 쉬자.”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
한강은 전시관을 개관하기 전날 하루 푹 쉬기로 하였다.
“먼저 황토로 얼굴과 손에 묻히자.”
눈을 제외한 겉으로 보이는 피부에 투명한 본드를 골고루 묻혀 그 위에 황토를 뿌렸다. 명암을 주기 위하여 검은 가루와 적당히 섞어 어두운 부분을 묘사했다. 밝은 부분은 반대로 하얀 가루와 섞어 최대한 맛을 살렸다.
“생각한 이미지보다 훨씬 괜찮은데?!”
골고루 펴 바른 얼굴을 보자 꽤 그럴싸했다.
느낌도 좋고, 다시 없을 예술 작품이지 아닐 수 없었다.
“좋다. 역시 나란 놈, 아직 죽지 않았어.”
돈을 마음껏 쓰며 만들어 내는 작품의 맛이란 참 좋다.
“가만, 김구 선생님의 모습을 레고로 만들어도 좋겠는데?!”
작업을 하며 문득 든 생각.
꽤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레고사에 의뢰를 해보자. 괜찮겠어.”
아주 멋진 작품이 되리란 기대가 물밀듯 쏟아져 내렸다.
“눈은 검은 가루로 옷은 하얀 가루로......”
스스슥.
작업의 속도가 올랐다. 한강은 자정이 넘어가도록 마지막 작업에 온 정신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끝......났다.”
풀썩.
가루들로 엉망인 바닥에 편하게 주저앉았다. 정말 힘겨운 작업이었다.
2시 36분, 싸늘한 새벽공기 세상을 덮었다. 한강은 밖으로 비치는 밝게 비추는 달을 멍하니 바라보며 성취감을 만끽했다.
“어때요? 김구 선생님. 날씨 정말 죽이죠.”
김구 선생님은 어떤 사람으로 환생해 제2, 제3의 인생을 살고 계실까?
훌륭한 분이었으니, 자신보다 더욱 값진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여기며 탁자 다리에 머리를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