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25살, 가요제를 그리다
2009년 10월이 되었다. 푸르게만 느껴졌던 하늘이 붉게 달아올랐다.
휘이이이이이.
불어오는 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은행잎을 떨구었다.
“은행잎으로 오랜만에 책갈피를 만들어 볼까?”
90년대엔 클로버와 나뭇잎을 이용해 책갈피를 만들고는 하였다.
당시의 추억을 되새기며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어 훼손되지 않도록 파일 사이에 넣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했지.”
모자를 꾹 눌러 쓰고 서점으로 들어갔다.
모바일을 이용해 보던 걸 덜어내고 오랜만에 종이 맛을 느끼고 싶었다.
“엄마를 부탁해. 이걸 한 번 봐볼까?”
08년 11월에 출간돼 10개월 만에 순문학 단행본으로 무려 100만 부가 팔리면서 종합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한 도서를 집어 들었다.
“경제가 어려워지며 심리적 고통을 위로받기 위하여 이 책을 찾았다지.”
경기불황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였다. 혼자 살아가기도 빠듯한 세상에 가족을 챙겨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신경숙 작가님의 ‘엄마를 부탁해’는 가슴이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스타벅스, 워런버핏......”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경제도서가 있는 곳. 카운터로 향하는 길에 자리한 까닭에 자연히 눈길이 갔다.
“책이라...... 나도 책을 써볼 수 있을까?”
어느 정도 성공가도를 달리는 기업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한다.
타인이 한 사람의 인생을 대신 써주기도 하지만.
막상 눈에 띄니 관심이 갔다.
“내 나이에 써도 되려나......?”
책을 쓴 주인공들은 대부분이 반백 년은 살아 감히 연륜을 언급할 수 있는 사람들.
그 사이에 20대 중반인 자신이 책을 쓴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건 조금 나중에 생각해 보자.”
잠시 생각을 접어 두기로 하였다. 한강의 발걸음은 계산대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토요일 밤에 떠나간 그대......”
09년을 뜨겁게 적신 손담비의 노래 토요일 밤에가 입을 통해 작게 흘러나온다.
한강은 들뜬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나뭇잎을 이틀간 말리고 코팅하는 게 좋지.”
집에 도착한 한강은 길가에서 주워온 나뭇잎을 평평하게 잘 펼친 후 서랍장 위에 올려 두었다.
“의자, 의자.”
거실 구석에 놓아둔 흔들의자를 끌어와 테라스로 이동했다.
테이블 위에는 빨대가 꽂힌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들도 없고, 아내도 없으니 조용하고 좋구나.”
아들을 데리고 이태원으로 간 윤희.
오늘 하루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
한강의 정신은 책에 집중됐다.
여유로움에 미소를 짓던 입가엔 미소가 지워지고 굳게 다물린 입술만 자리했다.
“......엄마.”
자식의 생일상을 받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노모의 실종 사건.
엄마를 잃은 슬픔이 발끝에서 올라와 심장에 응어리를 틀었다.
“너는 무신경해진 엄마에게...... 너는... 너는... 너는이라.....”
‘나’가 아닌 ‘너’라고 표현이 되어 있다. 책 안에 있는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책 밖에 있는 ‘나’를 가리키는 말로 들렸다.
[도시락에 햄이나 고기는 넣지 않아도 돼요. 김치만 있어도 좋아요.]
현생에 태어나 유치원에 들어갔던 다섯 살 시기가 떠올랐다.
당시 자신으로 줄줄 새어나가는 지출을 막고자 엄마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강아, 이럴 땐 엄마에게 감사합니다 말하는 거야. 그리고 아들을 챙겨 주는 건 엄마 마음이야. 한 번만 더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혼낼 거야.]
엄마가 했던 말이 뒤를 따라 머릿속에 박혔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지.”
없는 형편임에도 당신들의 자유를 내려놓고 모든 사랑과 노력을 아낌없이 베풀었다.
“결혼반지까지 팔아 미술용품을 사왔을 땐...... 정말 놀랐지.”
부자가 반지 하나를 판매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반지 하나 구입하기도 힘든 시기에 평생의 보물이라 할 수 있는 결혼반지를 판 건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건 모두 내 약값과 반찬을 사는 데 사용을 하셨지.”
어버이의 은혜는 평생 갚아도 부족하다. 읽던 책을 덮었다.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따스하고 눈물이 났다.
“정말 교훈을 주는 책이야.”
약 한 시간의 독서시간이 끝났다. 책을 들고 서재로 들어가 책상 위에 책을 올려 두었다.
“이제 일할 시간이지.”
다시 방을 옮겨 작업실로 걸음을 하였다.
“다섯 살 땐 그림에 뜻이 없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내가 웃기네.”
이젤에 올려 둔 캔버스를 보며 작게 웃었다. 전생에 예술만을 위해 살아가던 자신이기에 조금은 다르게 살고 싶었는데.
운명은 그걸 거부하고 본래의 능력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갈 것을 주문했다.
“이하나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그 친구분이 아니었다면,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많은 부분에서 달라져 있겠지.”
그리고 윤희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의 아들, 재석도 없었을 것이다.
“자, 보자.”
손을 가볍게 풀며 편한 자세로 잠시 눈을 감았다.
작품 활동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전에 느꼈던 전율을 머릿속으로 끌어왔다.
파랗고 하얗고 검게 칠해진 세상에서 느꼈던 감동과 전율.
함성으로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순간들.
‘울컥’하는 마음이 서서히 올라왔다.
“그래 바로 그거야.”
짜릿함을 붓으로 표현했다. 먼저 검은 구간과 밝은 구간을 나누어 표현을 하였다.
밝은 세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두운 색을 들어 색을 칠했다.
캔버스에는 우리의 미래를 보는 것 같은 색이 덕지덕지 칠해졌다.
으흐으음, 룰루♪
콧노래가 흘러 공기 중에 맴돈다. 슬픔에 사무친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만개해 있었다.
스스스.
캔버스엔 그간 한강이 그렸던 것과 다른 형태의 그림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 흐릿한 형상을 취한 채 색을 더해갔다.
“여기에 헤라로 화이트를 묻혀주고, 여기엔 브라운으로......”
하지만 한강은 거침없이 작업을 이어 나갔다.
무대라 짐작되는 곳에 사람이라 짐작되는 실루엣이 생겨났고, 무대 아래로는 관객들로 붐볐다.
모두 손을 높이 들어 무대를 향해 외치고 있었다. 격렬한 외침을 헤라로 세로로 거칠고 섬세하게 그으며 세상을 표현했다.
공기를 쪼개는 듯한 색들이 균열을 일으켰다.
반 고흐의 ‘춤추는 별’을 보는 듯한 표현들이 눈길을 끌었다.
“확실히 전생보다 실력이 월등히 올랐어.”
손에 들려 있던 붓이 아래로 내려졌다. 약 두 시간을 걸려 그림을 완성했다.
완성된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확실히 느끼게끔 하였다.
감격하는 가수들과 손을 들어 환호하는 관객들이 흐릿한 잔상처럼 표현돼 묘한 기분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건 나에게 즐거움을 준 무도 예능팀에 바치자.”
그림을 그려 수익을 창출하는 것만이 예술이라 부르기 힘들었다.
고마움과 감동을 주는 것도 예술 중의 하나이지 않을까 싶었다.
“한강이 아빠, 나와봐.”
완성된 그림을 감상하는 때, 밖에서 윤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아래에 김치 싸 온 거 있어. 엄마가 당신 김치 좋아하는 거 보고 이만큼 싸줬어.”
“와...... 전화를 하지 그랬어.”
밖으로 나가자 사과박스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그 안에서 김치의 시큼한 냄새가 풍겨왔다.
“했지. 했는데 안 받더라. 또 무슨 작업 활동 했지?”
윤희의 시선이 앞치마로 향했다. 물감들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걸로 보아 작품 활동을 한 걸로 짐작됐다.
“아, 맞다. 폰 테라스에 뒀구나.”
그제야 자신의 폰이 어디에 있는 기억을 해냈다. 책만 챙기고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
“으이그. 그럴 줄 알았다.”
“미안, 그런데 이건 어떻게 들고 왔어?”
딱 보기에도 윤희가 들기에 무리가 따랐다.
남자가 들어도 끙끙 앓는데, 무거운 걸 어떻게 들고 왔을지 걱정돼 물었다.
“아저씨한테 부탁했지. 나머진 우리가 한다 했고.”
“미안, 김치는 식탁에 올려두면 되지?”
“응, 거기에 올려두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그래, 근데 우리 왕자님은 꿈나라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모습이네.”
엄마 품속에 푹 파묻혀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를 부탁해’ 책을 봐서일까? 아들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윤희도.
“나 재석이 침대에 눕히고 올게.”
“알았어.”
윤희는 안방으로 향했다.
“읏차.”
앞치마를 두른 상태로 박스를 들어 식탁으로 이동했다. 얼굴이 붉어졌다.
“집이 넓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니깐.”
출입구에서 식탁까지 거리가 만만치 않았다. 한강은 끙끙대며 두 박스를 무사히 옮겼다.
“고생했어. 이따 김치찜 하자. 고기도 있으니까. 기대해.”
“알았어.”
“그런데, 이번엔 어떤 그림을 그렸어?”
안방 문을 닫고 조용히 나온 윤희가 한강의 엉덩이를 손으로 토닥여 주며 작품에 대하여 슬쩍 물었다.
“지금껏 해보지 않은 스타일로 그려봤어.”
“오, 나 궁금해. 지금 볼래.”
화가 남편을 둔 아내의 즐거움을 듬뿍 만끽하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참으로 직업 정신이 투철한 아내였다.
“그럴까. 그럼 보러 가자.”
거실을 지나쳐 복도를 걸어 작업실로 들어갔다.
“와! 저거야?!”
방문을 열자 그곳에 지금껏 남편이 그려왔던 작품과 다른 유형의 그림이 이젤에 걸려 있었다.
그간 인물을 뚜렷하게 표현해 그렸다면 지금은 사람들을 흐릿하게 그리고 현장 분위기를 강조를 하였다.
그림만 보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나 지금껏 봐온 그림 중 이게 젤 좋은 거 같아. 이거 우리 미술관에 걸 거지?”
반짝반짝 빛을 뿌리는 눈동자가 한강의 눈동자를 겨냥했다.
“아니, 이건 전시 안 할 거야.”
“어?! 뭔!!!? 아, 또 왜!”
마음이 동하나 싶으면 한 번씩 실망을 안겨주는 남편을 원망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삐죽거리는 입술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물 기세다.
“이건 나에게 좋은 경험을 준 무한도전 예능팀에 줄 선물이야. 그때 느꼈던 감정을 풀어낸 그림인데, 잘 뽑혀 다행이다.”
“와...... 진짜 너무한다.”
웃으며 말하는 남편의 말에 윤희의 얼굴 위로 벙찜이 올라왔다.
정말 느낌이 너무 좋아 꼭 가지고 싶다 여겨지는 건, 라움이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지금 라움에 있는 그림들은 뭐랄까? 가족 그림을 보관하는 용도가 되어 갔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마. 라움에 낼 작품 중 비슷한 걸 준비해 뒀으니까. 곧 줄게.”
“진짜?”
“당연.”
“저거보다 더 괜찮은 걸로?!”
유독 이젤에 있는 그림을 강조했다.
“무조건 괜찮은 걸로 해줄게.”
“알았어. 앞으로 작업 활동할 거라면 내게도 검사 맡아. 꼭!”
다음엔 절대 작품을 뺏기지 않겠다는 윤희의 각오가 두 주먹에서 느껴졌다.
얼굴엔 다음엔 무조건 용서하지 않을 거란 독기마저 내비쳤다.
“......하하.”
한강은 가볍게 웃으며 불을 켠 상태로 거실로 나갔다.
“배고프다.”
“으휴.”
잘생긴 얼굴로 말하는 남편의 모습에 올라온 열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살인미소에 화가 꺾인 윤희는 한강을 욕실로 던져 놓고 주방으로 향했다.
“잘난 남편 둔 것도 피곤하네.”
윤희의 입에서 작은 불만이 흘러나왔지만, 입가엔 행복에 취해 헤어나올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