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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버는 게 예술이다-120화 (120/237)

120화. 21살, 쇼팽 콩쿠르 본선

지잉!

바이올린의 선율이 울려 퍼졌다. 바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선율에 눈과 귀를 빼앗겼다.

“꿀꺽.”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침을 삼켰다.

설마 했는데 이건 도가 지나쳤다.

세상에 음악의 신이 있다면 한마디 하고 싶었다.

“넌 진짜 천재구나. 이런 아름다움이라니.”

하지만 그것도 내려놓게 되었다.

오로지 시선은 한강에게 향했다.

뛰어난 천재는 질투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한강의 연주를 눈을 감고 즐겼다.

지잉.

한강은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연주에 집중했다.

현을 누르는 손길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화려했다.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공기를 떨게 하며 박자에 더했고, 사람들의 걸음 소리는 경쾌함을 일으켰다.

손에 들린 활이 쉼 없이 움직였다.

마치 바이올린을 개량한 스트라디바리의 부탁을 들어주기라도 한다는 듯, 현을 긁어 세상에 존재감을 과시했다.

“남자가 아름답다 여기는 놈은 나뿐만은 아닐 거야.”

노란 조명 아래 나 홀로 빛을 뿌리는 친구의 모습은 파가니니와 겹쳐 보이게 하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장난치듯 위아래로 움직이는 활대는 사람들의 마음을 잡고 유린하였다.

“라 캄파넬라.”

파가니니의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곡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2번,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라 캄파넬라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리스트가 피아노곡으로 편곡하게 된다.

그때 리스트의 감정이 이러했을지 모르겠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한강에게서 그걸 느꼈다.

“정말 사기적이야. 그림에 피아노에 이젠 바이올린이라고.”

한 가지를 대성하기도 힘든 이때, 한강은 모든 걸 수준급으로 악기를 다뤘다.

화려한 퍼포먼스 따위 무시하고 나 홀로 고고한 학이 되어 음악의 신이 되려는 자.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활로 강하게 누르는 순간 세상은 하나가 되었다.

짝짝짝.

사람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중에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도 껴있었다.

그는 기립까지 하여 해병대도 울고 갈 박수를 한강에게 보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여기서 나서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시선은 옆쪽에 자리한 피아노로 옮겨졌다.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치기도 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술에 다 날아가지 않은 테킬라의 여운을 즐기며 걸음을 옮겼다.

“치사하게 혼자 좋은 걸 하고 있었네. 한강.”

“미로슬라브. 네가 왜 여기에?”

한강은 놀란 눈으로 앞에 당도한 친구를 바라봤다.

“왜 내가 오면 안 될 곳이라도 왔나? 나 몰래 비밀 특훈이라니. 한 곡 더 가능하지?”

심술 가득한 눈이 한강의 눈으로 향했다.

“라 캄파넬라를 다시 연주하자고?”

한강은 되물었다.

사람들에게 보인 곡을 다시 보인다는 게 썩 내키지 않은 얼굴이다.

“당장 자세 잡아. 협주곡은 또 다른 곡이란 걸 잊었어.”

한강이 내빼려 하자,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피아노에 자리를 잡았다.

“내뺄 생각 마.”

“......알았다.”

한강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맺혔다.

한강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입에도 행복감이 머물렀다.

딴.

지잉.

곧 둘의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바의 공기는 다시 한번 뜨겁게 달아올랐다.

둘의 협주곡은 일부 사람들이 준비한 핸드폰과 캠코더에 고스란히 녹화됐다.

***

[폴란드 바르샤바의 밤을 장식하다.]

[달빛이 젖어드는 파가니니 라 캄파넬라가 두 사람에 의해 재탄생을 하였다.]

[쇼팽 콩쿠르 본선 진출자 유한강과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그 주인공이다.]

[피아노 실력만큼이나 우수한 바이올린 실력을 내뿜는 유한강 회장과 러시아의 별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만남은 지친 사람들에게 활기를 되찾아 주는 효과를 낳았다.]

[아래는 당시 두 사람이 연주한 파가니니에 라 캄파넬라다.]

지잉!

“어째 녀석은 어딜 가든 저리 난리법석인지 모르겠어.”

실장이 가져온 영상을 본 이건호의 반응이었다.

뭔 놈의 재주를 저리 타고났는지 뱀의 마음이 꿈틀댔다.

“녀석을 식사에 초대하지 못한 게 아쉽군.”

붉은 고기를 언제 먹어 봤나 싶을 정도로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맛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다. 모든 음식이 싱거워 소금이 그리워질 정도가 되니 광기가 일렁였다.

그래도 건강을 생각한다고 사위의 편을 들어 주어 식사에 초대를 하지 않았거늘...

“초대로 끝내면 안 되겠어...”

혼자 잘 나가는 모습을 보니 더는 안 되겠다.

건강을 가족 전체가 지키고 함께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터.

“윤희냐. 나다.”

이건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는 딸인 윤희였다.

“요즘 사위가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아. 내 알아보니 음식이 너무 짠 거 같더구나. 고기도 될 수 있으면 줄이고.”

수화기가 내려졌다.

“욘석. 한 번 당해보거라.”

이건호는 한강에게 아주 소심한 복수를 하였다. 이유는 아주 좋게 포장하여.

***

아시아의 대격돌.

“쇼팽 콩쿠르 이래 최초야. 정말 놀라워.”

각국의 천재들이 참가해 본선전부터 큰 화제를 낳았던 콩쿠르.

아시아인 중에 한국인으로 구성된 인원만 무려 여섯 명이 쇼팽 콩쿠르 본선에 진출했다.

그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정말로 뿌듯합니다. 그만큼 한국인의 실력이 크게 올랐음을 의미하는 거겠죠.”

한국을 대표하는, 한리버란 별명으로 기업을 일군 남자.

바로 유한강 한리버 회장이었다.

한강은 모여든 기자들과 인터뷰를 나누며 한국의 위상을 알렸다.

“영국의 BBC 엘런입니다. 며칠 전 있던 바에서 있었던 연주 참으로 멋졌어요. 피아노도 피아노지만, 바이올린도 상당히 수준급으로 익혔다며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는데,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켰는지 알 수 있을까요?”

다음으로 질문을 던진 여성은 금발이 참으로 매혹적인 여기자였다.

그녀도 당시 바에 있었는지, 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질문했다.

“피아노와 같은 시기에 접했습니다.”

“정말 음악의 신이 당신과 함께 하나 보네요. 하나를 익히기도 힘들다 들었는데. 그럼 차후 바이올린도 콩쿠르에 나갈 생각이신가요?”

“아뇨. 전 대회는 여기까지만 활동할 겁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나머지는 후배님들께 맡길까 합니다.”

“그럼 피아노는 다시 치지 않겠단 소린가요? 많은 팬들이 슬퍼할 거예요.”

여기자의 눈에 아쉬움이 깃들었다.

한강은 살짝 미소를 내보였다.

“제가 콩쿠르와 멀어진다 하더라도 오션월드와 월드 플레이에서 저의 영상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 거기서 회장님을 볼 수 있다는 말이죠?”

“네. 한리버 유한강을 검색하시면 많은 영상과 방송을 접하실 겁니다.”

“호호, 깨알 같은 홍보네요. 좋아요. 이번 콩쿠르 팬으로서 응원할게요. 좋은 성적 거두길 바라요.”

침울하던 여기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한강은 여기자를 보내고 시선을 돌렸다.

“인터뷰 끝났나?”

“미로슬라브.”

미로슬라브가 다가왔다. 그도 막 인터뷰를 끝낸 모습이다.

“실수하지 마라.”

“너도. 좋은 연주 부탁한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와 악수를 했다.

이번 대회는 아주 의미 있는 대회가 되리란 생각을 가졌다.

“그건 그렇고......”

대기실로 향하는 그를 보다 뒤에 굳은 채 서 있는 석상 다섯 명에게 시선을 가져갔다.

“거기서 뭐 하세요?”

모두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저래서야 제대로 된 실력은 나오지 않을 터다.

한강은 검지로 이마를 긁었다.

“회장님은 긴장되지 않으세요?”

여성 참가자인 차혜리였다. 나이는 스무 살로 평소 차분함을 잃지 않던 여자였다.

“그리 긴장은 안 되는데, 무엇 때문에 긴장이 된다는 건가요?”

“그러니까, 그게......”

“상금을 받지 못할까 봐? 돈은 제법 번 걸로 아는데. 이것도 아니면 실수할까 봐? 우리가 그 정도로 연습을 게을리했던가요? 이것도 아니면 저 많은 사람들 때문?”

“......”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과 대회라는 키워드 때문에 긴장한 걸로 보인다.

저명한 인사들이 모여 연주를 지켜본다 생각하니 더욱 그런가 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몇 마디 한다고 도움이 될 거 같지 않으니 한마디만 하고 갈게요. 여러분은 프롭니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프로의 자세를 가지세요. 겨우 이 정도로 떤다면 어딜 가든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자신을 믿고 연습한 만큼 하세요. 이 정도면 모두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건투를 빌게요.”

해줄 만큼 해줬다. 이 말이 저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를 일이지만, 모든 결과는 저들에게 달렸다.

한강은 자리를 피해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

딴!

“해냈다.”

긴장하던 것도 아주 잠시였다. 피아노 앞에 앉자 한강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쳐 손을 이끌었다.

긴장감을 잊은 지 오래전 일이었다.

모든 연주를 무사히 마친 차혜리는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한 후 사람들의 박수 속에 자리를 떴다.

“미로슬라브 차례인가.”

이번 대회는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 중 하나를 선택해 연주를 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은 2번.

미로슬라브는 몇 번을 연주할지 무척 기대됐다.

‘가서 봐. 후후.’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입을 닫았다.

저벅저벅.

무대 앞에 등장하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가 올라갔다.

한강은 화면을 응시했다.

딴!

연주가 시작됐다.

***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오직 하얗고 검은 건반을 바라봤다.

‘잘 들으라고, 한강. 너와 같은 2번이다. 우리가 승부를 하기에... 아주 멋진 곡이 될 거야.’

[나 2번으로 할 거야.]

너무도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해주던 한강을 떠올려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와의 연주는 무척 즐겁다. 경쟁은 차갑게 식은 가슴을 뜨겁게 달궈 녹여주었다.

결코 싫지 않은 기분.

오히려 매일 이런 마음이 유지되길 바랐다.

지휘봉이 허공을 강하게 가로질렀다.

그 순간.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 라르게토(Larghetto)가 회장에 퍼졌다.

“미로슬라브 녀석 나랑 같잖아.”

첫 선율을 듣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사람들이 왜 그를 천재 중의 천재라며 엄지를 세우는지 알 거 같았다.

들려오는 연주는 짝사랑하던 여인을 떠올리게 하였다. 함께 풀밭을 뛰놀며 짝사랑과 나누는 행복감이 공기를 타고 고막으로 전달돼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였다.

“너란 녀석은 정말 대단해.”

전생에서도 직접 들어보지 못한 그의 연주는 이 순간, 모든 걸 잊게 만들었다.

다른 생각 따위 거둬버리고 오로지 그의 음악만이 심장을 뛰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그를 넘기에 아직 한참 멀었다.

딴!

“아......”

마지막 건반이 눌러지고 연주가 끝났다.

한강은 짧게 감탄을 터트렸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지... 정말 잘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질투 따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호승심이 생겼다. 그리고 그의 연주에 박수를 보내었다.

“다시 잊지 못할 곡이야. 나도 답곡을 해줄게. 잘 들어보라고.”

영상에서 사라지는 그를 보며 한강은 크게 다짐했다.

“다음 연주자는 한국의 피아니스트 유한강입니다.”

한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고 무대가 보이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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