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25살, 미래 자동차 디자인
[대전 엑스포 매일 1300만 원 날리다. 03년에 접어들어 50억 원의 적자를 낸 대전 엑스포는 04년 45억 적자를 냈다. 적자는 줄지 않고 늘어 날 전망이다.]
[대전 엑스포 만성적자에 시달려, 06년 재활자금 1200억 원에도 불구하고 경영적자 누적으로 현금자산 중 512억 원 상당의 결손처리......]
“엄청나구만.”
김동진 비서실장이 모아온 기사들을 모아서 봤다.
매년 적자를 기록하는 대전 엑스포에 국민들의 세금이 새어나가고 있었다.
국가 단위로 따지면 그리 큰 손실은 아니지만, 기업 입장에서 보면 매우 큰 적자였다.
“어디 보자......”
『면적: 902,479.339㎡, 27만 평.』
“오! 이거 우리가 목표로 한 면적과 같은데.”
시야로 들어온 ‘면적’란에 크게 반색했다. 예상보다 적으면 어쩌지 생각을 하였는데.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
“평당 400만 원이면 필요에 따라 부지를 더 매입해 설계를 변경해도 되겠고...... 확실히 이 지역에 프리미엄 아울렛까지 들어서게 한다면......”
93년 화려하게 개장했던 대전 엑스포는 구시대 유물로 전락해 골칫덩이가 되었다.
사람의 발길이 뚝 끊긴 대전 엑스포는 있으나 마나 한 그런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대전시가 마련하지 못한 게 크지. 위치도 좋고 전망도 좋아. 직원들의 대이동이 문제긴 하지만, 기숙사 시설과 일정 기간 정착수당을 주면 괜찮겠지.”
직원들 문제는 이쯤하고, 문제는 역시.
“윤희인가? 어떠려나.”
자식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아내인 터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뭣하면 출퇴근 하는 걸로 하지, 뭐.”
그러길 잠시 이 또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왕복 5~6시간 정도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부르르르르르르.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시끄럽게 책상 위를 두들겼다. 전화가 온 것이다.
“장인어른이시네.”
핸드폰 화면에 ‘장인어른’ 이름이 떡하니 떴다.
“예, 장인어른.”
스피커폰을 틀어 전화를 받았다.
---오늘 나 좀 보자.
스피커폰을 통해 방 안에 울리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이건호의 목소리가 귀로 전달됐다.
“갑자기요?”
대뜸 시간을 내라는 장인어른의 말에 한강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네놈도 그러면서 뭘 또 갑자기야. 별일 없으면 나 좀 보고가.
강압적인 목소리 안에 ‘네놈도 그러면서, 나는 안 돼?’ 불만이 맺혔다.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한 한강은 볼살을 긁으며 장소를 물었다.
---3시까지 한식집으로 오거라.
“네, 그리로 가겠습니다.”
한식집이라 해 봐야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그 덕분에 상세한 주소를 물어보지 않아도 되었다.
“2시니까, 지금 움직여야겠네.”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움직일까 싶었지만, 늦어서 좋을 게 없는 탓에 바로 출발하기로 하였다.
“전 장인어른을 만나고 바로 퇴근할 테니 시간 되면 바로 퇴근하세요.”
비서실에 일정을 전달하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몸을 실었다.
스으윽, 내려가며 보이는 청담동의 전경을 응시했다.
***
육성그룹 사옥 회장실.
“미래가 요즘 급하긴 했나 봅니다. 나를 직접 찾아와 고개를 숙이고 말입니다.”
이건호의 콧대가 63빌딩으로 길게 이어졌다.
미래에서 직접 찾아와 허리를 굽힐 날이 올 줄 몰랐다.
“누가 고개를 숙였다 이러십니까? 부탁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에 정지섭은 눈을 부라리며 절대 아님을 확고하게 밝혔다.
“그럼 그냥 가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커험, 유 회장을 불렀는데, 바람을 맞힐 수야 있습니까.”
“내가 가면 되니, 바람은 아니지요.”
“끙......”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었다. ‘비서실장의 말을 너무 따랐나?’ 하는 후회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지금 발을 빼기도 모양새가 좋지 못했다.
체면을 구겼으니 뭐라도 가져가야 하였다.
“크크. 가시지요.”
이건호의 기분이 매우 좋아 보였다. 지금껏 본 것 중 제일로.
반도체 사업이 성공한 그 순간보다도!
지금의 시간을 맘껏 즐겼다.
꾸벅.
“사위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모양입니다.”
출입구에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참 부지런합니다.”
정지섭은 순수하게 감탄을 하였다. 장인의 말도 있다 하지만, 그도 한 기업의 수장.
지금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아무도 무어라 할 사람은 없었다.
“녀석이 변태 같은 기질이 있어, 좀 그렇지만 약속에 꽤나 철저합니다. 한 번을 시간에 늦은 적이 없어요.”
말은 그리해도 사위에 대한 애정은 잔뜩 묻어났다.
“......”
안으로 걸음으로 옮기는 이건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정지섭의 눈에 부러움이 가득했다.
‘완벽한 패배구나..... 패배야.’
세상에 그런 사위는 다시 없을 터.
오늘만큼 이건호가 부럽게 느껴지기 처음이었다.
“오셨습니까. 장인어른. 그리고...... 정 회장님도 오셨군요.”
밖에 대기하고 있는 이들로부터 ‘이건호 회장님과 미래그룹 정지섭 회장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메신저로 연락을 받았다.
의외의 인물이 합석해 궁금증이 일었지만, 궁금증은 잠시 뒤로 미뤘다.
“요즘 잘 나가는 유 회장님을 뵙습니다.”
한리버의 위세는 미래 그룹의 위에 있다. 이건호와의 관계와 재계 선배라 한들 자세를 낮출 필요가 있었다.
“오늘 보자는 이유가 셋이 할 말이 있어 불렀다.”
이건호가 오늘 자리를 마련하게 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정 회장님께서 저를 보자 하신 이유가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자리에 앉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여유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출출한데, 식사부터 하고 말하도록 하리다.”
정지섭이 한발 물러났다.
“하하, 그러세요. 장인어른은 고기 드시면 안 됩니다. 혹시 몰라 생선과 오리를 시켰습니다.”
“......네 이 녀석.”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입니다.”
“그것도 한두 번 아니냐.”
“안 됩니다. 계속 그렇게 하시면 소금 간도 빼달라 이르겠습니다.”
“......끙.”
모처럼 맛난 음식을 먹는다는 생각에 기대를 잔뜩 하였는데,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요즘 고기다운 고기를 못 먹은 지 오래되어 미각을 잃어가는 기분에 우울감이 찾아왔다.
“전부 다 장인어른을 생각하는 저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네놈도 고기를......”
“전 아직 젊습니다. 장인어른 덕분에 집에서도 건강식을 열심히 먹고 있어 괜찮습니다.”
“......”
재벌 가문의 대화치고 꽤나 유치한 공방전이 치러졌다. 둘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본 정지섭은.
‘허허, 내 자식 놈이나, 사위 놈보다 낫구나. 이 회장이 근래 들어 기력을 회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어.’
정지섭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정확히 이건호의 배를 바라봤다.
나잇살이라 하여 불룩하게 튀어나와 빵빵하던 셔츠는 20대 당시에 보던 몸으로 돌아가 있었다.
피부도 좋아지고, 자주 들르던 병원도 차츰 줄어 재계에는 이건호의 건강비법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였는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건호의 건강비법은 다른 것도 아닌 ‘유한강’에 있었다.
괜히 왔나 싶을 정도로 배도 아프고 부러움이 가중되어 갔다.
‘왜 나에게는 저런 행운이 아닌 마가 낀 걸까?’란 생각마저 들어 앉은 자리가 너무도 불편하게 다가왔다.
‘그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회사에 입사를 시켰어야 했는데... 약아빠진 늙은이!’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미술에 모든 걸 투자해 한강을 데려오고 싶었다.
“크흠.”
더는 보기 거북해 참지 못하겠다.
헛기침으로 불편한 심기를 슬쩍 내비쳤다.
싱긋.
‘저 노망난 늙은이가!’
지섭은 보았다. 자신을 응시하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 이건호의 모습을.
저건 분명한 승리자의 미소였다.
‘완벽하게 졌구나.’
다 늙어 주책이라 욕먹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건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 유형이 아니었다.
“이게 내 거라 이 말이지. 잘 먹지.”
이건호는 보란 듯이 오리고기를 뜯어 입에 가져가 오물오물 씹었다.
정지섭은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넘기며 ‘나도 반드시 살 뺀다’ 부러움을 투지로 바꿔 살을 빼고자 하였다.
“다 드셨나요?”
이십여 분이 지난 시간, 음식을 먹는 속도가 줄었다.
숟가락이 아닌 컵을 들어 차를 마시는 둘의 모습에 식사가 끝났음을 알 수 있었다.
“잘 먹었다.”
“잘 먹었습니다.”
입에 가져간 찻잔이 상 위에 내려졌다.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음을 눈빛으로 알려왔다.
“그럼 이제 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어떨까 싶은데.”
이건호의 건강문제로 옆길로 새면서 흐지부지된 주제를 가져왔다.
“그러지.”
이건호의 시선이 옆으로 이동했다.
정지섭에게 목적을 말하라 신호를 주었다.
“이 나이를 먹고 늘어난 게 눈칫밥이 될 줄 몰랐습니다. 허허.”
시작은 가볍게 웃으며 들어갔다.
“편히 말씀해 주세요. 경청하겠습니다.”
한리버와 관련이 없는 정지섭 회장이 무슨 일로 자신을 찾은 건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하여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살폈다.
“몇 년 전 유 회장님의 첫 미술전시 당시 했던 말, 기억하십니까?”
“......?!”
그때 무슨 말을 했더라? 몇 년도 더 된 이야기를 지금 꺼내니 기억이 날 리 만무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당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는지 말씀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골똘히 생각을 해보던 한강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아 시선을 앞으로 고정했다.
“음......”
차마 직접 입을 열려니, 입술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미래그룹 회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말하지요. 그 당시 육성이 경성 자동차를 인수해 운영하던 때였습니다.”
아......!?
자동차 이야기가 나오자 한강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강은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잠시 기다렸다.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한 거라 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지만, 당시 미래 자동차를 위해 자동차 디자인을 하나 뽑나 주기로 하셨지요.”
미래 자동차 입장에서 볼 때, 이건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 기업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해 경쟁자라 볼 수 있는 이에게 도움을 구하는 모습은 다시 없을 구경거리였다.
증거로 정지섭 회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맞아, 분명 그랬지. 그런데 왜 내게 저런 부탁을...... 미래에서 디자이너들을 대거 섭외해 좋은 디자인을 뽑고 있을 텐데......?!’
아무리 급하다손 치더라도 경쟁자인 회장에게 디자인을 맞긴다는 게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사 당시 그런 약속을 하였다 치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그것도 우리 전기차 기술진들을 빼돌리려 하였으면서...... 음...... 어쩐다?!’
한강의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쉽사리 결정을 하기 힘들었다.
“이왕 이리된 거 솔직히 말씀을 드리지요. 사실 우리는 이름을 알린 유명 디자이너들을 섭외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중 독일의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기 위하여 투자를 하였지요. 결과는 아주 보기 좋게 차이고 말았습니다.”
예......?!
그게 무슨??
피터 슈라이어는 진즉 미래 자동차로 들어가야 맞았다. 그런데 그가 아직도 미래 자동차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가 그러더군요. 미래가 아닌 한리버에서 일을 해보고 싶다고. 허허.”
“......”
그제야 일이 어떻게 흐르게 된 건지 이해를 하였다.
‘나로 인해 역사가 바뀌었구나. 하긴 피터 슈라이어의 시작이 미래가 아닌, 경성이었으니......’
경성 자동차의 역사를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경성이 한리버로 인수가 되면서 피터 슈라이어는 운명의 이끌림에 한리버를 선택하였을지도 몰랐다.
‘이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책임을 져야 할까? 아냐. 전생과 현생을 엮지 말자.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렇다면......
‘이득을 좇는다.’
고민으로 깊던 눈동자가 맑아졌다.
한강의 두 눈동자가 정지섭 회장에게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