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22살, 유 에스지
“유 에스지에 대해 알아본바, 모두 노예계약과 불공정한 계약을 통해 소속 연예인들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정다민 씨뿐 아니라, 무명 배우들의 임금도 밀린 상태로 똑같은 수법으로 돈을 받아낸 이력도 확인했습니다.”
정다민과 유 에스지의 소송관계를 확인하다, 추가로 알게 되었다.
김동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한 얼굴이 되어 확인한 사실을 고했다.
“완전 썩은 곳이네요. 계약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길은 없던가요?”
“계약서가 완벽합니다. 소속사에 이롭게 되어 있어, 파고들 만한 부분은 없었습니다.”
미래와 달리 계약서에 대해 크게 민감하지 않은 시대다. 그나마 뉴스에서 연예인들의 노예계약이 기승이라며 떠들어 예전보다 조금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된 수준.
일반인들 중에서도 특히 어린 학생들은 닳고 닳은 관계자의 혀 놀림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언제나 달콤한 말 속엔 송곳니가 있음을 알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소송을 진행한다 하더라도 이길 순 없단 소리겠군요. 장기화로 밀어붙일 수 있을진 몰라도.”
“그렇습니다.”
“음......”
예상이야 했지만, 벼룩의 간의 간을 빼 먹으면서 안면몰수하고 살고 싶을까 싶다.
어떤 형태로 하여도 소속사에게 이로운 사항이었다.
“별수 없네요. 두 번째 계획대로 가시죠. 방송국 대표도 좀 만나봐야겠어요.”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유 에스지에 사업적 불이익을 주는 방향으로 가는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바로 네이컴과 더움에 해당 기사를 띄우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계획, 인터넷 언론의 힘을 이용하는 것.
그리고.
“유 에스지와 관련된 광고, 홍보 음반 등 모두 내리세요. 계정 정지도 하시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모든 것에 제한을 두기로 하였다.
악한 자는 그 이상으로 당해봐야 상처를 입은 자의 고통을 알게 된다.
한강은 이번 기회에 유 에스지를 제물로 삼아, 국내에 자리한 모든 기획사에 경고를 보내기로 하였다.
***
따르르릉.
“한리버 그룹 비서실입니다.”
바쁘게 키보드를 치던 손이 수화기로 향했다.
여직원은 시선을 화면에 걸친 채, 전화를 받았다.
“유 에스지요. 확인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연락처 남겨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작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받아 적고 수화기를 내렸다.
“방금 어디라고 했어? 유 에스지?!”
곁에 있던 직원이 물었다.
“네. 아세요?”
“거기 거기잖아. 얼마 전에 계약한 정다민이 있던 기획사. 막 소송도 하고.”
“아!”
그제야 얼마 전 기사로 내보낸 내용이 떠올랐다. 어쩐지 매우 익숙한 상호였다.
“거기서 뭔 일이래?”
“회장님을 직접 뵙고 싶다 해서, 확인하고 연락 준다 했어요.”
“그래, 다녀와.”
대충 무슨 일인지 파악한 직원은 신경을 끄고 시선을 모니터로 향했다.
“유 에스지 측에서 회장님을 뵙고자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여비서는 떠올린 기억으로 조금은 긴장한 눈으로 한강을 응시했다.
“제가 직접 만날 사람은 아닌 거 같네요. 월드 플레이 대표님께 일러서 과장이 대리 하나 보내라 하세요. 그리고 내 돈 싹 받아내라 하고요. 무.조.건.”
애초부터 그쪽과 안면을 틀 생각은 없었다.
질 나쁜 사람의 대우는 사람으로 대우해 줄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마른침을 삼킨 여직원은 지시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자, 어떻게 나오시나 보실까.”
한강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
지이이잉.
[02-XXXX-XXXX.]
핸드폰에 ‘02’ 번호가 떴다.
서울 전화였다.
“왔구나. 여보세요. 유 에스지 김조한 전무입니다.”
기다려온 전화임을 예측하고 목에 힘을 풀고 전화를 받았다.
점잖은 부드러운 목소리가 송화기로 흘러갔다.
“당연하지요. 장소만 정해 주시면 이쪽에서 찾아가겠습니다.”
조한은 마치 정면에 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굽신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얼굴엔 미소로 번들거렸다.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조한은.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겠어. 어서 대표님께 전달하자.”
핸드폰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걸음을 사장실로 옮겼다.
“한리버에서 오늘 보기로 했다고?”
“그렇습니다.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릴 걸로 보입니다.”
“시X, 이럴 거면서 사람 쫄리게 하고 있어. 그 선물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압박을 받고 있던 건 사실.
전무의 보고에 식은땀을 닦고 욕을 뱉었다.
“큰 거 한 장 준비했습니다.”
“그거면 됐겠지. 우리가 매수한 기자는?”
“먼저 자리를 잡고 있기로 했습니다. 돈을 받는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길 겁니다.”
“좋아. 그럼 가지.”
이재영은 한리버를 함정에 빠트려 곤란하게 만들기로 하였다.
자신에게 피해가 오겠지만, 한리버에서 갑질로 압박을 주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로 밀고 나가면 사회는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을 서줄 것이다.
이재영은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여기가 맞나?”
도착한 장소에 약속 장소로 짐작되는 근사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해봐.”
주소대로 왔는데, 이상하다.
보는 건 분식집이 다였다.
이상함에 전화를 해볼 것을 지시했다.
“잠시만......”
저장된 번호를 가져와 통화버튼을 눌렀다.
두.
통화음이 가고.
---여보세요.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근방에 도착은 한 거 같은데, 여기가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1층에 뭐가 있을지요?”
---아닙니다. 지금 밖에 나와 있습니다. 혹시 차량 넘버가 XXXX 되시나요?
“아, 맞습니다. 혹시......”
---여깁니다.
“......”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혹시, 가로수에서 손을 흔들고 계신 분?”
한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30대로 보이는 매우 젊은 남자였다.
‘시다바리라도 데려온 건가? 아니며 유한강 회장이 비밀리에 운영하는 곳?’
갖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맞습니다.
“......그...러지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지만, 딱히 꼬집고 들어갈 부분이 없어 고개를 갸웃하는 걸로 의문을 뒤로 미뤄 두었다.
“저 사람입니다.”
50미터 정도 거리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켰다.
“여기서 내리자고.”
“네.”
김조한은 주변을 살피며 이재영의 뒤를 따랐다.
“안녕하십니까. 유 에스지 전무 김조한입니다. 이분은 이재영 대표님이십니다.”
뒤를 따르던 조한은 남자가 있는 위치까지 도착한 동시에 앞으로 나서 자신을 소개하고 재영의 신분을 밝혔다.
“전 차용호 대리입니다. 이리로 오시죠.”
허리조차 굽히지 않았다. 간단히 소개 정도만 하고 몸을 돌렸다.
“......”
“......”
두 사람은 차용호의 행동에 이맛살을 구겼다. 이런 대접은 살아생전 처음이다. 그것도 훨씬 직급이 낮은 이에게.
“가지.”
기분이 나빠져 발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다. 하지만. 회사의 일이 걸려 있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고개가 숙여지는 김조한이었다.
“......”
“......”
도착한 장소에 둘은 황당함에 벙찐 얼굴로 먼저 자리에 앉은 남자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곳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간판을 쳐다봤다.
『김밥왕국.』
김밥 한 줄에 ‘3500원’.
여타 동네보다 비싸게 책정되어 있는 가격표를 경유해 차용호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뭐 하세요. 이리 앉으세요. 여기 라면이 참 맛있습니다.”
두꺼운 철판을 얼굴에 두른 천하태평한 모습에 황당함이 눈동자에 맺혔다.
머릿속으로 몇십 번이고 떠다니는 생각.
‘가고 싶다’
까득, 이건 명백한 무시였다.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훨씬 미치지 못하는 고작 대리에게 이런 대접이라니.
‘그런데 유한강 회장이 없다? 다른 사람도 보이지 않아.’
너무 황당해 이상함을 뒤늦게 눈치를 챘다.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저, 유 회장님과 다른 분들은 조금 늦으시나 봅니다?”
바로 폭발할 거 같은 이재영 대신 김조한이 나섰다.
“다른 분들은 안 오십니다. 제가 대표로 나왔습니다. 대화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차용호는 웃어 보였다. 악의 없는 웃음이었다.
“일의 중요도를 한리버는 모르나 봅니다?”
참다못한 이재영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러면 계획한 일이 틀어진다. 돈을 챙기든 안 챙기든 돈을 건네는 모습이 찍혀야 하였는데...
중요한 인물이 오지 않았다.
심지어 장소까지 문제.
탁 트인 좁은 공간에서 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민다면?
모든 게 좋지 못했다.
“뭐가 중요하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유 에스지의 입장을 들어보기 위하여 나온 겁니다.”
무시하는 듯한 말투에 차용호는 선을 그었다.
[네? 그런 자리에 제가 가라고요?]
[그래, 대표님 지시야.]
[아니, 부장님. 이런 건 최소 부장님이......]
[뭘 그래. 가서 좋아하는 라면이라도 한 끼 하고 오면 좋잖아.]
[심지어 가서 그 사람들 데리고 분식을 먹으라고요?]
[처음에 캔커피 얘기 나온 걸, 라면으로 바꾼 거야.]
[......]
[이참에 제대로 갑질하고 와봐.]
[부장님 그건 갑질이 아니라......]
‘이건 그냥 또라이잖아요.’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속으로 울음을 토했다. 오늘 일은 평생 기억에 남을 자리가 되리다 내다봤다.
“......여기 말고 저희가 아는 집이 있습니다. 그리로 가시죠. 결제는 저희가 할 테니 말입니다.”
꿩 대신 병아리다. 최소 한리버의 이미지를 깎아내릴 수 있을 터다.
작전을 바꾸었다.
“이곳이 마음에 안 드시나 봅니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차용호는 조금의 동요조차 하지 않고 둘을 쳐다봤다.
둘의 반응에 차용호가 물었다.
“제가 돈이 없어 이리로 온 걸로 보이시나요? 제가 알기로 유 에스지와 웃으며 밥을 먹을 사이는 아니라 보는데 말입니다. 이번 자리는 한리버가 아닌, 유 에스지의 요청에 만들어진 자리임을 잊지 마셨음 합니다.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차용호는 회사에서 보이던 행동과 달리 지금의 자리를 즐기는 걸로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게 직원과 사장이 멀리서 바라봤다.
“어린 노무 새끼가......”
결국 터질 게 터졌다. 화를 누르지 못한 이재영의 입에서 거친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듣지 못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아... 이래서 양아치랑 거리를 두고 다녔는데...”
차용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 걸어가 무시로 가득한 두 눈을 상대에게 던졌다.
“왜 때리시게?”
학교시절부터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자신. 합기도와 태권도를 배운 유단자.
이런 사람에게 꿀릴 이유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차용호는 이죽거리며 이재영을 쏘아봤다.
“대표님, 참으셔야 합니다. 장소가 좋지 못합니다.”
여기서 사고라도 쳤다간, 역으로 유 에스지가 언론의 공격을 받게 된다.
김조한은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대표를 막아섰다.
“이봐, 애송이......”
이를 아득 악문 이재영의 눈에 살심이 일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이 그에게 향했다.
“......”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다음에 날 보면 피해 다녀라.”
시발!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로 경고를 끝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 싸구려 냄새가 옷에 다 묻었네. 당신 일 이따위로밖에 못해!
밖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졌다.
“하아, 오늘 일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부장님......”
차용호는 밖으로 던지던 시선을 돌려.
“이모! 여기 라면 아주 맵게 해서 하나 주세요.”
자리로 돌아가 주문을 하였다.
쌓인 스트레스를 매운 걸로 풀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