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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173화 (173/237)
  • 173화. 24살, 짝꿍

    검은색 승용차에서 내려서 뒷문을 여는 남자에게 시선을 가져가 동공을 확장했다.

    “박호경......?!”

    기억을 좇아 경기 초등학교 다니던 당시로 걸어갔다. 장난도 치고 함께 웃다가 졸기도 했던 시절로.

    [아빠 일 때문에 이사 가.]

    외환위기란 해일을 정통으로 받아버려 재기에 실패한 이후, 연락이 끊겨 버린 짝꿍이었던 박호경.

    크게 활발하진 않았지만, 웃음은 많던 아이였다.

    “그때의 풋풋함은 사라진 얼굴이지만, 확실해.”

    한강의 걸음이 그쪽으로 향하려는 순간.

    호경과 시선이 맞닿았다.

    아......

    호경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도망치려는 시선을 잡고자 하였지만, 호경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유 회장님, 그리 빤히 보시면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디제이 그룹 이맹호 회장의 아들, 이고진 대표가 한강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와 알은척을 하였다.

    아무래도 한강의 시선을 오해한 거 같다.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육성과 연을 맺은 한강에게 있어 디제이 그룹도 가족이라 봐도 무방하나, 왕래가 없으니 남이나 다름없었다.

    한강은 가족과 남이란 애매한 위치에 서서 다가온 이고진을 웃음으로 반겼다.

    “2년 만인가요.”

    눈가에 생기는 주름. 고진은 한강의 손을 잡고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워낙 바쁜 몸이라 찾아뵙질 못했습니다.”

    사업적으로 접전이 없어 만날 일이 드물다. 이런 날이 아니면 볼 일이 없었다.

    “알지요. TV로 소식은 수시로 접하고 있습니다. 우주항공사업을 하신다고요? 정말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한강의 눈이 슬쩍 옆으로 옮겨져 차량에 대기하고 있는 박호경에게 향했다.

    자신을 보기 무척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알은척하면 부담이려나......’

    이해를 못 하는 바 아니나, 즐겁게 대화하던 시절이 떠올라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비슷한 위치라면 모를까, 서로가 다른 위치에서 보게 되면 누군가 한 명은 위축되기 마련.

    일단 모른 척, 넘기기로 하였다.

    이게 잘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단둘이 자리를 가지게 된다면 그때......

    “들어갑시다.”

    고진은 왼손을 앞으로 뻗어 안으로 들어가자 주문을 하였다.

    ***

    부릉!

    “언제 끝날지 모르니,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게.”

    “......”

    뒷문에서 나오는 남자의 말에 몸을 직각으로 굽혀 대답을 하였다.

    “저거 유 회장 아닌가.”

    움찔.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굽히고 있던 20대로 보이는 남자는 몸을 움찔 떨었다.

    발걸음이 멀어지고 허리를 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려 ‘유 회장’이라 불린 남자에게로 시선을 가져갔다.

    “넌 갈수록 빛나는구나.”

    어린 시절부터 평범이란 걸 모르던 친구.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과신하던 어린 시절 친구를 떠올리며 입가에 씁쓸함을 머금었다.

    “아차.”

    그때 유 회장과 눈이 맞닿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하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도 높은 자리에 올라 있는 친구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니 너무도 처량했다.

    외환위기 당시 미납으로 묶여 있던 어음들이 모두 쓰레기가 된 순간 아버지의 사업은 힘없이 붕괴가 되었다.

    빚에 허덕여 도망 다니는 게 일상이라 할 만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스스로의 선택으로 현생을 등진 아버지. 그렇지 않아도 힘든 집안은 더욱 어렵게 변하였다.

    엄마와는 연락이 안 된다. 동생과 함께 친척 집에서 생활을 하다, 초등학교 시절 알고 지내던 친구의 추천.

    [너 1호차 몰았다 했지? 아시는 분 계시는데, 너 기사 해보지 않을래? 월급도 나쁘지 않을 거야.]

    어린 나이라 가능할까 싶었는데 이쪽과 가까운 친척 사이었던 금수저 친구. 녀석의 추천으로 기사가 되었다.

    일반회사를 다니며 생계를 이어가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액의 연봉을 보장받았다.

    “생각을 지우자.”

    한강과 알은척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

    한강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현실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마을은 잔치 그 자체였다. 어르신들이 나와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고.

    쿵! 쿵!

    현란한 움직임으로 북을 두들기는 사람들은 흥겨움을 더해주며 어르신들의 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꽤 개갱깽 꽤 갱!

    꽹과리 소리와 어우러지는 장구 소리가 하늘을 두들기며 행사의 맛을 살렸다.

    “이 대표님, 운전기사 말입니다.”

    볼거리를 구경하며 떨어지지 않고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고진에게 참고 있던 부분을 언급했다.

    “아, 제 운전기사를 보셨군요. 많이 어리죠.”

    30대 이상이 운전기사로 있기 마련인데, 어린 친구가 기사로 있는 건 무척 특수한 경우였다.

    고진도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활짝 웃었다.

    “지인의 부탁으로 기사로 채용했어요. 어린 친구지만 부지런하고 일도 잘합니다. 길눈이 어찌나 밝은지. 전에 있던 기사보다 훨씬 괜찮기도 하고, 저 또한 젊어진 기분이라 잘 뽑았다 싶은 녀석이에요. 그러고 보니 그 친구도 경기초를 나왔다고 했는데......”

    기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던 고진은 문득 떠오른 기억의 파편을 맞춰 끼우며 한강을 응시하며 말끝을 흐렸다.

    “혹시 이름이 박호경인가요?”

    “아, 맞아요. 역시 아는 사이였군요. 허허.”

    역시라는 생각에 손바닥을 짝 쳤다.

    “그렇군요. 잘못 봤나 했는데.”

    “어떻게 아는 사이십니까?”

    “저학년 당시 짝꿍이었어요.”

    “아, 그랬군요. 많이 친했습니까?”

    한강의 위치가 있기에 질문이 조심스럽다. 고진은 기사에 대한 처우를 달리해야 하지 않을까, 조심히 생각을 하였다.

    “네, 친했지요.”

    많이 친하진 않았다. 짝꿍인 만큼 가깝게 지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한강은 대충 그의 사정을 알기에 친하다고 표현을 해주었다.

    아무리 재벌이고 콧대가 높다 하더라도 등급에 맞는 라인이 있다면 행동에 조심하거나 좀 더 챙겨주기 마련이다.

    “허허, 그랬군요. 혹, 요즘도 연락하십니까?”

    “그 녀석 집이 어려워져, 연락이 끊긴 지 좀 됐어요.”

    “음...... 그렇군요. 하긴, 그때 다들 어려웠던 시기이니.”

    “잘 좀 부탁할게요.”

    “당연하지요. 회장님의 일이면 제 일이기도 하지요. 하하.”

    고진은 한강과 좀 더 가까워질 거리가 생기자, 눈을 반짝이며 한강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둘의 대화는 쉬지 않고 한 시간이 넘게 쭉 이어졌다. 대체로 고진이 물어보고 한강이 답을 하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어.”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복귀하는 시간, 윤희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거기서 초등학교 친구를 만났는데, 이 대표님 운전기사를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잘 좀 봐달라 했어.”

    “그랬구나.”

    무언가 짐작이 되었는지, 윤희는 고개를 흔들고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경기 초등학교면 최소가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집안의 자녀들이 다니고는 하는데, 운전기사로 있다는 소리는 어떤 사연이 있다는 의미이기에 여기서 끝을 냈다.

    “아, 피곤하다.”

    윤희는 대화를 끝내고 한강의 어깨를 기대어 잠을 청했다.

    버스는 도로를 달려 서울로 향했다.

    ***

    “박 기사.”

    서울로 복귀하는 길, 고진이 운전대를 잡은 호경을 불렀다.

    “네, 대표님.”

    “유 회장과 동문이라며.”

    “아, 네......”

    효경은 깜짝 놀랐다. 백미러로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고진은 쓰게 웃었다.

    “왜 말하지 않았나?”

    “그, 그게......”

    호경은 말을 버벅거렸다.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머리가 백지가 되어 어떤 답도 찾지 못하게 만들었다.

    “유 회장이 그러더군. 잘 부탁한다고. 이건 유 회장 번호니까, 연락해봐.”

    “가, 감사합니다.”

    내미는 명함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달리는 차 안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앞으로 특수한 관계에 있는 친구가 있다면 숨기지 말고 그냥 말해.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네......”

    호경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긴, 내 조카와도 아는 사이니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네. 난 한숨 잘 테니, 도착하면 깨워주게.”

    민망해하는 호경의 얼굴을 보며 고진은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

    호경의 집안에 대해선 조카에게 들은 고진이다.

    더 말을 꺼내 호경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기로 하였다.

    ***

    땡땡땡.

    새해를 알리는 종이 온 세상에 퍼졌다. 사람들은 동해로 발걸음을 옮겨 새해 소망을 빌며, 새로운 해를 반겼다.

    이재진은 결국 아내와 합의 이혼을 하였다. 이재진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이 연일 인터넷 포털 기사에 오르내렸다.

    한리버의 전년 동월 매출이 기대 이상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안드로이드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국민주로 떠오르기 시작한 한리버는 약 1년간 내실을 다지며 부족하던 직원을 채용함으로 더욱 단단해진 기업으로 성장했다.

    “올해 가요제는 제법 실력 있는 가수들 섭외해서 크게 해보는 건 어때?”

    MBS 예능 피디가 07년도 가요제를 떠올려 의견을 냈다. 당시엔 고정 멤버로만 이뤄지던 걸, 이번엔 조금 더 투자를 해 진행해 보기로 하였다.

    “나쁘진 않은데, 위에서 허락해 줄까요? 제작비가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작가가 조심히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슬슬 시청률이 올라 제 몫을 하고 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 의견은 반대요. 나쁘지 않을 거 같아요. 무도 맴버들과 가수들이 콜라보로 무대에 오르면 사람들의 관심이 더 높아질 거라 봐요.”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손을 들어 피디의 편을 들어 주었다.

    개그감과 프로들의 노래. 한 번에 두 가지를 잡으니,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로 여겨졌다.

    “그럼 다수결로 해보자.”

    무한 도전의 시청률을 확 끌어올릴 수 있는 프로젝트를 가요제에 찾았다.

    피디는 의견이 분분하자 다수결에 맡기기로 하였다.

    “찬성이 많네.”

    찬성과 반대표가 섞인 가운데, 찬성표가 반대표를 이겼다.

    “그럼, 시행하는 걸로 하고 게스트를 누구로 할지 정해 보자.”

    프로젝트가 정해졌다. 피디는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가, 어떤 가수와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할지에 대한 회의가 진행됐다.

    “저, 아주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이건 어떤가요.”

    한참 회의가 진행하던 때, 모자를 쓴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이번 가요제에 아이 윤과 한리버......”

    남자는 자신이 생각한 아이디어를 꺼내며 여기서 얻어지는 효과를 일목요연하게 털어놔 사람들을 설득했다.

    사람들은 남자의 말에 빠져들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좋아, 거기까지 하자.”

    “수고하셨습니다!”

    연습이 끝났다. 지윤은 건조해진 목을 물로 축축하게 적시며 목 관리에 들어갔다.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매니저의 주머니에서 지윤의 노래가 들려왔다.

    핸드폰 벨소리였다.

    [010-XXXX-XXXX.]

    “누구지?”

    등록된 번호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다 전화를 받았다.

    “한리버 박서진 매니저입니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MBS 무도팀 피디 김지경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피디님.”

    서진의 몸이 급히 아래로 숙여졌다. 앞에 아무도 없지만, 서진의 눈에는 바로 앞에 김지경 피디가 서 있는 걸로 보이는지 모르겠다.

    ---다름이 아니라, 무도에서 진행하는 09년 가요제에 지윤 씨와 함께하고 싶은데 어떠신가요?

    “네?!”

    매니저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지윤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기회로 여겨졌다.

    매니저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가 이어질 때마다 입가에 머무른 미소가 진하게 변해갔다.

    그러다 끝에......

    “네에?! 회장님을요?!!”

    매니저의 악 소리가 연습실을 꽉 채웠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눈이 매니저에게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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