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21살, 쇼팽 콩쿠르 본선
저벅저벅.
“잘해라.”
무대로 올라가는 길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마주했다. 그는 한강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고 대기실로 향했다.
“녀석하고는.”
어깨에서 달달한 향이 전해졌다.
“독해.”
코를 찡그리며 무대로 올랐다.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대를 가로질러 피아노가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끄덕.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주었다. 마에스트로(Maestro)의 지휘봉이 궤적을 그렸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연주가 시작됐다.
하필 전에 연주를 하던 곡인 피아노 협주곡 2번 라르게토가 홀 안을 채웠다.
‘나의 답가다. 미로슬라브.’
부담감 따위 없었다. 당장 머릿속을 채운 건, 그와의 순수한 승부와 집에서 응원하고 있을 사랑하는 윤희와 아들 재석이었다.
MC 유재석이 자신을 아빠라고 한 대목에서 입가에 웃음기가 흘렀다.
그 순간 마에스트로와 눈을 마주했다.
그는 말하고 있었다.
곧 너의 무대가 시작될 거라고.
지휘봉이 다시 한번 위로 휘둘러졌을 때.
딴!
따스한 여름날 새로운 사랑이 찾아왔다.
당시의 낭만이 두근거리는 가슴과 융합되어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두근!
객석에 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홍조가 가득하다. 당시의 첫사랑을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일본어 ‘로망’에서 음을 따온 ‘낭만’이란 두 글자가 가슴에 새겨진다.
사람들은 알까?
본래 의미는 로마적인 의미로 사용했음을.
딴.
연주는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렸다.
연주가 끝나가는데 사람들의 얼굴이 밝지 않다.
사랑하던 여인 콘스탄치아 그와코우스카와 반지를 교환하고 떠났지만, 쇼팽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되면서 영원한 이별을 맞이했다.
열아홉 살 당시 사랑하던 그녀를 위해 작곡된 곡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는 그녀를 정말로 사랑했다.
지금도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딴!
건반에서 손이 떨어졌다.
한강은 잠시간 눈을 감고 손으로 전달되는 진한 여운을 받아들였다.
하나 둘 셋, 고개가 위로 들려진 순간.
와!
짝짝.
박수갈채가 우레와 같이 쏟아졌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심사위원석에 앉은 이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갈채를 보냈다.
두근!
감동의 도가니가 홀을 채우니, 한강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무대 앞으로 나가 한강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퇴장했다.
“이번 대회는 가히 역대급입니다. 설마 2번이 1번보다 완성도가 높다 생각들 정도라니...”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본래 처음으로 만들어진 곡이다. 2번이 된 이유는 완성도가 떨어져 뒤늦게 발표를 하게 되면서 2번이 되었다.
덕분에 완성도가 높은 1번 곡을 연주하는 게 일반적.
그런데 15회 쇼팽 콩쿠르에 이변이 생겼다. 두 사람이 선택한 2번 곡이 1번 곡을 훨씬 앞섰다는 사실이다.
“정말 이번 대회는 아주 재밌네요.”
심사위원들 얼굴은 하나같이 즐겁다는 표정이다.
새로운 걸 찾아낸 아이들처럼 12인을 평가하며 순위를 정해갔다.
“이번 연주자들의 실력은 그간 봐온 연주자들 이상이었습니다. 대진운이 나빴다 보입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위 순위는 빠르게 정해졌다. 문제는 상위권 순위다.
심사위원은 골똘히 생각하다,
“제가 의견을 내도 되겠습니까?”
현 자리에서 유일한 아시아인인 남성이 손을 들어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얼마든지요.”
남자는 다름 아닌 한국에서 유일하게 심사위원으로 올라선 김채권이었다.
채권은 그간 조용히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먼저 저도 심사위원분들과 같은 생각입니다. 역대 최고로 대단한 연주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고민할 이윤 없다 봅니다. 우리가 매긴 점수는 피아니스트들의 순위를 정하는 이정표가 될 테니까요. 우리의 점수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봅니다.”
“허허, 맞습니다.”
“우리가 괜한 고민을 했습니다.”
“그만큼 두 사람의 연주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의미겠지요.”
김채권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리고 종이에 적힌 이름을 봤다.
유한강.
정말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유한강의 점수는......”
21명 심사위원들의 점수표가 들어졌다. 그리고 15회 쇼팽 콩쿠르 우승자가 정해졌다.
***
[심사위원 김채권 피아니스트,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았다. 모두 뛰어난 연주를 해주었다. 내가 심사를 맡아도 될지 고민마저 들었다. 모두를 일등 자리에 앉히고 싶은 욕심이 들 정도였다” 한국의 피아니스트들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 유한강 피아니스트는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멋진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심장을 두근거리게도 하고 아련하게 만드는 그의 연주 실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유한강 피아니스트에 엄지를 세우는 김채권 피아니스트는 유한강 피아니스트에 10점을 주었다.]
[제15회 쇼팽 콩쿠르 국제 피아노 대회 우승자는......]
“여기 봐주세요!”
주변이 소란스럽다. 플래시가 여기저기 터지며 공항을 빠져나오는 6인을 비췄다.
한 명을 빼고 모두 쑥스러운 얼굴로 자세를 잡았다.
“회장님 우승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콩쿠르에 이변이 찾아왔다. 한국 역사상 첫 우승자가 나왔다.
모두의 기대를 담고 유한강이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단 1점 차로 대상을 거머쥐었다.
덕분에 바르샤바 국립 오페라 대극장에서 시상식을 가지는 동시에 우승을 기념하는 앵콜 공연을 하였다.
한강의 가치는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모두가 함께 해주어 받을 수 있는 상이었습니다. 모두가 뛰어났고 2위를 한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에게도 감사합니다. 덕분에 더욱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시선을 여유로이 받아내며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한강은 허리를 숙여 깊이 감사한 마음을 전달했다.
“모두 수고했어요. 저의 콩쿠르는 여기까지지만, 여러분은 끝까지 달려가 주었음 해요. 고마웠어요.”
기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때,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뒤에 자리한 5인을 바라봤다.
쭈뼛하게 서 있는 걸 보아 카메라를 적응하기에 아직 멀어 보였다.
“감사했어요.”
“나중에 좋은 일 생기면 언제든 부르세요. 달려갈게요. 아, 슬픈 일도 마찬가집니다.”
지낸 시간은 짧지만 함께한 시간은 무척 값졌다. 한강은 그들과 약속을 나누는 걸 끝으로 각자의 길로 떠났다.
***
아바바바.
문을 열자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강은 신발을 벗어 던지고 아빠를 알아보고 손을 조몰락거리는 아들을 안아 들었다.
“아빠 보고 싶었져. 우쭈쭈.”
다른 게 아닌 이것이 행복이지 않을까.
꺄하.
방긋 웃는 아들을 보며 볼을 가져다 위아래로 비볐다. 아이의 침 냄새조차 달달하게 느껴졌다.
“축하해. 내가 배웅 나가고 싶었는데.”
“아냐, 이렇게 있어 주는 것만도 난 기쁜걸.”
윤희의 볼에 입맞춤을 하고 거실로 들어갔다.
“와우, 맛있는 냄새.”
들기름 향과 섞인 음식 냄새가 코 안으로 스며들었다.
“콩쿠르에 우승한 우리 남편 응원해주기 위해 솜씨 좀 발휘해 봤지. 배고프다. 어서 씻고 와. 밥 먹자.”
아들을 이동 침대에 내려놓고 욕실로 향했다.
한강은 기쁜 마음에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집에 왔음을 만끽했다.
따스한 온수가 피로를 말끔히 날려주었다.
“좋다.”
샤워를 말끔히 끝내고 수건으로 물기를 없애고 드라이기로 피부를 보송하게 만든 후 욕실을 나섰다.
“먹어봐.”
“와! 완전 대박인데?!”
더덕무침을 필두로 나물들이 식탁을 가득 채웠다. 중간에 연어까지 보인다.
“잘 먹을게.”
기쁜 마음을 잔뜩 품고 젓가락을 들었다.
살살 녹는 연어 사시미를 느끼며 반찬을 차례대로 집어 들었다.
“......”
한강의 젓가락질이 잠깐 멈칫거렸다. 조심스러운 시선으로 윤희를 바라봤다.
“맛 어때?”
초롱초롱 빛을 뿌리는 아내의 모습은 무언가 말하려는 입을 봉해 버렸다.
“아, 맛난다. 하...하하.”
생각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너무 싱거운데......’ 한마디 던지고 싶지만, 자신을 위해 준비해준 아내의 성의를 무시하는 거 같아 말하기 망설여졌다.
더욱이 해맑은 미소를 날리는 아내에게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한강은 애써 표정을 유지하며.
“잘 먹을게.”
상 위에 있는 음식을 우걱우걱 집어넣었다.
‘......진짜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겠지.’
걸리는 부분이 있어 이젠 더욱 조심스럽다.
한강은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를 몇 번이고 외우며 밥그릇을 비웠다.
***
따라란.
아침이 되었다. 핸드폰 알람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시간은 7시.
윤희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가 있었다.
“그래 그럴 리 없지.”
어제 떠올린 끔찍한 기억을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하지만, 그 마음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섬뜩한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맛있게 먹어.”
아침이면 내오던 고기가 없었다. 찌개도 보이지 않았다.
콩나물국과 김, 그리고 어제 먹은 나물과 김치. 이게 다였다.
“......”
콩나물국마저 싱겁다. 한강은 눈치를 보다 이내 결심한 얼굴로 윤희를 응시했다.
“자기야, 혹시 어렵거나 힘들고 내게 섭섭한 일이 있다면 숨기지 말고 꼭 얘기해. 잘못된 거 있으면 고칠 테니까.”
“하여튼 내 남자 말은 예뻐. 알았으니. 어서 먹고 가. 난 재석이 밥 줘야겠다.”
함박미소를 던지며 재석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휴.”
이래서 사람은 죄를 지으면 안 되나 보다. 잘 떠지지 않는 숟가락을 힘겹게 움직여 밥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넣었다.
지이이이이이잉.
식사를 힘겹게 마치고 출근길에 나섰다. 아들과 아내와 인사를 하고 밑으로 내려갔다.
“편지가 와있네.”
아직 윤희가 확인을 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냥 갈까 하다 우체통에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꺼냈다.
“......”
생각 없이 꺼낸 편지에 한강의 몸이 굳었다.
너무도 황당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명: 유한강]
[생년월일: 85년 3월 XX일]
[주소: 서울특별시 XXX...]
[입영부대: 논산 훈련소.]
[입영일시: 2005년 10월......]
“망할......”
봉투를 뜯고 안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한강의 얼굴은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괜히 확인했다며 고개를 떨궜다. 어제부터 느낌이 좋지 않더라니.
“하아......”
잊고 있었다. 군면제도 기초훈련은 받는다는 걸.
한강은 터벅터벅 걸어 기사가 대기하고 있을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기사님. 저 군대 갑니다.”
차량에 오른 한강은 영혼 없이 말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하.”
기사는 다른 말 없이 가볍게 웃었다.
백미러로 한강의 표정을 슬쩍 살피는 걸 잊지 않았다.
“후우......”
전생부터 느끼던 거다. 전역한 순간부터 절대 군부대 방향은 쳐다도 안 보겠다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예비군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을 공통된 생각을 한강도 품고 있었다.
“이걸 윤희에게 또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번 일로 더 미움받지 않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