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21살, 쇼팽 콩쿠르 본선
“육성 자동차 지분 10% 확보했습니다. 계열사별로 쪼개 놓아서 당장 외부로 드러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오래 숨겨 두긴 힘들 걸로 보입니다.”
한강의 개인적인 지분도 소폭 늘어난 상태에 한리버에서 엄청난 물량을 확보한 과정에서 육성 자동차 주가가 소폭 상승했다.
개미 투자자들은 원인을 모른 채 팡파르를 울리며, 육성 자동차의 주가가 십만 원을 넘게 될 거라며 적극 투자에 나서는 움직임을 내비쳤다.
“그 정도면 됐어요. 우리가 공시하기 전까진 육성 자동차가 우리에게 넘어오는 건 최대한 숨기세요. 분명 냄새를 맡고 달라붙는 기자가 있을 거니까요.”
어떻게 그리 잘 찾아내는지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연예인들 열애나 기업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일들로 다뤄진 기사들은 아주 정확할 정도로 맞아떨어졌다.
처음엔 아니라 하지만 더 숨기기 힘들다 싶을 때, 사실을 인정하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즉,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일은 없다는 의미다.
원인이 있기에 결과가 있다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음반 판매는 어때요?”
“CD판매보다 오션월드나 핸드폰 컬러링과 벨소리 구매가 훨씬 많은 상태입니다. CD는 1만 5천 장 정도 판매됐습니다.”
“와우, 그래도 그 정도면 대박이네요.”
“판매량은 꾸준히 늘 걸로 보입니다.”
미술가 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는 한강의 인지도는 어린 시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확장됐다.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낙서한 종이도 돈 주고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날 정도였다.
“정산에 문제없도록 해주세요. 약속은 기업의 신뢰와 가치로 이어진다는 점 늘 직원들에게 주지시키시고요.”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한강은 노파심에서 김동진에게 주의를 주었다.
사람의 일이란 게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폴란드에서 당분간 머물게 될 건데, 잡음은 없어야 할 거예요.”
자리를 비울 때가 가장 위험하다. 그래서 몇 번이고 주의를 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폴란드로 넘어가는 시간은 몇 주 남지 않았다.
한강은 슬슬 시동을 걸어 본선 준비에 들어가기로 하였다.
출전한 이상 결코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따라라라라라.
피아노 소리가 방음 처리된 벽을 뚫고 밖으로 흘러나왔다.
“회사에서 스테이크 썰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긴 첨이네.”
피아노방을 지나는 한리버 직원들의 목소리다.
스테이크를 써는 흉내를 내며 커피가 든 컵을 입에 가져가 조용히 음미했다.
“맞아요. 진짜 우리 회장님 볼수록 대단하다니까요. 넘 멋져요.”
곁에 자리한 여직원은 음료를 두 손으로 꼭 잡으며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얼굴에 황홀함이 깃들며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빠져들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해.”
“......”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분야로 성공하기도 힘든 상황에 한강은 많은 걸 이룩했다.
그림으로 별명을 얻고 수많은 사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피아노는 또 어떤가? 3대 콩쿠르에 알려진 한 곳에선 대상을 수상하고 다른 한 곳은 본선에 진출했다.
사람들은 이번에도 수상을 하게 되리라 확신했다.
끝으로 기업가로의 대변신.
과연 회사가 잘 운영이 될까 싶었는데, 눈부신 성장을 이어 한국에서 IT기업 최강자로 우뚝 섰다.
기업가치는 비공식으로 국내에서 30위권에 드는 수준.
상장된 회사가 더움과 네이컴뿐인 걸 감안한다면 대단한 성적이었다.
사람들은 한강의 대단함에 질투보다 경외심을 느끼며 한강의 연주를 즐겼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끝은 폴란드로 항해를 시작했다.
***
[06년 상반기까지 신권 지폐를 도입할 예정입니다.]
한국은행은 1983년 이후 22년 만에 새 지폐로 바꾸기로 발표를 하였다.
사람들은 기대 가득한 마음으로 바뀌는 신권을 기다렸다.
“시원하다.”
평년보다 1도 높은 15도이지만, 날씨는 제법 선선하니 시원했다.
한강은 불어오는 바람을 잠시 느꼈다.
그것도 잠시 한강의 시선은 뒤로 향했다.
“미안해. 꼭 가고 싶었는데...”
윤희가 아이를 안아 들고 미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야. 오히려 내가 미안해. 널 또 두고 가게 돼서.”
솔직히 말해 며칠간 고민을 하였다. 지난날 영광을 얻은 만큼 쇼팽행을 포기할까.
‘뭘 소리야. 나가서 당당히 우승해서 와. 우리 재석이에게 자랑하고 싶으면 무조건!’
그 부분을 윤희에게 내비쳤다 한 방 먹었다.
윤희는 무조건 나가야 된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다녀와. TV를 보며 응원할게.”
“고마워. 재석아 다녀올게.”
한강은 윤희와 재석을 함께 안아주고 발길을 돌렸다.
“재석아, 아빠 멋지지. 저게 너의 아빠란다. 우리 재석이도 크면 꼭 아빠처럼 성장을 해야 한다.”
뒤에 남겨진 윤희는 한강의 뒷모습이 사라지기까지 지켜보며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쉬이이이이이.
한강이 올라탄 비행기가 활주로를 지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잘 다녀와. 한강아.”
윤희는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
끼리리릭.
폴란드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한강은 가장 가까운 곳에 숙소를 잡아 짐을 풀었다.
“누가 이번에 우승자가 될 거 같습니까?”
짐을 풀고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한국에서 알 권리가 있다며 손수 비행기를 타고 기자가 날아와 마이크를 내밀었다.
“저에게 있어 모든 분들이 경쟁자십니다. 전부 대단한 분들로 구성돼 누가 우승자가 될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기자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했다.
속으로는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라 생각하고 있지만, 그걸 직접 지목하기에 보는 시선들이 너무 많았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 씨는 우승자로 회장님을 지목했는데, 혹시 회장님도 스스로가 우승 후보라 생각하고 계시는 건 아닌가요?”
기자의 날카로운 질문은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제가 우승하면 참으로 좋을 거 같네요. 전 모두와 후회 없이 온 힘을 다하여 겨루고 싶습니다.”
퀸 엘리자베스와 다르다. 그때보다 쟁쟁한 실력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강은 인터뷰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재미없게 인터뷰를 한다니까.”
자리를 뜬 여기자는 미간을 좁혔다.
기사로 내보낼 만한 재밌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김치찌개에 김칫국물이 빠진 밋밋한 맛이 혀끝에 머물렀다.
“어쩔 수 없지. 충분히 예상한 일이잖아.”
곁에 자리한 동료 기자도 실소를 머금고 여기자를 달랬다.
“남자가 말이야, 속에 있는 말 시원하게 공개하면 얼마나 좋아.”
하지만 여기자는 풀리지 않는지 콧김을 연달아 뿜어댔다.
“참으라고. 그는 예술계 신이야. 다른 사람과 다른 위치에 있는 만큼 조심하는 걸 테지. 딸린 식구에 아들을 생각하면 누구보다 우승을 하고 싶은 사람은 그일 거야.”
남기자는 여기자를 말리며 한강을 두둔했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한강은 한국의 대표적인 음악가였다.
그로 인해 벌어들이는 외화는 결코 무시 못 했고, 한국을 알리고 있는 아주 멋진 한국인이었다.
“내가 나쁜 년이지. 쯧. 누구는 악당역 맡고, 누구는 옆에서 천사질이고.”
“크크, 가자고. 먼저 자리를 잡는 새가 많은 기사를 쓰는 법 아니겠어.”
여기자의 말에 남기자는 웃으며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끌어 자리를 옮겼다.
“조금 섭섭하네. 결혼식까지 갔는데, 나를 우승 후보로 지목하지 않다니.”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단단히 삐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한강을 맞이했다.
“좀 봐달라고. 미로슬라브.”
한강은 침통한 얼굴로 두 손을 합장했다.
참으로 애처롭고 불쌍한 얼굴이었다.
“안 속아.”
하지만,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콧방귀를 뀌며 눈썹 한쪽을 올렸다.
“하하, 너무 그러지 말라고. 내 마음속 일등은 너니까.”
“그걸 저기 가는 분들에게 말해주고 온다면 믿어 보도록 하지.”
“크크크.”
한국에선 느끼지 못한 가벼움을 폴란드에서 느꼈다. 너무 성장해 친구들이라 말할 수 있는 대상이 한국엔 없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것도 이유에 속했고.
‘그러고 보니 이번 생과 저번 생은 친구라 말할 수 있는 대상이 없구나.’
친구 관계만큼은 전생과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었다. 너무 빨리 성장한 만큼 주변에 있는 거라고 기업가의 오너들뿐.
“웃지 말고 내 말 들어보라고 친구.”
그런 와중에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쉬지 않고 불만을 털어냈다.
‘그건 아닌가. 조금은 달라졌나?’
처음엔 점잖고 신사처럼 대하던 녀석이 수다쟁이가 되었다. 이런 대우를 받아 본 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다.
“우리 이번에 잘하자. 내가 응원할게.”
“......그 말을 기자들이 들었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모를 거야. 너의 본 모습이 얼마나 여우 같은지를.”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떨떠름한 얼굴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손을 올려 보였다.
“이거 보여? 이 소름을?!”
“크크크.. 배고프다. 밥 먹자. 내가 밥 사지.”
가족이 아닌 타인으로 인해 오랜만에 즐겁게 웃었다.
한강은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를 데리고 식당으로 데려갔다.
“휴, 이제 뇌물이라니.”
미로슬라브 꿀띠쉐프의 말이 작게 귓가로 들려왔다.
***
러시아의 밤과 달라 그런 걸까? 잠이 오지 않았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술이 당기는군.”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불을 옆으로 밀고 걸음을 옮겨 냉장고로 걸어갔다.
벌컥벌컥.
물을 꺼내 입을 축였다. 술 대신 물로나마 갈증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
하지만 물로는 찾아오는 알코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다.
“바에 가봐야겠어.”
긴장을 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일까?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잠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이대로는 잠을 이루지 못할 거 같았다.
누가 깰세라 발걸음 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바(bar)로 향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층에 멈춰 있어 바로 올라탈 수 있었다.
띵, 소리와 함께 아래로 향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테킬라로 부탁해요.”
무난하게 테킬라를 선택했다. 레몬에 끼워진 잔과 하얀 소금이 놓였다.
손등에 소금을 올려 혀로 맛을 보고 테킬라 한 잔을 가볍게 들이켰다.
카아,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레몬을 입에 가져가 쭉 빨았다.
“한 잔 더 부탁해요.”
테킬라를 추가했다.
“이럴 줄 알았음 녀석을 부를 걸 그랬나?”
시간을 확인했다. 제법 늦은 시간이다. 가까워진 사이라 하지만 늦은 시간에 부를 정도로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아쉬움을 애써 달래며 나 홀로 술을 즐겼다.
“오, 시작하는군.”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주변이 술렁였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갑자기 시끌시끌한 바에 의아함에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가져갔다.
“바이올린?”
거리가 떨어진 장소에 어떤 남자가 바이올린들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연주를 하려는 모양이다.
호기심이 동했다.
“응? 그런데 좀 익숙한데...?!”
아직 취하지 않았는데, 눈에 헛것이 보였다. 아주 익숙하면서 바이올린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거 같은 남자.
한데, 그게 또 미묘하게 아주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동공을 확장해 무대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유한강?!”
남자는 다름 아닌 유한강이었다.
미로슬라브 꿀띠쉐프는 놀란 얼굴로 한강을 바라봤다.