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22살, 끝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방 안에 모인 소속 배우들을 보는 이재영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분노를 극도로 참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더는 대표님을 믿고 일하지 못하겠어요. 소송을 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이들의 대표 격인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이지영이 가시 돋친 음성을 이재영에게 전했다.
“이 X년이, 너 미쳤어!”
동시에 이재영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터졌다. 시베리아 한기가 방을 지배했다.
으드득.
이지영의 눈빛이 살벌하게 변했다.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따 삿대질이야! 당신만 욕할 수 있는 줄 알아!’
속으로 수어 번 외쳐보지만, 역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욕먹은 건...... 퉁칠게요. 안녕히 계세요. 애들아 가자.”
지영은 심호흡을 하고 등을 돌렸다.
더 있다가 정말 사고라도 칠 거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저, 저 미친X이! 저 X 잡아!”
이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지영에게 달려들던 때.
“대표님. 안 됩니다.”
가까스로 김조한이 나서 몸으로 막았다.
“안 놔! 너 미쳤어!”
이재영의 정신은 뜨겁게 타올랐다.
앞을 막아서는 김조한의 등을 두 주먹으로 강하게 때렸다.
하지만, 김조한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표님, 지금 손을 댔다간 일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대표님.”
5분여 시간이 지났을 즈음.
이재영을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크아!! 내가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깨끗하게 정리됐던 방이 다시 한번 난장판으로 변했다.
차마 김조한에게 던지지 못하고 모든 잡동사니를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 끝났구나.’
방송국도 그 어느 곳도 유 에스지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았다. 모든 줄이 끊겼다.
한리버가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예고된 일이었는지 모르겠다.
시작은 강하게 나갔지만, 대기업의 힘은 강대했다.
김조한은 폭력적으로 변하는 이재영을 조용히 바라봤다.
***
육성그룹 사옥.
“유 에스지는 곧 부도처리 될 겁니다.”
김종식 비서실장이 유 에스지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했다.
“고 녀석이 나서지 말라 했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도움을 준 녀석이야. 확실하게 해주는 게 좋겠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한강에게 상당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장난을 그냥 다 받아 주었다.
재롱 정도가 적당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나름 아끼기도 하였고.
알게 모르게 이곳저곳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돈과 관련된 건 전부 막아 버렸다.
“유한강 회장이 알면 뭐라도 주려 하겠습니다.”
“녀석이 알지 못하게 해. 괜히 걸려서 부담 주지 말고. 녀석의 성격상 또 시끄럽게 할 게 뻔하니까.”
“알겠습니다.”
딱히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 이건호는 한강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했다.
***
[유 에스지 소속 연예인 강제 이탈, 대체 무슨 일?!]
[모든 배우에 위약금 세 배 요구하는 이재영 대표, 정다민의 절차를 밟다.]
[오디션 합격자 중 계약한 연예인 0명으로 알려져......]
“시끌시끌하네요. 그쵸?”
한강은 의자를 돌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 유 에스지에 있던 연예인들이었다.
“......”
“......”
모두 긴장해 말이 없었다. 한강은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섰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법원이 뭐라 하든, 이재영 대표가 뭐라 하든. 급하게 돈을 마련해 건넬 필요 없어요.”
“그렇게 하면 정말 그 회사 없앨 수 있나요?”
“물론이죠. 올라온 얘기를 듣자면 그 회사로 흘러가는 돈이 모두 막혔다네요. 이대로 좀만 버틴다면, 유 에스지는 부도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이재영 그 사람은 빚쟁이가 되어 도망 다니게 될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버텨 보겠어요.”
지영은 나오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사람이 썩은 건 알았지만, 직접 겪게 되니 얼마나 썩은 인간인지 알게 됐다.
“어려운 부탁해서 미안해요. 생활비는 이쪽에서 티 나지 않게 현금으로 지원하게 될 거예요. 계약은 유 에스지가 완전히 주저앉을 때, 그때 여러분과 계약을 진행할게요.”
지금 계약을 하게 되면 유 에스지에 돈이 들어가게 되는 걸 떠나, 복잡한 다툼을 해야 한다.
그걸 막기 위해 생활비를 현금으로 지원하는 한편, 유 에스지가 유리하도록 만들지 않기 위한 선택을 하였다.
“아, 아니에요.”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함께 자리한 다민을 믿었고, 유한강이란 이름값을 믿었다.
“그때까지 집에서 기다려 주세요. 모든 문제가 해결되면 부를게요.”
“......네.”
“다민 씨 역할이 중요하겠네요. 모두 잘 보살펴 주세요.”
모든 돈은 다민을 통해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될 터다. 다민은 동생들을 돕겠다는 이유가 깔리고, 한리버는 소속 연예인 관리를 위한 투자라 말하면 그만.
나름 철저하게 짜여졌다.
“그럼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하죠.”
떨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그들로선 힘든 일이겠지만, 다민이 있어 최소한의 쿠션 역할을 해줄 수 있으리라 봤다.
“은행에서 유 에스지 대출을 막았다고요?”
사람들이 나가고 동진과 둘이 있는 자리.
한강의 두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렇습니다.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습니다.”
“왜 그런다 보시나요?”
“유 에스지 자금 상황과 방송국 출입이 제한된 것도 있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기업에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게 이유입니다.”
“호오......”
은행이 미쳤나?
너무 뜬금없기도 하고, 전쟁에 이르기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겪으니 황당하기도 하였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끝나겠네요.”
일이 너무 쉽게 진행된다. 과정은 조금 복잡했지만, 결과는 애초에 계획된 것보다 빠르게 나올 거 같았다.
기업에 있어 가장 무서운 게 은행들의 자금 회수에 있다.
만기를 막지 못하면, 기업은 부도를 맞이하게 된다.
아주 기본적인 현상.
“우리는 지켜보도록 하죠.”
더는 한리버가 할 만한 일은 없었다.
본래 물고 늘어질 참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진행이 되니.
딱히 뭔가 더 할 건 없었다.
“아, 그 누구지? 이재영 대표를 따라다니는 그 사람......”
“김조한 전무 말입니까?”
“그 사람 매수할 수 있으면 해보세요.”
“이재영 대표의 최측근이라 힘들 겁니다.”
이재영의 그림자 김조한은 제법 유명하다.
그렇기에 매수가 어려울 걸로 내다봤다.
“그래도 해보세요. 제가 살아 보니까,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더라고요.”
2006년이라 하지만, 90년대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공무원들조차 뒷돈이 만연한 세상.
작은 기업의 경영진 정도면 충분히 매수가 가능하리라 봤다.
피를 나눈 형제도 돈 앞에선 견원지간이 되는데, 그게 안 될까.
세상에 자신과 같은 사람은 몇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의리를 지키고 신념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알겠습니다.”
김동진은 한강의 지시를 받고 밖으로 나갔다.
***
저벅저벅.
“하, 힘들구나.”
몸이 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등과 팔, 다리 등이 이재영의 발길질로 멍이 들었다.
“후우......”
처음엔 이러지 않았는데, 사업이 탄력을 받고 커지면서 대표가 많이 바뀌었다.
거칠어지고 난폭해지고.
자신도 돈이 좋아, 그의 뒤를 따랐지만.
“쓰읍......”
[다 아빠 때문이야! 아빠 때문이라고!]
딸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렸다.
“하아......”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딸, 유 에스지의 더러운 오물을 먹고 사는 집이란 이유였다.
월드 플레이와 TV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 중 한 명.
늘 방송은 유 에스지를 양아치 회사로 소개했다.
방송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게 아닌, 사기 계약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식으로 회사를 소개했다.
“그 말도 잘못된 건 아니지.”
실제로 광고계에서도 계약한 연예인과 계약을 종료하겠단 통보를 보내오고, 모든 방송에서 배우들이 통편집 당하고 있었다.
유 에스지가 당장 기댈 건 투자와 대출인데, 이 두 길마저 막혀 상당히 어려운 길을 걷고 있었다.
“......”
집 앞에 도착했지만, 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않았다.
『악덕 유 에스지는 물러가라!』
언젠가부터 낙서와 전단지가 사방에 부착되어 있었다.
“김조한 전무님.”
종이를 떼고 주머니 안으로 챙길 때,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으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처음 뵙습니다. 김동진입니다.”
그의 앞에 등장한 이는 한리버 김동진 비서실장이었다. 그의 주변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경호원도 함께 했다.
“당신이 저를 왜......”
풍채 좋은 경호원들과 함께 있으니, 김조한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나쁜 일로 들린 건 아닙니다. 전무님의 협조를 구하고 싶어 찾았습니다.”
겁을 집어먹은 상대를 보며 김동진은.
‘들었던 얘기와 너무 다른데’
하며 조금은 실망한 얼굴이 되어 상대를 살폈다.
“한리버에서 저에게 어떤 협조를 원하시는지......”
“잘 아시리라 생각했는데, 돌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유 에스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심스러운 정황을 포착해 말입니다.”
“......?”
“정다민 씨 돈을 개인 용도로 사용해, 수감 중인 매니저. 그 사람이 사용한 돈 중 일부가 유 에스지로 흘러 들어간 걸 알아냈습니다.”
“무,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그 작자가 저지른 일과 우리랑은 관련이 없습니다.”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그냥 던져 봤는데, 물었구나’
김동진은 티 나지 않게, 확신에 찬 눈으로 김조한을 응시했다.
“전무님의 탓으로 돌리지 않겠습니다. 이 모든 건 이재영 대표가 한 짓인 겁니다. 우리는 유 에스지 이재영 대표가 반성의 시간을 가지길 바랍니다.”
“대체 한리버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는 한리버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습니다.”
정말로 궁금했다. 따지고 보면 전혀 무관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민을 영입하고 나서, 마치 원한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유 에스지를 잡고 늘어졌다.
“존재 자체로 피햅니다. 유 에스지로 망가진 기업의 이미지를 찾기 위해서라도 유 에스지는 없어져야 할 기업이 맞습니다.”
차갑고 냉정한 말.
김동진은 거리낌 없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그렇게 해서 한리버가 얻는 게 뭡니까?”
정말로 궁금했다. 자신이 알기로 한리버에서 이득 볼 일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잘해도 손해였다.
“없긴요. 있지요. 물론, 말씀은 드릴 순 없지만... 혹시 모르지요. 우리와 손을 잡는다면 말이죠.”
“......”
“집행유예로 끝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그에 따른 보상도 한리버에서 해드리겠습니다.”
“......”
김조한의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 상황에 달콤한 제안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 말씀......”
“한리버는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이대로 살기보다, 양심을 지키고 따님의 문제도 푸셔야죠. 아버지 된 입장에서 사기꾼 낙인이 찍혀서야 되겠습니까? 그 문제도 한리버 입장에서 도움을 드리지요.”
“......하겠습니다.”
딸의 말이 나오자, 결국 김조한은 고집을 꺾었다.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모르나, 적어도 김조한은 가족을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 선택, 조만간 잘하셨다 생각하실 겁니다.”
김동진은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손을 바라보던 조한은 이내 동진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