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21살, 변하자
[육군 훈련소 비리 밝혀지다. 우리 자녀가 먹는 음식이 부족한 이유가 드러났다. 열악한 환경을 만든 군당국에 국민들이 나섰다.]
[부식 관련 업체에 단가를 높여 판매 후 이익금 중 일부를 훈련소 관계자 일부가 나눠 먹은 걸로 조사됐다. 최고 탑에는 육군 훈련소장이......]
└ 김두성: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
└ 고윤성: 급식병 나온 1인. 저거까진 모르겠고 간부들 식당 와서 달걀, 채소, 고기 다 가져감. 우리 먹을 거까지 가져가서 매일 재료 부족.
└ 이한수: 저거면 다행일지도... 난 간부회식 때 대신 고기 구워줌. 시X. 갑자기 그때 생각나서 열불나네.
└ 나도환: 모 간부 이사한 날 병사들 이삿짐 나름, 노동력 보상으로 피 보고 군인 새끼가 체력이 그거밖에 안 되냐고 욕먹고 내무실에 하루 종일 누워 있었음... 어떤 조치도 안 해줌.
└ 김일환: ㅋㅋㅋ 그것만 하면 양반이지. 시설과 자재 가져가서 개인용도로 사용함. 법인 사업자들이 회삿돈으로 별장 짓는 데 회삿돈 사용한 꼴.
훈련소의 비리가 낱낱이 세상에 공개됐다. 아직 영상 파일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기사 아래로 군에서 겪었던 부조리들이 쉴 새 없이 댓글에 달리며 군대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거세졌다.
국민 신문고 게시글엔 벌써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해당 건에 의하여 몰려들었다.
“...전역을 명 받았습니다. 충성!”
밖에서 소란이 일 때, 훈련소 안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갔다.
“......이제 정말 어떡하지.”
박수호 상병은 전역신고를 하고 씁쓸히 훈련소를 벗어났다.
목발에 지탱해 걷는 발이 오늘따라 원망스러웠다. 아싸리 죽는 게 낫지 않았을까? 생각마저 들었다.
우울한 기분을 이끌고 터벅터벅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후우......”
쉬지 않고 나오는 한숨 소리.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너무도 막막했다.
“박수호 씨.”
옆으로 검은 양복의 남자가 다가왔다. 근처에 위압감을 풍기는 남자들도 함께였다.
“누구...시죠? 어떻게 제 이름을......”
길을 걷던 걸음을 멈추고 정체 모를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꺾인 기운에 낯선 남자들이 다가오자 공포가 일었다.
두근두근.
떨리는 심장을 억제하기 쉽지 않았다.
박수호는 떨리는 시선으로 거리를 벌려 신분을 물었다.
“그리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마 전 퇴소한 105번 훈련병 기억하시는지요?”
박수호의 반응에 남자는 입가에 미소를 걸치고 익숙한 훈련병 번호를 읊었다.
“......?!”
박수호는 105번 훈련병이란 말에 한 사람을 떠올려 놀란 시선을 던졌다.
“표정을 보니 잊지 않고 있었나 보네요. 그럼 그분의 정체도 아시리라 봅니다.”
끄덕.
왜 모를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병원에서도 상당한 이슈로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기도 하였고.
“그분의 지시로 왔습니다. 전 유한강 회장님의 비서실장 김동진입니다. 앞으로 박수호 씨와 어머님 치료는 한리버에서 직접 맡기로 하였습니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뒷조사를 하게 돼 죄송합니다.”
모든 용건을 말한 김동진은 고개를 숙였다.
좋은 일을 하고자 알아본 정보지만 이건 엄연한 불법적인 행동이었고, 기분이 상할 일이었다.
김동진은 그가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모든 말을 마치고 사과를 하였다.
“아니, 그분이 왜 저를 돕는다는 거죠?”
박수호의 귀로는 뒷조사를 한 부분보다 이 부분이 더 의아하였다.
부대에서 만났지만, 그렇다 하여 친분이 있던 사이도 아니었다.
훈련할 때 얼굴을 보는 정도가 다인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회장님은 인간관계를 쉽게 보지 않습니다. 이 말을 전해달라더군요. 소속과 환경은 달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훈련한 것만으로 우리는 전우다 라고.”
“......”
목발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짜르르 울리는 ‘전우’.
늘 말만 전우라 했지, 전우라는 단어를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다 그러니까, 그렇게 했을 뿐이다.
거기에 특별함 따위 없었다.
그런데... 전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을 챙긴다고?
세상에 정말로 구시대적 발상을 하는 사람이 있던가.
“회장님께선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으십니다. 동의를 해주신다면 육성병원에서 최상급 치료를 받게 되실 겁니다. 재활까지 저희가 돕겠습니다.”
댕그르르. 결국 목발을 놓쳤다.
깁스한 다리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닥에 앉아 절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흑흑..... 정말로... 정말로 감사해요.”
외쳤다. 내려놔야 했던 모든 걸 다시 들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옥이라 생각했던 세상에 희망의 빛이 도래했다.
박수호는 쏟아지는 설움과 군에 대한 원망을 앉은 자리에서 모두 털어냈다.
***
[훈련소 내 녹음파일 공개... 목소리의 주인공은 24연대 김모 상사와 중대장으로 밝혀져.....]
“정말 고맙습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소주 한 잔 사주시지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김한석 소대장은 후련한 얼굴로 몸을 뒤로 젖혔다.
보던 신문을 책상 위에 아무렇게 올려놓았다.
철컥, 턱.
그때였다. 문을 열고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김한석 상사 당신은 상관 모욕죄 명령 불복종으로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 국방부 소속의 군대 내 방첩 업무, 군사기밀 보안 감시를 담당한다)에서 찾아왔다.
“빨리도 오는군.”
애초부터 각오하던 일이었다. 어떤 이유가 되었든 자신은 상관에게 욕을 하였고, 명령을 불응하였다.
심지어 군대 내 벌어진 일을 외부에 노출했으니, 책임을 져야 하였다.
“갑시다.”
각오를 해서 그런가, 아니면 정당한 일을 해서일까.
걸음이 무겁지 않다.
김한석은 기무사에 이끌려 소대장실을 벗어났다.
[육군 훈련소 24연대 소속 김한석 소대장이 상관 모욕죄로 군사재판에 넘겨졌다.]
얼마 가지 않아, 해당 기사가 떴다.
└ 배형수: 진짜 군대 개X같다. 옳은 말을 해도 잡혀가는 더러운 세상 ㅅㅂ.
└ 안준태: 진짜 군법이든 사법이든 헌법이든 법이란 법은 다 바꿔야 돼. 세상 진짜 더럽다. 도둑질시켜도 군대면 무조건 해야 하는 거구나.
└ 이기영: 광주사태가 대표적, 옳지 않은 일이라도 까라면 까야 됨. 개 같은.
김한석을 잡아간 군대를 욕하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군대에선 어떤 입장도 밝히지 않았다.
“정말 도가 지나치네요.”
기사를 보는 눈가 사이에 주름이 졌다.
군에서 보이는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은 탓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김동진은 이번 일을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했다. 군대란 사회와 또 다른 집단으로 그들만의 룰을 가지고 있었다.
민간인이 군대의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란 무리였다.
“어쩔 수 없는 일임은 맞지만, 힘을 쏟을 분은 계시죠.”
그래, 주변에 그런 힘을 가진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설마... 이 회장님이십니까?”
“제가 아는 분 중 그분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한국계 끝판왕, 기간제 대통령보다 더욱 막강한 영향을 끼치는 인물.
육성그룹 회장 이건호.
한강은 건호에게 이번 일에 대한 도움을 구할 참이었다.
“들어주실까요? 이번 일은 다른 일과 달리 무게 다릅니다.”
“저 또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게 맞겠죠. 원하시는 게 있다면요.”
“잘 풀리셨음 좋겠습니다.”
김동진은 한강과 지낼수록 성품에 빠져들었다.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분별하고 힘든 사람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번 만큼 돈을 쓰는 이가 바로 유한강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도 좋은 방향으로 잘 풀리길 바랐다.
***
신문을 보던 이건호의 입에서 쯧쯧 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안 드는지 이마엔 주름이 꿈틀댔다.
“대체 녀석은 뭐 하고 다니는 게야.”
[한리버 유한강 회장 수류탄 사망사고를 막은 일등 공로자. 군에선 어떤 보상도 없어.....]
[유한강 회장 수류탄 사고 피해자 박 상병의 치료비를 전액 부담키로 하면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지병을 앓고 계신 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박 상병의 처지를 알게 된 사람들은 구원의 손길을......]
아내에 자식까지 있는 녀석이 위험한 폭발사고에 휘말릴 뻔하였단다.
기사는 좋게 포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 숨은 뜻을 이건호가 모를 리 없었다.
“내 딸을 과부로 만들려 하다니...... 네 이 녀석을......”
이건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단순히 사람을 구한 게 아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일에 뛰어들었단 의미.
이 부분에서 이건호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건호는 핸드폰을 들어 한강을 호출하기로 하였다.
똑똑.
번호를 눌러 통화음이 흐르는 때.
딴따라 딴따라.
노크 소리와 함께 벨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으로 가져간 시선을 앞으로 이동했다.
“저 왔습니다. 장인어른.”
벨소리가 울리는 핸드폰을 든 한강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호는 어이없는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통화를 껐다.
“잘 왔다. 네 녀석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말이다.”
건조한 음성이 방에 흐른다. 한강의 얼굴에 처음으로 식은땀이 맺혔다.
“네... 장인어른.”
그렇다고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한강은 뚜벅뚜벅 걸어 이건호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이건호는.
‘역시 별종이야’
생각하며 말문을 열었다.
“기사를 봤다. 엄청난 일을 하였더구나. 수류탄 사고라고.”
“네.”
“사돈댁은 뭐라더냐?”
“아직 별말씀 없으셨습니다.”
“윤희는?”
“......어떤 말도 없었습니다.”
그제야 방 안의 분위기와 그에 대한 이유를 파악한 한강은 조금은 위축된 자세를 취했다.
“네 녀석에게 아무 일 없었으니 그러려니 넘겼을 것이야. 한데 말이다.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다치거나 죽기라도 했다면 어땠을까?”
이건호는 한강을 몰아붙였다. 그간 예쁘게 봐 너무 살갑게 굴었나 보다.
이건호는 이번 기회에 한강에게 위치에 대한 책임감을 확실히 심어 줄 생각이었다.
이러다 제 명에 다 살지 못하다 죽을 확률이 높았다.
“......”
한강은 어떠한 말도 하지 못했다.
이건호의 말이 백번 옳았으니까.
가족이 있음에도 당시 가족의 걱정보다 사고에 처할 사람들만을 신경 썼다.
반성했다.
“윤희는 과부가 되고 재석은 아빠 없는 아들로 키워지겠지. 네가 설립한 회사는 크게 흔들리게 될 거고.”
“......”
“네 녀석의 올곧음은 세상 사람이 다 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평판이 가족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 100명 200명이 피해를 봐도 네 가족보다 우선이 될 수 없어.”
이건호는 처음으로 한강을 꾸짖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다.
“알고 있습니다.”
한강은 반성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전생에도 그러다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앞으로 가족에 더 신경을 쓰리라 다짐을 하였다.
“이만하면 너도 알아 먹었겠지...”
더 말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충분히 자신의 뜻을 받아들였으리라 생각했다.
“다시는 위험한 일엔 달려들지 않겠습니다.”
날 선 눈빛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좋아. 그 말 내 잊지 않겠다...... 그 얘긴 이만하고, 말해 보거라. 날 찾은 이유를.”
고개를 숙인 한강의 모습을 조용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